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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자가에 강남 스타트업 다니는 제이슨 이야기

서울 자가에 강남 스타트업 다니는 제이슨 이야기

제이슨(본명: 김형식, 51세)은 오늘도 오전 11시에 출근한다. 자율출퇴근제니까.

3년 전 대기업 SI회사를 떠날 때, 그는 결심했다. 20년을 다닌 회사였다. 안정적이었다. 동기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았다. 승진은 못 해도 61세까지 정년은 보장되니까. 요즘 그 친구들은 골프를 배우고, 등산 동호회에 가입하고, 주말농장을 알아본다. 10년 후를 준비하는 취미 생활들.

제이슨은 정해진 미래를 견딜 수 없었다.

토스, 당근마켓, 쿠팡.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대로 10년을 더 버티다가 61세에 퇴직하면?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48세,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늦지 않아야 했다.

강남 스타트업이 그를 받아줬다. 시리즈B를 받은 곳이었다. 직원 60명. 35세 CEO는 솔직했다.

“저희한테 부족한 게 프로세스예요. 형식님, 대기업에서 수십 개 프로젝트 돌려보신 거 알아요. 그게 필요해요.”

연봉 1억 2천, 스톡옵션 0.3%. 그리고 새 이름, 제이슨.

동창 모임에서 친구들이 놀렸다. “야, 영어 이름까지 쓰네?” 제이슨은 멋쩍게 웃었다. 뭐 어때. 변화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48세에 새로 시작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니다.

필요한 사람, 낡은 사람

실제로 제이슨이 합류하고 나서 달라진 게 있었다.

개발팀과 기획팀이 따로 놀던 게, 주간 싱크 미팅으로 정리됐다. 출시 일정이 매번 밀리던 게, 마일스톤 관리로 지켜지기 시작했다. 20대들은 아이디어가 넘쳤지만, 그걸 실행으로 옮기는 데는 서툴렀다.

“형식님, 이거 어떻게 해야 해요?”

29세 기획자 레이나(본명: 김연우)가 난감한 표정으로 물어올 때가 있다. 대기업 클라이언트가 무리한 요구를 할 때. 일정이 겹쳐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때. 개발 리소스가 부족한데 기능은 늘려야 할 때.

제이슨은 답한다. 20년 동안 수도 없이 겪었던 일들이다.

“일단 클라이언트한테 이렇게 말해봐. 그리고 이 기능이랑 저 기능 중에서…”

구체적인 조언이 나온다.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합니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다.

하지만 다음 회의에서 제이슨이 기획안에 이것저것 지적하면, 레이나의 표정이 굳는다.

제이슨은 생각한다.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 동시에 자신이 낡은 사람이라는 것. 둘 다 사실이다.

배우는 것들

“제이슨님, 이번 스프린트 OKR 세팅 어떻게 하실 건가요?”

OKR. Objectives and Key Results. 제이슨은 책과 유튜브로 공부했다. 구글이 쓰는 목표 관리 방식이라고 했다. 대기업에서 20년 쓰던 MBO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이름이 달랐다. 새로 배웠다.

슬랙도 배웠다. 메신저 하나 배우는 게 뭐 대수냐고 할 수 있지만, 51세에게는 대수다. 이모지로 답하는 것, 스레드를 여는 것, 채널을 만드는 것. 하나하나 물어볼 수도 없어서 혼자 공부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렇게 한답니다.”

제이슨은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젊은 직원들이 뒤에서 웃는 걸 알고 있다. ‘제이슨님 또 실리콘밸리 타령.’ 20년간 대기업 방식만 알던 사람이 새로운 방식을 배우려면, 어딘가에 기대야 한다. 실리콘밸리는 그에게 교과서였다.

“제이슨님 스탠포드 가보셨어요?”

“응, 2주 교환학생으로.”

“아…”

2주가 짧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또 하나 배워야 할 것

회사에서 ChatGPT Team과 Claude Pro를 구독해줬다.

레이나가 말한다. “형식님, 이 반복 작업 AI로 자동화하면 개발 시간 반으로 줄어요. 프롬프트 짜서 워크플로우에 넣으면 되는데.”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인다.

주간 회의에서 CTO가 새로운 지표를 공유한다. “이번 주부터 개인별 AI 토큰 사용량을 트래킹합니다. 엔지니어든 마케터든, 업무 효율성의 지표가 될 거예요.”

토큰. AI가 처리하는 텍스트 단위. 많이 쓸수록 AI를 잘 활용한다는 뜻이다.

제이슨은 집에 가서 유튜브를 켠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입문”. “AI 업무 자동화”. 새벽 1시까지 본다.

대기업 동기 단톡방에 메시지가 뜬다.

“AI 자료 조사할 때 진짜 편하더라. 너희도 써봐.”

“우리 회사는 보안 때문에 못 쓰잖아. 집에서 개인 계정으로만.”

“천천히 배우면 되지 뭐.”

제이슨은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천천히 배울 수 없다. 다음 주 회의에서 본인의 토큰 사용량이 공개될 것이다.

51세가 배우는 속도와, 20대가 요구하는 속도는 다르다.

따라가는 것들

점심은 샐러디에서 먹는다. 연어 포케볼 1만 2천 원. 비싸다. 예전엔 팀원들과 8천 원짜리 김치찌개를 먹었다. 하지만 여기선 다들 샐러디를 먹는다. 건강을 챙긴다. 제이슨도 따라 먹는다.

“탄수화물은 오후에 졸려요.”

레이나가 말한다.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 하지만 혼자 김치찌개를 먹으러 갈 수는 없다. 그럼 ‘꼰대’가 된다.

나이키 에어맥스도 그렇게 샀다. 옆자리 개발자가 신고 있는 걸 봤다. “이거 미국 사이트에서 직구했어요. 한국엔 아직 안 들어온 컬러예요.” 제이슨은 그날 밤 미국 사이트를 뒤졌다. 영어로 된 사이트를 번역기 돌려가며 주문했다. 18만 원. 비쌌다. 하지만 샀다.

테슬라 모델3도 마찬가지다. 회사 주차장에 테슬라가 세 대 있었다. CEO 것, CTO 것, 그리고 마케팅 리드 것. 제이슨은 생각했다. ‘나도 리더인데.’ 할부로 샀다. 한 달에 80만 원씩 나간다. 아내가 반대했다.

“여보, 우리 집 대출 이자만 180만 원인데.”

“곧 회사 상장하면 스톡옵션이 15억이야.”

15억. 제이슨은 그 숫자를 믿는다. 믿어야 한다.

화장실 칸

주간 제품 회의. 레이나가 유저 인터뷰 결과를 발표한다. 데이터 분석도 했고, 경쟁사 벤치마킹도 했다. 준비를 많이 했다.

“레이나, 좋은데… 그런데 이건 좀 legacy한 접근 아닐까요?”

Legacy. 구시대적. 제이슨은 이 단어를 쓰면서 마음이 아프다. 자기야말로 구시대 사람인데. 하지만 말해야 한다. 그가 리더니까. 그래야 ‘따라가고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으니까.

회의가 끝나고 화장실에 간다. 옆 칸에서 두 명이 이야기한다.

“제이슨님 진짜 꼰대 아니야?”

“그래도 뭐… 나이 생각하면 할 만한 거 아냐?”

“그건 그래.”

제이슨은 숨을 참는다. 칸에서 나가지 못한다. 그들이 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거울을 본다. 51세 김형식이 보인다. 아니, 제이슨이 보인다.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타운홀

어느 날, 슬랙에 전체 공지가 떴다.

“내일 오전 10시 전사 타운홀 미팅이 있습니다.”

제이슨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CFO가 최근 “번레이트 관리”를 자꾸 언급했다.

다음 날, 35세 CEO가 무대에 섰다.

“시리즈C 투자 유치가 예상보다 어려워졌습니다. 조직 효율화가 필요합니다.”

효율화. 제이슨은 그 단어를 안다. 대기업에서 20년 일하면서 수도 없이 들었다.

“고연봉자 중심으로 재배치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제이슨의 연봉은 1억 2천이다. 회사에서 세 번째로 높다. 그는 지금까지 그게 자랑이었다. 20년 경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짐이 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테슬라가 아니라 지하철을 탄다. 주차비 아끼려고.

핸드폰을 꺼낸다. 대기업 동기 단톡방이 떠 있다. “다음 주 골프 어때?” 누군가 물었다. 제이슨은 답장을 쓰려다가 지웠다. 그들에게 뭐라고 말할까. ‘나 구조조정 당할 것 같아’라고?

목동 아파트는 9억이다. 대출이 5억 남았다. 이자가 한 달에 180만 원. 딸 학원비 200만 원. 테슬라 할부금 80만 원.

계산해보니 월급으로는 모자란다. 매달 적자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스톡옵션이 있으니까. 15억.

하지만 회사가 상장하지 못하면? 시리즈C도 못 받는데?

집에 도착한다. 아내가 소파에 앉아 있다.

“자기.”

“응.”

“우리 어떻게 해?”

제이슨은 대답하지 못한다.

김형식(Jason)

다음 날, 제이슨은 출근하지 않았다. 아니, 출근했는데 스타벅스에 들르지 않았다. 그냥 회사로 바로 갔다. 오전 9시에.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자율출퇴근제니까. 제이슨은 자리에 앉아 링크드인을 켰다. 이력서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뭐라고 써야 할까.

“Product Lead with 20+ years of experience in tech industry.”

멋있게 들린다. 하지만 거짓말 같다. 20년 경력이라고 했지만, 그중 17년은 대기업 SI회사에서 보냈다. 스타트업 경력은 겨우 3년이다. 그것도 아직 성공하지 못한.

제이슨은 지운다. 다시 쓴다.

“20년 경력의 개발 조직 리더. 대기업과 스타트업을 모두 경험했습니다.”

솔직하게 썼다. 거창하지 않게. 포장하지 않고.

슬랙 프로필도 수정한다.

“Jason Kim” → “김형식 (Jason)”

별거 아닌 변화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

CEO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대표님, 제 연봉 조정 가능합니다. 회사가 어려운 거 압니다. 저도 이 배에 남고 싶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솔직한 마음이다. 48세에 새로 시작한 이 길을,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다.

오후에 CEO가 답장을 보내왔다.

“형식님, 내일 시간 되세요?”

형식님. 제이슨이 아니라 형식님.

그 호칭이 이상하게 편했다.


제이슨은 오늘도 출근한다. 오전 11시가 아니라 9시에. 스타벅스가 아니라 회사로 바로. 샐러디가 아니라 편의점 김밥을 먹는다. 테슬라는 팔았다. 지하철을 탄다.

슬랙 프로필엔 “김형식 (Jason)”이라고 써 있다. 제이슨이 아니라 김형식. 하지만 완전히 김형식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다. 괄호 안에 제이슨은 남아 있다.

48세에 20년 다닌 회사를 나와 스타트업에 뛰어든다는 것. 20대들 사이에서 따라잡으려고 유튜브로 공부한다는 것. 영어 이름이 어색하지만 쓴다는 것. 김치찌개가 먹고 싶지만 샐러디를 먹는다는 것.

어색하다. 서툴다. 20대들이 보기엔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51세는 51세대로 새로운 길을 걷는다.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 스톡옵션이 휴지가 될 수도 있다. 결국 돌아갈 곳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제이슨은, 아니 김형식은 오늘도 출근한다.

기자 / 제 눈에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연예인입니다. 그들의 오늘을 기록합니다. 가끔 해외 취재도 가고 서비스 리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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