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딥시크·유니트리 배출한 항저우, 10년 전부터 준비했다

딥시크 등 ‘6소룡’ 배출한 항저우 창업 생태계

2025년 1월, 설립 2년 차 스타트업 딥시크(DeepSeek)가 공개한 대규모언어모델 ‘DeepSeek-R1’은 오픈AI·구글 등 빅테크가 대규모 자본을 투입한 모델과 유사한 수준의 성능을 오픈소스로 구현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해외 언론은 이를 ‘AI 스푸트니크 쇼크’로 표현했다.

딥시크가 소재한 곳은 베이징도 선전도 아닌 항저우였다. 항저우에서는 4족 로봇 글로벌 시장 점유율 70%를 차지한 유니트리(Unitree)와 딥로보틱스(云深处)가 나왔다. 중국 최초 3A 게임 ‘검은신화:오공’을 출시한 게임사이언스(游戏科学), 웨어러블 BCI 헤드밴드 ‘Focus’를 개발한 브레인코(强脑科技), 3억 2,000만 개 이상의 3D 모델 데이터베이스로 제조업 디지털 전환 표준을 만들고 있는 매니코어(群核科技)도 항저우 기반이다.

‘6마리 작은 용(六小龙)’으로 불리는 이들의 등장으로 항저우는 베이징·선전·상하이와 함께 중국 4대 혁신 중심지로 분류됐다. 리창(李强) 총리는 “항저우 6소룡이 중국 혁신 역량을 세계에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6소룡 창업자 대부분은 1985~1990년생으로, 저장대 또는 알리바바 출신이다.

10년 축적의 결과

항저우 창업 생태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항저우시는 2010년 ‘추잉계획(雏鹰计划)’을 시작하며 기술 스타트업 지원에 나섰다. 2017년 ‘디지털경제 제1호 프로젝트’와 ‘로봇+’ 액션 플랜을 발표했고, 2025년 1월에는 연간 3,000억 위안(약 57조원) 투자 규모의 ‘AI 산업 사슬 계획’을 수립했다.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梁文鋒)의 경로가 대표적이다. 2015년 저장대 동문들과 AI 기반 헤지펀드 ‘하이플라이어(High-Flyer)’를 설립해 2021년까지 운용 자산을 10억 위안에서 100억 위안(약 19조원)으로 10배 성장시켰다. 금융 시장 변동성을 경험하며 AI 기술의 한계를 체감한 그는 2023년 5월 하이플라이어 AI 연구부서를 독립시켜 딥시크를 설립했다.

유니트리 창업자 왕싱싱(王興興)은 2015년 국제지능성창사대회에서 4족 로봇으로 2등상을 받았고, 2016년 개인투자자로부터 200만 위안 시드 투자를 유치해 2명의 팀원과 창업했다. 2022년 챗GPT 출시 후 휴머노이드로 방향을 전환해 6개월 만에 H1을 개발했다. 로이터 분석에 따르면 유니트리는 5년간 정부와 대학으로부터 90건 이상의 계약을 확보했다.

베이징·선전과의 차이

항저우의 부상은 기존 혁신 도시들과의 차별화에서 비롯됐다. 베이징은 칭화대·베이징대 중심으로 정부 주도 혁신이 강하고, 선전은 화웨이·DJI 등 하드웨어 제조 생태계가 발달했지만 대기업이 인재와 자원을 독점해 신생 스타트업 성장 기회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SCMP는 항저우가 “창업비용이 낮고 연구 환경이 탄탄해 젊은 개발자들의 실험실이 급증”하고 있으며, 선전과 달리 대기업 독점 없이 스타트업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분석했다. 저장대는 2024년 9월까지 중국 AI 스타트업에서 102명의 임원을 배출해 중국 대학 중 3위를 기록했고, 6소룡 중 3개 기업의 창업자를 배출했다.

정부-민간 자본 레버리지

항저우 생태계는 세 가지 요소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정부와 민간의 자본 결합이다. 저장성에는 중국 민간 기업 500대 중 20% 이상이 소재하고, 중국 부자 순위의 25%를 차지한다. 항저우시는 현재 연간 896억 위안(약 17조원) 규모의 혁신 프로젝트와 1,000억 위안 모펀드를 운영한다. 정부 유도 펀드는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1:7의 레버리지 효과를 만든다.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는 항저우경제개발구의 최대 1,000만 위안 초기비용과 1,000㎡ 3년 무료 임대, 멍샹샤오전(梦想小镇)의 사무실 3년 무료 사용과 최대 100만 위안 융자 등이 있다. 외국인 창업가를 위해서는 위항구 창치엔 지역에 약 2,000㎡ 규모의 국제 블록 리셉션 홀을 운영하며, 31개국 출신 외국인을 대상으로 거주 등록부터 창업 정책 컨설팅까지 통합 서비스를 제공한다.

알리바바와 개인 역량

둘째는 알리바바를 중심으로 한 생태계와 창업자의 독특한 접근이다. 알리바바는 최근 3년간 AI와 클라우드에 520억 달러(약 74조원)를 투자했다. 전 세계 30개 지역에서 일일 1조 건 이상의 AI 호출을 처리하는 클라우드 인프라는 중소 AI 기업의 기술 개발을 지원한다.

하지만 생태계가 전부는 아니다. 량원펑은 딥시크 R&D 인력 139명을 1~2년 이하 경력자 위주로 채용했다. 8년 이상 경험자는 거의 채용하지 않는다. 그는 중국 매체 36kr와의 인터뷰에서 “경험보다 열정과 능력, 새로운 아이디어가 혁신을 만든다”고 밝혔다.

왕싱싱은 유압 구동 대신 전기 모터 직접 구동 방식을 채택해 비용을 80% 절감했다. 모터·제어보드·센서를 독자 개발하며 핵심 기술을 내재화했다. 2025년 6월 기준 유니트리는 연매출 10억 위안(약 1,900억원)을 기록했고, 직원 1,000명 중 절반 이상이 R&D 인력이다.

CommonWealth는 항저우를 “알리바바의 재창조가 만들어낸 하드테크 중심지”로 평가했다. 항저우 퓨처 사이테크 시티와 빈장 하이테크 존에 6소룡이 모인 배경에는 알리바바 캠퍼스 인근 혁신 회랑의 물리적 근접성이 작용했다. 매니코어의 클라우드 플랫폼은 200개국 이상에서 사용되고 있다.

셋째는 행정 효율화다. 저장성은 ‘데이터 기반 토지 배분’, ‘클라우드 기반 평가’ 등 디지털 개혁을 통해 행정 승인 효율을 60% 높였다. 기술 혁신 실패에 대한 관용 메커니즘과 위험 분담 체계도 운영 중이다.

상업화 과제와 한국 시사점

다만 노동 환경과 상업화에 대한 과제도 있다. 항저우는 창업자에게 우호적인 지역이지만 직원에겐 가혹한 환경일 수 있다. 한때 논란이 되었던 996 문화(오전 9시-오후 9시, 주 6일 근무)는 여전히 이 도시의 일상이다.

항저우 사례가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정부 자본이 민간 자본을 7배 끌어들이는 레버리지 설계가 작동하는가. 거대 플랫폼이 중소 스타트업에 실질적 인프라를 제공하는가. 대학이 AI 스타트업 임원 100명 이상을 배출하는 산학 네트워크가 존재하는가.

항저우는 단계별(대학생-유학생-고급인재), 산업별(AI-로봇-게임-BCI), 국적별(내국인-외국인) 지원을 15년간 축적했다. 한국의 경우 개별 프로그램은 운영하고 있지만, 이를 하나의 생태계로 통합하는 물리적 거점과 데이터 기반 매칭 시스템에 대한 논의는 아직 초기 단계다.

딥시크는 기술력이 아닌 생태계 설계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 생태계는 10년 이상 축적된 정부 장기 자본, 민간 위험 감수, 거대 플랫폼 인프라, 그리고 창업자 개인의 독특한 기술 선택과 인재관이 결합될 때 작동했다.

플래텀 중국 연구소장 / 편견 없는 시각으로 중국의 정치·경제·사회 현상을 관찰하고, 객관적인 분석을 통해 현지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댓글

댓글 남기기


관련 기사

글로벌

“3개월 생존이 목표였다” 딥로보틱스, 8년 만에 산업용 로봇 1위

글로벌

중국 딥로보틱스, 1,020억원 투자 유치…구현형 AI 로봇 상용화 가속

글로벌

[중국 비즈니스 트렌드&동향] 중국 테크가 치르는 성숙의 대가

트렌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쓰는 생성형 AI는 챗GPT…2위 퍼플렉시티, 3위 에이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