
10여 년 전만 해도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당시 대만 최대 IT 기업의 한 C레벨 임원과 인터뷰에서 “한국 스타트업의 대만 진출”에 대해 묻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가망이 없다”고 답했다. 그때만 해도 그의 판단은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적어도 관심도 측면에서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타이베이시 정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Taipei Entrepreneurs Hub(TEH) 프로그램에 참여한 전체 12개국 중 한국 스타트업의 신청 비율이 1위를 기록했다. 해외 지원자의 3분의 1 이상이 한국에서 접수된 것이다. 물론 신청 비율이 높다고 해서 실제 성공 사례가 많다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관심도 면에서는 10년 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타이베이의 전략적 변화가 있다. 글로벌 AI 선두 기업 NVIDIA가 2025년 타이베이에 AI 연구개발 센터를 설립한다고 발표하면서, 타이베이는 생성형 AI 및 칩 기술의 아시아·태평양 거점으로 자리매김하려 하고 있다. 반도체 선도 기업 TSMC의 연구개발 확장과 함께, 동아시아 AI 혁신 중심 도시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타이베이시는 한국을 전략적 핵심 파트너로 명시했다. TEH 프로그램을 통해 AI 인재 확보 및 기술 스타트업 교류에서 한국과의 협력을 대폭 강화한다고 발표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현재 2년차에 돌입한 이 프로그램은 의료, 엔터테인먼트, 제조 등 분야의 응용 및 기반 AI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을 전 세계에서 모집하고 있다.
실제로 여러 한국 팀이 TEH 프로그램을 통해 타이베이에 입주하여 대만 기업과 공동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고 발표됐지만, 구체적인 기업명이나 성과는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타이베이시가 한국 AI 기업의 정착을 위해 창업 비자, 디지털 노마드 비자, PoC 지원금, 기업 매칭 시스템을 통합 제공하는 등 제도적 기반을 갖춘 것은 분명하다.

6월 26일에는 대만 최대 벤처 캐피탈 중 하나인 중화개발자본(CDIB)과 크로스보더 펀드 Headline Asia가 TEH 대표단과 함께 서울을 방문해 TIPS Town 및 서울산업진흥원(SBA)과 교류했다. 대만증권거래소(TWSE)도 한국 기술기업을 대상으로 한 첫 IR 행사를 개최하여 대만 자본시장 진출 방안을 소개했다.
에이수스(ASUS), 시스텍스(SYSTEX) 등 대만 대표 ICT 기업들이 TEH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선정된 AI 스타트업에 공동 연구개발, PoC 파일럿 기회, 투자 전략 매칭 등을 제공하고 있다. 협력은 AI와 하드웨어 기술을 넘어 엔터테인먼트 분야까지 확장되고 있다. 타이베이시는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테크 및 콘텐츠 혁신 역량을 높이 평가하며, 2024년 고양시 산하 창업기관 GIA와 MOU를 체결해 영화, 음악, 콘텐츠 기술 분야에서의 협력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오는 9월 StartSphere Taipei에서는 한국 음악, 버추얼 아이돌, AI 음성 합성 등 분야의 기업과 전문가가 참여하는 엔터테인먼트 테크 포럼이 열릴 예정이고, 10월에는 AI Demo Day 및 글로벌 매칭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다.
타이베이시 정부는 “AI 및 기술을 시정 전략의 핵심으로 삼아, 한국 스타트업을 위한 정착 보조금, 사무 공간 지원, 맞춤형 매칭 및 투자 연계를 지속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0년 전 “가망이 없다”던 상황에서 지금의 활발한 관심과 제도적 지원까지, 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와 각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성숙이 만들어낸 변화다. 아직 구체적인 성공 사례가 많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가능성의 문은 활짝 열린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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