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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소맨, 그리고 스타트업 생태계의 ‘병기’들

“빵에 잼 발라먹고 싶었을 뿐인데”

애니메이션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의 주인공 덴지는 극단적으로 낮은 욕망을 가진 인물이다. 부채에 시달리다 악마에게 몸을 빼앗길 뻔한 그가 원했던 건 거창하지 않았다. “빵에 잼 발라먹기”, “여자 가슴 만져보기”. 지극히 소박하고 육체적인 욕구들.

그런데 이 캐릭터가 2025년 한국의 젊은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공감을 얻고 있다. 왜일까? 덴지의 낮아진 욕망은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생존 전략으로서의 체념에 가깝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창업자들도 비슷한 처지에 놓일 때가 있다.

너는 병기다, 인간이 아니다

작품 속 덴지는 공안에 소속되어 ‘체인소맨’이라는 병기로 활용된다. 주변 사람들—특히 상사인 마키마—은 그를 철저히 도구로만 본다. 감정적으로 조종하고, 위험한 임무에 투입하고, 필요하면 버린다.

그런데 정작 덴지 본인은 이 구조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다. 아니, 인식하더라도 벗어날 방법이 없다. 공안을 떠나면 다시 극빈자로 돌아가고, 악마에게 쫓기는 삶이 기다리니까.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도 유사한 패턴이 관찰된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와 오픈서베이가 최근 발표한 ‘스타트업 트렌드리포트 2025’에 따르면, 창업자들이 평가한 생태계 분위기는 54.5점으로 2년 연속 상승세를 보였다. 긍정 변화 이유로는 ‘정부 및 공공 부문의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53.1%), ‘창업지원기관, 액셀러레이터 등 민간 부문의 적극적인 지원사업 증가'(43.8%)가 꼽혔다.

그런데 정작 스타트업 재직자 만족도는 35.0%로 조사 시작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대기업 재직자 만족도(66.5%)의 절반 수준이다.

생태계는 회복세인데, 일하는 사람들은 가장 불만족스러워하고 있다. 이 괴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학교 같이 갈래?”—수평적 관계에서만 가능한 대화

레제 편에서 덴지를 처음으로 ‘인간’으로 대한 사람은 레제였다.

“학교 같이 갈래?”

그녀가 던진 이 한마디는, 덴지에게 완전히 다른 종류의 꿈을 보여줬다. 그전까지 덴지는 “빵, 잼, 여자, 게임” 같은 즉물적 욕망만 말했다. 그런데 레제는 ‘학교’라는, 평범한 일상을 제안했다.

레제 역시 병기였다. 그래서 덴지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도망가자, 시골로”라는 그녀의 제안은 착취가 아니라 연대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넌 나랑 안 어울려.”

자신이 어떤 과거를 가진 사람인지, 언젠가 결국 덴지를 상처 입힐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레제의 모든 대사는 “평범한 행복을 꿈꾸지만, 그걸 가질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의 말”이었다.

스타트업 커뮤니티에서 가장 솔직한 대화는 투자자-창업자 사이가 아니라, 창업자-창업자 사이에서 일어난다.

공식 행사에서는 “성장”, “확장”, “도전” 같은 긍정적 용어가 주를 이룬다. 반면 창업자끼리의 비공개 대화에서는 “번아웃”, “불공정 계약”, “투자자 압박” 같은 이야기가 오간다.

권력 관계가 비대칭적일 때, 솔직한 대화는 구조적으로 어렵다. 레제가 덴지에게 진심을 말할 수 있었던 건, 둘 다 ‘병기’라는 같은 처지였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작동하지만, 사람은 소진된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권총의 악마’는 총기 공포가 만들어낸 재앙급 존재다. 이 악마를 관리하기 위해 주요 국가들이 ‘몸 조각’을 나눠 갖고 서로를 견제한다. 각자가 자기 몫의 조각을 관리하면서 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문제는 조각을 나눠 가진다고 해서 재앙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시스템은 작동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소진되고 파괴된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조사를 다시 보자. 생태계 점수는 54.5점으로 2년 연속 상승했다. 정부의 정책 드라이브, 민간 지원사업 확대가 긍정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창업자의 54.5%는 생태계 분위기가 부정적으로 변했다고 체감한다. ‘긍정적으로 변했다(16%)’는 응답의 3배가 넘는다. 부정 변화 이유로는 ‘벤처캐피탈의 미온적인 투자 및 지원'(50.0%), ‘신규 비즈니스 시장 진입 환경의 저하'(42.3%)가 꼽혔다. 그리고 재직자 만족도는 35.0%로 역대 최저다. 권총의 악마 이야기가 보여주는 건, 시스템이 균형을 유지하는 동안에도 개인은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낮아진 욕망과 여전히 높은 관심 사이

덴지가 “빵에 잼 발라먹기” 같은 낮은 욕망을 가진 건, 그게 실제로 달성 가능한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이다. 거창한 꿈을 꾸기엔 세계가 너무 잔인했다.

그런데 스타트업 데이터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낮은 만족도에도 불구하고 창업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스타트업 재직자의 49.5%, 대기업 재직자의 51.0%, 취업준비생의 47.0%가 지난 1년간 창업을 고려했다.

이건 모순처럼 보인다. 만족도는 최저인데, 창업 고려율은 높다.

체인소맨이 보여주는 세계는 ‘희망 vs 절망’의 이분법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정도면 그나마 견딜 만하다”는 타협의 연속이다. 창업 고려율과 낮은 만족도가 공존한다는 건, 어쩌면 기존 경로들에 대한 회의가 깔려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수치가 말하지 않는 것

생태계 점수 54.5점. 2년 연속 상승.

재직자 만족도 35.0%. 역대 최저.

이 두 수치 사이에, 체인소맨 레제 편 같은 이야기가 있다. 시스템은 작동한다고 말하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학교 같이 갈래?”라는 불가능한 꿈을 속삭인다.

레제는 덴지에게 평범한 일상을 제안했지만, 둘 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더 비극적이었다.

스타트업 생태계도 비슷하다. “혁신”, “도전”, “성장”이라는 말들이 난무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어쩌면 그보다 훨씬 소박한 것일 수 있다.

하인리히 법칙은 중대 사고 1건 이면에 경미한 사고 29건, 징후 300건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재직자 만족도 35.0%는 어쩌면 300개의 징후 중 하나일 수 있다. 작은 신호들이 누적되고,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는다. 그 괴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하는가.

기자 / 제 눈에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연예인입니다. 그들의 오늘을 기록합니다. 가끔 해외 취재도 가고 서비스 리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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