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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의 법칙

첫 문장의 법칙

얼마 전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미국 명문대 입시에서 어떤 학생이 자기소개서를 이렇게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교도소에서 태어났다.”

입학사정관은 그해 수만 건의 지원서를 읽어야 했을 것이다. 대부분은 비슷했을 것이다. 봉사활동, 리더십, 극복한 어려움. 하지만 이 한 문장 앞에서 그는 멈췄을 것이다.

왜 이 문장은 작동했을까. 단순히 충격적이어서가 아니다. 교도소와 탄생. 감금과 시작. 이 두 개념이 만나면 안 되는 자리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독자의 머릿속에서 질문이 폭발한다. 어떻게? 왜? 그 후로는? 한 문장이 서사 전체를 예고한다.

좋은 첫 문장은 정보를 주는 게 아니라 긴장을 만든다.

박제와 천재

한국 현대소설사에서 가장 유명한 첫 문장을 꼽으라면 아마 이것일 것이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의 「날개」다. 1936년에 발표된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지금 읽어도 충격적이다. 박제와 천재. 이 두 단어는 원래 함께 있을 수 없다. 박제는 죽은 것이고, 천재는 살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은 이 둘을 결합시켰다.

더 중요한 건 형식이다. 이건 질문이다. “아시오?” 독자에게 직접 묻는다.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긴다. 그리고 그 질문 자체가 이미 답이다. 박제된 천재.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이 처한 상황이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있다.

이 문장이 90년 가까이 살아남은 이유는 단순히 기발해서가 아니다. 모순된 두 개념이 독자의 사고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박제된 천재란 무엇인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질문이 질문을 낳는다.

불가능한 위치

정유정의 『7년의 밤』은 다른 방식을 택한다.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

질문이 아니라 선언이다. 하지만 이것도 불가능한 조합이다. 아버지는 보호해야 할 존재다. 사형 집행인은 죽이는 사람이다. 이 두 역할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없다. 하지만 공존한다고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아들인가, 살인자인가. 아버지는 무엇을 했길래 아들이 그를 죽여야 했나. 이게 은유인가, 실제 사건인가. 독자는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 불가능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소설 전체를 읽고 나면 이 문장이 정확했다는 걸 알게 된다. 은유도 과장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였다. 하지만 첫 문장을 읽는 순간에는 그걸 모른다. 불가능해 보이는 진술이 호기심을 만든다.

위험한 자기기만

키햐라는 스타트업의 공동창업자들을 인터뷰했다. 기사를 쓰기 위해 데이터를 찾아봤다. 공동창업 스타트업의 3년 생존율은 80%, 혼자 시작한 기업은 48%. 1.67배. 투자 유치율도 비슷했다. 공동창업팀은 63%, 단독창업자는 38%. 숫자는 명확했다. 함께 시작하는 것과 혼자 시작하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그래서 기사를 이렇게 시작했다.

“‘혼자여도 괜찮아’라는 말이, 때로는 가장 위험한 자기기만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숫자들이 있다.”

‘혼자여도 괜찮아’는 위로의 언어다. SNS에 넘쳐나는 긍정의 문구다. 하지만 스타트업 생존율 앞에서 그 위로는 무력하다. 위로와 통계. 감성과 냉정. 이 둘을 한 문장에 놓으니 긴장이 생겼다. 독자는 “정말 그런가?”라고 묻게 된다.

같은 데이터를 “공동창업팀의 생존율이 단독창업자보다 높다”로 시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보일 뿐이다. ‘혼자여도 괜찮아’라는 통념을 먼저 제시하고, 그것을 ‘위험한 자기기만’으로 뒤집는 순간 독자는 자기 생각을 점검하게 된다. 첫 문장이 하는 일이다.

세 번의 일출과 일몰

아듀보 다이그노틱스라는 회사가 있다. 상처 감염을 진단하는 카메라를 만든다. 무쿤드 라마무르티 COO를 만났다. 그는 기존 진단 방식을 설명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의사들이 면봉으로 샘플을 채취해 실험실로 보내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이틀에서 사흘이 걸립니다. 하지만 저희 진단 기기를 이용하면 단 30초 내에 박테리아가 어디에 존재하고, 어떤 종류인지 의사가 정확히 파악해 빠르게 치료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30초와 3일. 기술 스펙으로는 이게 전부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썼다.

“세 번의 일출과 일몰을 기다리는 환자의 시간을 30초로 압축하려는 시도.”

30초는 숫자다. 세 번의 일출과 일몰은 경험이다. 전자는 기술을 설명하고, 후자는 고통을 보여준다. 독자는 숫자보다 경험을 기억한다. 그리고 기억되는 문장이 독자를 다음 단락으로 이끈다.

균열을 만드는 법

교도소에서 태어난 학생, 박제된 천재,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 위험한 자기기만. 이 문장들의 공통점은 불협화음이다.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것들이 한 문장에 공존한다. 그 균열이 주목을 만든다.

하지만 균열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균열이 의미 있어야 한다. 단순히 기괴하거나 자극적인 게 아니라, 세계를 다르게 보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외계인이다”는 충격적이지만 공허하다.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는 충격적이면서 윤리적 딜레마를 담는다. 전자는 호기심을 만들고, 후자는 사고를 강제한다.

“공동창업팀의 생존율이 높다”는 정확하지만 긴장이 약하다. “‘혼자여도 괜찮아’는 위험한 자기기만이다”는 통념을 뒤집으며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예상과 다른 것,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것들의 결합. 추상적 선언이 아니라 감각할 수 있는 이미지. 그리고 그 문장 너머의 더 큰 이야기. 이것들이 첫 문장을 만든다.

교도소에서 시작한 이야기

그 학생은 합격했을까. 나는 모른다. 지인도 그 뒷이야기는 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합격 여부가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교도소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첫 문장에 놓은 건 선택이었다. 그는 자신의 출발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불리할 수도 있는 조건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만들었다.

입학사정관들은 수천 명의 뛰어난 학생들을 본다. 완벽한 성적, 화려한 활동 내역, 감동적인 봉사 경험. 그 속에서 차이를 만드는 건 무엇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다.

이상은 자신을 박제된 천재로 봤다. 정유정의 화자는 자신을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으로 봤다. 교도소에서 태어난 학생은 자신을 그 문장으로 정의했다. 그들은 모두 불가능해 보이는 위치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불가능성이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첫 문장은 자기 정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나는 세계를 어떻게 읽는가. 그 정의가 명확할수록 독자는 따라온다. 안전한 정의는 기억되지 않는다. 위험을 감수한 정의만이 남는다.

교도소에서 태어난 학생의 첫 문장은 위험했다. 하지만 그 위험이 그를 다른 모든 지원자와 구분 지었다. 그가 입학했든 하지 않았든, 그 문장은 이미 성공했다. 읽는 사람을 멈추게 만들었으니까.

첫 문장은 약속이다. 이 이야기는 당신이 본 적 없는 세계를 보여줄 것이라는. 그 약속을 어떻게 할 것인가. 교도소에서 태어난 이야기로 할 것인가, 아니면 평범한 성장담으로 할 것인가. 선택은 글을 쓰는 사람의 몫이다. 그 선택이 글의 운명을 결정한다.

기자 / 제 눈에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연예인입니다. 그들의 오늘을 기록합니다. 가끔 해외 취재도 가고 서비스 리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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