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에 580개 기업이 모인 대형 언어 모델 생태계, 북두칠성이 된 청년 창업자들

왜 하필 이곳이었나
2025년 4월 29일 오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상하이 쉬후이구(徐汇区)의 한 지역을 방문했다. 그가 찾은 곳은 ‘모수공간(模速空间)’이라 불리는, 2년도 채 되지 않은 AI 스타트업 생태계였다.
나흘 전인 4월 25일,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은 ‘AI 발전과 감독 강화’를 주제로 정례 학습회의를 열었다. 시진핑은 그 자리에서 “기초이론, 핵심기술 등에서 아직 부족하다”며 “미국과의 격차를 인정하고 배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흘 뒤, 그는 직접 현장으로 왔다.
모수공간에서 시진핑은 스마트 안경을 써보고, 청년 창업자들과 대화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인공지능은 젊은 사업이자, 젊은이들의 사업입니다. 여러분에게 희망을 겁니다.”
일주일 사이 두 번의 AI 행보. 정치국 회의에서 “격차 인정”을 말하고, 현장에서 청년들에게 “희망을 건다”고 말한 것. 이 조합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중국은 AI에서 뒤처져 있다고 인정하면서, 그 돌파구를 대기업이 아닌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찾고 있다.
왜 모수공간이었을까. 그 답은 이곳이 지난 2년간 만들어온 실험 속에 있다.
숫자가 아니라 구조
모수공간은 2023년 9월 상하이시와 쉬후이구가 공동으로 만든 중국 최초의 대형 언어 모델(LLM) 전문 창업 생태계다. 이름의 ‘모수’는 ‘모델의 속도’라는 뜻으로, LLM 시대의 빠른 혁신을 상징한다.
2025년 상반기 기준, 모수공간에 입주한 기업은 100여 개. 주변으로 확산된 기업까지 합치면 쉬후이구 전체에 580개 LLM 기업이 집적되어 있다. 상하이시에서 완료된 82건의 생성형 AI 서비스 등록 중 61%가 이곳에서 나왔다.
하지만 진짜 주목해야 할 건 숫자가 아니라 구조다.
모수공간의 핵심 콘셉트는 **”위층이 곧 공급망”**이다. 같은 건물, 같은 동네에 칩 설계 회사, 모델 개발사, 데이터 처리 기업, 응용 서비스 회사가 모여 있다. LLM 개발은 알고리즘만의 싸움이 아니다. 컴퓨팅 파워, 데이터, 자금, 인재가 실시간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슬랙 메시지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모수공간은 이를 위해 5대 공공 서비스 플랫폼을 운영한다. 컴퓨팅 파워 조정, 데이터 개방, 금융 서비스, 인재 서비스, 종합 서비스. 특히 컴퓨팅 파워 플랫폼이 흥미롭다. 9개 공급업체를 통합해 5만 장 이상의 GPU 카드를 연동하고, 시-구 협동으로 조건을 충족한 초기 기업에 최대 100% 컴퓨팅 보조금을 지급한다. 스타트업이 가장 목마른 자원을 공공재처럼 유통시킨 것이다.
올해 2월에는 한 발 더 나아갔다. 모수공간은 입주 기업인 우원신충(无问芯穹), 상하이이덴과 함께 중국 최초의 ‘컴퓨팅 생태계 슈퍼마켓’을 열었다. 원하는 컴퓨팅 파워를 골라 쓸 수 있는 플랫폼이다. 서로 다른 칩 간의 호환성 문제를 소프트웨어로 해결해, A사 칩으로 훈련하다가 B사 칩으로 갈아타는 것도 가능해졌다.
시진핑이 정치국 회의에서 “고급 칩, 기초 소프트웨어 등 핵심기술을 집중 공략하라”고 주문한 지 나흘 만에 방문한 곳이 바로 이 플랫폼의 운영 현장이었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중국이 선택한 전략이 여기서 드러난다. 최고 성능의 칩 확보가 어렵다면, 있는 칩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연결하고 활용하는 방식. ‘양보다 연결’이다.
북두칠성의 얼굴들
모수공간을 이해하려면 ‘북두칠성’을 알아야 한다. 쉬후이구가 선정한 7개 AI 선도 기업으로, 우원신충, 지에위에싱천(阶跃星辰), 미니맥스(MiniMax), 상탕(商汤科技), 반마지싱(斑马智行), 싱지메이주(星纪魅族), 터잔(特赞科技)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모수공간이 어떤 생태계를 지향하는지 알 수 있다. 상탕은 컴퓨터 비전 분야의 대표 기업이고, 반마지싱은 알리바바 계열의 자동차 운영체제 회사다. 싱지메이주는 스마트폰과 AR 기기를, 터잔은 AI 기반 마케팅 콘텐츠 플랫폼을 만든다. 그중에서도 세 기업의 창업 스토리가 모수공간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우원신충: 스승과 제자, 컴퓨팅 파워의 민주화
우원신충의 창업자는 칭화대학 전자공학과 학과장 왕위(汪玉) 교수다. CEO 샤리쉐(夏立雪)는 그의 제자이자, 왕위 교수가 박사과정 지도교수가 된 후 처음 지도한 학생이다. 90년대생.
샤리쉐는 칭화대 박사 졸업 당시 알리바바의 ‘알리스타’ 오퍼를 받았다. 매년 20명 미만만 선발되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 프로그램이다. 스승의 만류에도 알리클라우드로 갔다. 거기서 클라우드 컴퓨팅 사용자 성장 제품을 0에서 1로 만들었다. 그리고 돌아왔다.
“컴퓨팅 파워를 전기처럼 쓸 수 있게 하고 싶어요. 모든 산업, 모든 가정에서요.”
샤리쉐가 말하는 비전이다. 기존에 중국 컴퓨팅 시장은 “부족과 과잉이 동시에 존재”하는 기형적 상태였다. 여기저기 흩어진 GPU들이 서로 다른 생태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우원신충은 서로 다른 칩들을 연결해 하나의 작업에 투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결과는? 천 장 규모 이종칩 혼합훈련에서 컴퓨팅 이용률 97.6%.
2023년 5월 설립, 누적 투자 유치 10억 위안(약 1,900억 원), 팀 규모 200명. 모수공간 첫 입주 기업에서 ‘컴퓨팅 생태계 슈퍼마켓’의 운영자로. 받는 쪽에서 주는 쪽으로의 전환이 24개월 만에 일어났다.
시진핑 방문 당일, 샤리쉐는 직접 국산 LLM의 다중 칩 협동 배치 기술을 시연했다.
미니맥스: 외조부의 회고록이 만든 AGI 신앙
미니맥스의 창업자 옌쥔제(闫俊杰)는 1989년 허난성의 작은 현에서 태어났다. 둥난대학 수학과를 거쳐 중국과학원 박사, 상탕 부총재까지. 700명 팀을 이끌고 안면인식 알고리즘 업계 1위를 찍었다. 그리고 2021년, 모든 걸 내려놓고 창업했다.
왜?
“외조부가 80년 인생을 회고록으로 쓰고 싶어하셨어요. 하지만 타자를 칠 줄 모르시고, 복잡한 글쓰기도 어려우셨죠. 제가 도와드릴 수 없었어요. 그때의 AI로는 불가능했으니까.”
옌쥔제가 AGI(범용 인공지능)를 믿게 된 계기다. 그는 “AGI는 일상의 일부가 되어 보통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기술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인생을 전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
기술 선택도 과감했다. 2023년 하반기, 대부분의 중국 동료들이 안정적인 밀집 모델(dense model)을 고수할 때, 옌쥔제는 거의 모든 연구 자원을 MoE(혼합전문가시스템) 모델에 쏟아부었다. “수천만, 수억 명을 서비스하려면 MoE밖에 답이 없어요. 안 그러면 비용과 지연 시간을 감당할 수 없거든요.”
결과? 2025년 7월 기준 기업가치 40억 달러(약 5.5조 원). 2025년 12월 홍콩증권거래소 상장 심사 통과. 미니맥스는 자사 모델의 핵심 역량을 오픈소스로 공개하고,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으로 API를 제공한다.
옌쥔제의 예언은 냉정하다. “앞으로 전 세계에 LLM 기업은 5개만 남을 거예요. 중국에 몇 개가 남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지에위에싱천: 16년차 마이크로소프트 부사장이 뛰쳐나온 이유
지에위에싱천의 창업자 장다신(姜大昕)은 다른 결의 인물이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16년을 일했다. 빙 검색엔진, 음성비서 코타나, 애저 클라우드, 마이크로소프트 365를 주도 개발한 글로벌 부사장. 400명 팀을 이끌었다. 스스로 “극단적 I(내향)인”이라고 부른다.
그가 자기소개 PPT에 넣은 문구가 있다. 인터넷에서 본 댓글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승승장구하다가, 왜 갑자기 창업한 거야?”
2023년 설 연휴, ChatGPT가 전 세계를 뒤흔들 때, 장다신은 결심했다. “이건 시대적 전환점이다. 대기업에서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없다.” 마이크로소프트 사옥에서 10분 거리에 사무실을 차렸다.
장다신의 기술 철학은 멀티모달 통합이다. 텍스트, 음성, 이미지, 영상이 하나로 융합되는 모델. 설립 이후 15개 멀티모달 LLM을 발표했고, 국내외 주요 평가에서 멀티모달 부문 중국 1위를 여러 차례 기록했다. 2025년 IEEE 펠로우로 선정됐다. 중국 LLM 스타트업 창업자 중 유일하다.
“우리는 처음부터 작은 회사를 하겠다고 한 적 없어요. AGI를 향해 가는 거예요.”
생태계라는 이름의 의미
모수공간이 ‘공간’이 아니라 ‘생태계’를 자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시진핑은 모수공간 방문 당일, 일정의 마지막으로 AI 제품 체험점에 들렀다. 스마트 안경, 지능형 아동 완구, 스마트 악기 등을 직접 살펴보고 착용해봤다. 정치국 회의에서 “응용을 중시하라”,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우수 제품을 개발하라”고 강조한 지 나흘 만이다. 기술이 실제 제품으로, 일상으로 연결되는 현장을 본 것이다.
모수공간 주변에는 상하이인공지능실험실, 상탕, 알리바바, 텐센트가 밀집해 있다. BMW, 폴스타, 지커 같은 자동차 기업도 있다. 유네스코 1류 센터, 중국-브릭스 인공지능 발전협력센터 같은 국제 플랫폼도 들어와 있다.
눈여겨볼 건 순환 구조다. 우원신충처럼 처음엔 모수공간의 지원을 받던 기업이, 성장한 뒤 다른 스타트업에 컴퓨팅 인프라를 제공한다. 미니맥스는 자사 모델을 저렴한 API로 열어 후발 주자들의 개발 비용을 낮춘다. 받는 쪽에서 주는 쪽으로. 이 흐름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클러스터는 그냥 ‘같은 건물’에 불과하다.
상하이는 이 실험을 도시 전체로 확장하고 있다. 서쪽 쉬후이구에 모수공간, 동쪽 푸둥에 ‘모리사구(模力社区)’를 배치해 양날개 구도를 만들었다. 2024년 상하이 AI 산업 규모는 4,500억 위안(약 85조 원)을 넘어섰다.
한국에 던지는 질문
모수공간의 실험이 성공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른다. 중국 정부의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 대규모 보조금, 빠른 의사결정이 뒷받침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대로 복제할 수도 없고, 복제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질문은 던져볼 만하다. 한국 AI 스타트업은 네이버클라우드, KT, SKT의 GPU 클러스터에 얼마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가? 성장한 AI 기업이 후발 주자에게 인프라와 역량을 환원하도록 하는 유인 구조가 있는가?
시진핑은 정치국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잡으면 기회가 되고, 놓치면 도전이 된다.”
황푸강변의 이 실험이 어디까지 갈지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중국이 AI의 미래를 베이징의 대기업이 아니라 상하이의 청년 창업자들에게 걸었다는 사실이다. “격차를 인정하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건다”고 말한 것.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우리도 지켜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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