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글로벌

벽란도에서 상하이까지 – 한중 협력의 문법이 바뀌고 있다

고려지에서 AI로

이재명 대통령이 베이징 조어대(釣魚台) 국빈관에서 열린 한중 비즈니스 포럼 연설에서 꺼낸 첫 번째 키워드는 ‘벽란도(碧瀾渡)’였다. 900여 년 전 고려와 송나라의 교역 거점. 그는 당시 고려가 수출한 ‘고려지(高麗紙)’를 “지식과 문화를 생산하는 데 필수적인 핵심 소재이자 전략 교역 품목”이라 불렀다.

은유가 정교했다. 과거에는 한국이 핵심 소재를 제공하는 쪽이었다면, 지금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그는 직접 말하지 않았다. 대신 “제조업이라는 단단한 고려지 위에 서비스와 콘텐츠라는 색채와 서사를 담아 새로운 가치를 함께 써 내려가자”고 했다. 함께. 그 단어에 방점이 찍혔다.

중국 측은 이 메시지를 놓치지 않았다.

중국이 듣고 싶었던 말

펑파이(澎湃新闻)는 잔더빈 상하이국제경제무역대학 한반도연구센터 소장의 분석을 실었다. 그의 진단은 명확했다. “현재 한중 산업 상호보완성은 더 이상 ‘산업 간 상호보완성’이 아니라 ‘산업 내 상호보완성’으로 발전했다.” 자동차 산업을 예로 들었다. 과거처럼 한국이 완성차를 팔고 중국이 시장을 제공하는 구조가 아니라, 신에너지차 분야에서 양국이 각자의 강점을 가지고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덧붙였다. “중국을 소비시장으로만 보고 완성차 판매에만 집중하는 낡은 생각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소후(搜狐)의 논평은 더 직설적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언급한 “수평 합작(水平合作)”, “평등 협작(平等協作)”이라는 여덟 글자가 온화하게 들리지만, 그 이면에는 심리적 조정이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이 더 이상 한중 경제무역 관계를 일방적 기술 수출로 보지 않고, 양국이 여러 핵심 분야에서 동일한 기술 평면에 있으며 심지어 일부 방향에서는 중국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신화사는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인용해 “한중 경제무역 관계가 과거 수직적 구조의 협력에서 점차 수평적 구조의 협력과 평등한 협력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청와대 브리핑에서도 “수평 호혜적인 경제 협력 관계”라는 표현이 명시적으로 등장했다. 양국이 같은 언어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두 개의 포럼, 두 개의 시간대

이번 방중에는 성격이 다른 두 개의 경제 행사가 있었다.

5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비즈니스 포럼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참석했다. 중국 측에서는 시진핑의 40년 지기이자 경제 일인자로 불리는 허리펑 국무원 부총리가 나왔다. 9년 만에 열린 한중 비즈니스 포럼에서 32건의 MOU가 체결됐고, 논의 주제는 반도체 공급망, 배터리, 전기차 등 ‘현재 진행 중인’ 산업 협력이었다.

7일 상하이에서 열린 한·중 벤처스타트업 서밋은 결이 달랐다. ‘한·중 창업생태계, 연결을 넘어 공동 성장으로’를 주제로 양국 정부 고위급 인사와 유망 창업기업, 벤처캐피탈 관계자 약 400명이 모였다. 대기업 총수 대신 유니콘 창업자들이 무대에 올랐다. 논의 주제는 AI, 로봇, 바이오 등 ‘아직 승자가 정해지지 않은’ 미래 산업이었다.

이 대통령은 스타트업 서밋 모두 발언에서 “혁신은 어느 한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며 조선 실학자 박제가를 소환했다. “박제가 선생이 청나라 유수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동아시아 근대 기술을 발전시켰듯이, 한국의 벤처스타트업 생태계가 중국의 거대한 혁신 창업 환경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면 양국은 더 새롭고 더 큰 성장의 해법을 마주할 것”이라고 했다.

그가 전날 비즈니스 포럼에서 900년 전 고려-송나라 교역을 언급했다면, 스타트업 서밋에서는 200여 년 전 조선-청나라의 학술 교류를 끌어왔다. 두 은유의 공통점이 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배우는 관계였다는 것.

미니맥스와 루닛이 나란히 앉은 이유

스타트업 서밋 참석 기업 명단이 흥미롭다. 중국 측에서는 중국 신흥 AI 4대 기업 중 하나인 미니맥스(MiniMax)의 옌쥔제 대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분야 선두주자 브레인코의 한비청 대표, 초상은행국제(CMBI)의 훠젠쥔 대표가 나왔다. 한국 측에서는 AI 기반 의료영상 분석 기업 루닛의 서범석 대표, 중국에 진출한 시엔에스의 안중현 대표, 마음AI의 최홍석 대표가 참석했다.

미니맥스는 하일루오(Hailuo) 영상 생성 모델로 최근 글로벌 주목을 받고 있다. 100만 토큰 컨텍스트를 지원하는 MiniMax-M1 모델을 내놓으며 OpenAI, Anthropic과 경쟁하는 중국 AI의 최전선에 있다. 브레인코는 뇌파로 의수를 제어하는 기술을 상용화한 기업이다. 루닛은 AI 기반 암 진단 솔루션으로 미국 FDA 승인을 받은 기업이다.

왜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을까.

잔더빈 소장이 말한 ‘산업 내 상호보완성’은 스타트업 생태계에도 적용된다. 같은 AI 산업 내에서 중국은 범용 AI 모델, 거대한 데이터셋, 빠른 상용화 속도를 갖고 있다. 한국은 의료, 바이오 등 특정 버티컬에서의 전문성과 글로벌 규제 대응 경험을 갖고 있다. 미니맥스와 루닛은 경쟁자가 아니라 서로 다른 레이어에서 움직이는 플레이어다.

청와대 브리핑에 따르면, 옌쥔제 대표는 “혁신적 기술의 중요성과 양국 기업 간의 협력 필요성”을 강조했고, CMBI의 훠젠쥔 대표는 “중국 글로벌펀드를 통한 벤처투자 분야에서의 한중 협력 계획”을 밝혔다. 기술 협력뿐 아니라 자본의 연결까지 논의된 것이다.

한국 내부의 자기 인식

중국 매체들이 주목한 또 하나의 포인트가 있다. 한국 내부에서 이미 진행 중인 자기 인식의 변화다.

신랑(新浪)은 지난해 12월 한국산업경제무역연구원이 개최한 포럼을 소개했다. “한국 산업의 대중 전략 전환과 협력의 새 방향”이라는 제목의 이 행사에서 한국 전문가들은 철강, 석유화학, 조선 등 전통 중공업은 물론 자율주행차, 배터리, AI, 로봇, 재생에너지 등 미래 산업에서도 중국이 한국을 전면 추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글로벌연구원장 홍창표의 발언이 인용됐다. “2015년 한중 FTA 협상 당시 한국 전자기술 기업들은 ‘한국과 중국 사이에 거대한 격차가 있다, 전혀 문제 될 것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중국의 진짜 무서운 점은 완전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가치사슬을 내재화한 것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현재 위치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 정부 산하 연구기관의 데이터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과학기술평가원(KISTEP)이 2024년 발표한 ‘2022년도 기술수준평가’ 결과에 따르면, 반도체 기술의 주요 분야에서 중국이 한국을 추월했다. 세계 최고 기술 수준을 100%로 놓았을 때, 고집적·저저항 메모리칩 분야에서 한국은 90.9%, 중국은 94.1%였다.

같은 평면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비즈니스 포럼 연설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좋은 이웃은 천만금을 주고서라도 얻을 수 없을 만큼 귀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중국 매체들은 이 표현을 “良邻千金难买”로 번역해 집중 보도했다. 텐센트뉴스는 이번 방중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했다. “한중 관계를 ‘먼저 장사하고, 분쟁은 나중에’ 궤도로 되돌리겠다는 신호다.”

중국이 한국에게 요청하는 것은 결국 하나다. 더 이상 ‘기술을 주는 쪽’이라는 오래된 자기 인식에 머물지 말라는 것. 양국이 같은 평면에서 경쟁하고 협력하는 새로운 문법을 받아들이라는 것.

한중 경제 관계의 문법은 이미 바뀌기 시작했다. 다만 그 변화는 서서히 진행됐기에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2015년 “전혀 문제 될 것 없다”던 한국 기업들이, 2024년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기까지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상하이 스타트업 서밋에 미니맥스와 루닛이 나란히 앉은 장면은 그 변화가 ‘갑자기’ 가시화되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벽란도에서 상하이까지, 900년의 시간을 건너 한중 협력의 새 문법이 쓰이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현장 중심으로 취재하며, 최신 창업 트렌드와 기술 혁신의 흐름을 분석해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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