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퀄컴’은 어떻게 이동통신 표준전쟁에서 승자가 되었나.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현존하는 모든 대기업의 시작은 스타트업이었다. 개중에는 배경과 출신등 출발지점이 다른 경우도 있겠지만 영향력있는 거대기업은 전세대 유산만으로 이룩하는 것은 어렵다. 각설하고.
미국의 다국적 반도체 및 통신 장비 기업 퀄컴 역시 엔지니어 7명이 모여 시작한 단출한 스타트업이었다. 그리고 이 기업은 31년이 지난 현재 이동통신 업계의 가장 큰 성공신화로 회자된다.
퀄컴은 1985년 7월 어윈 M. 제이콥스(전 회장)의 집에 모인 6명이 ‘품질이 좋은 통신을 만들어보자’라는 모토로 시작했다. 그래서 회사이름도 퀄리티 커뮤니케이션(QULity COMMunication)의 앞자를 따서 ‘Qualcomm’이다. 1년후인 1986년에 첫 CDMA 상용 특허를 출원한 퀄컴은 이것을 시작으로 신기술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나간다.
퀄컴이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까지 십수 년 간의 고단한 과정이 있었다. 특히 90년대 미국과 유럽 등에서 기술 표준을 선점한 TDMA(시분할 다중접속) 진영과 이동통신 기술규격 전쟁을 10여년 간 펼쳤다. 결국 퀄컴이 중심이 된 CDMA측이 승리하게 되고, CDMA 상용화 기술을 개발한 작은 벤처회사 퀄컴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한다. 오늘날 퀄컴의 한 해 매출액은 한화 30조원 규모다. 전세계에서 사용되는 대다수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과 애플 아이폰에 퀄컴의 반도체가 고유명사처럼 탑재되고 있는 상황이다.
앞서말했듯이 지금은 글로벌 기업이지만 31년 전 퀄컴은 그저 기술력 좋은 엔지니어 밖에 없던 스타트업이었다. 이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 성장했을까?
2일 스타트업 글로벌 협력 포럼에서 박문서 한국퀄컴 고문이 퀄컴이 스타트업이던 시절 성장과정을 이야기 했다.
박문서 한국퀄컴 고문
2000년 1월 퀄컴 본사에 출장을 가서 제이콥스 회장을 만날 일이 있다. 그때 제이콥스 회장 방문에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다(we make imposible posible)”라는 문구가 붙어있는게 보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멋있는 문구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 문구가 퀄컴의 기업정신과 퀄컴의 역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세대 이동통신으로 넘어가던 시절 캘리포니아 구석에서 시작한 7인기업
이동통신 1세대였던 1980년 대에는 아날로그 라디오 방식으로 통신을 했었다. 성능이 좋지 않은 반면에 단말기와 서비스 가격은 매우 비쌌다. 또 당시에는 기술표준이 없었기에 같은 도시에 있어도 통신사가 다르면 전화 통화가 잘 안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불편한 상황임에도 이동통신 가입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 1980년 대 말에는 업계가 새로운 기술로 진화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통사들은 차세대 이동통신 기술로 FDMA(주파수 분할 다중 접속), TDMA 두 가지 방식을 검토하고 있었다. 당시 CDMA 기술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CDMA는 이론적으로는 좋은데 상용화가 불가능한 기술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0년 대 말 미국과 유럽은 TDMA 기술을 업계 표준으로 선정한다. 이는 업계에서 모든 제품과 서비스를 그 기준에 맞춰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사실 당시 미국 업계에서는 TDMA를 만족스러럽게 보지는 않았다. 일단 TDMA는 성능이 뛰어나지 않았다. 시간과 돈을 들여 망인프라를 구축해야 하는데 소모되는 비용에 비해 기술적 성능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업계에서 TDMA외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그때 캘리포니아 남쪽 구석에서 7명의 엔지니어가 설립한 작은 스타트업 퀄컴이 CDMA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TDMA가 1세대 기술에 비해 3배정도 더 나아지는 수준이라면 퀄컴이 개발한 CDMA 기술은 10~20배 더 좋다고 말하며 주목을 받았다. TDMA에 만족하지 않았던 미국의 이통사들이 퀄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고 덕분에 퀄컴은 1989년 4월 자사의 CDMA 연구결과를 이동통신 업계에 발표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당시 발표현장에는 업계 전문가들로 꽉 차 있었다. 제이콥스는 청중석에 앉은 전문가들이 퀄컴의 CDMA 기술에 반론 혹은 문제점을 이야기할까봐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다행히도 어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CDMA 기술을 채택해야 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한다. 전문가들은 “퀄컴의 CDMA 기술이 그렇게 좋으면 미국 이동통신 표준으로 미국 통신산업협회(TIA, Telecommunications Industry Association))에 제안을 해라”라고만 했다. 제이콥스는 업계 전문가들의 마음을 바꾸려면 기술 이론만 가지고는 어렵고, 그들이 직접 사용해 봐야 믿을거라 판단해 기술 시연을 준비한다.
악조건 속의 기술시연. 그리고 미국 이동통신 두 번째 표준이 되기까지.
7개월 후 퀄컴은 1989년 11월에 샌디에고에서 130명의 업계 전문가를 모아놓고 CDMA 기술시연을 한다. 퀄컴은 기술시연을 위해 CDMA 기지국을 만들고 첫 CDMA 핸드폰 ‘알파원’을 두 대 만든다. 한 대를 자동차에 놓고 기지국을 오가며 통화체험을 시켜준 것이다. 기술시연은 성공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이 CDMA를 쉽게 받아들이지않았다. 지역이 문제였다. 샌디에고는 그당시 시골이었다. 큰 빌딩도 없기에 통신 장애물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다수의 전문가가 ‘CDMA가 샌디에고 같은 곳에서는 잘 될지 모르지만, 뉴욕같은 빌딩 정글과 수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장소에서는 안 될 것’이라 말했다. 그래서 1990년 퀄컴은 뉴욕에서 2차 기술 시연을 펼치고 이 역시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두 번의 기술 시연 성공을 한 퀄컴은 자신감을 가지고 TIA에 TDMA에 이은 두 번째 기술표준으로 CDMA를 제안한다. 그런데 TDMA 진영이 장악한 TIA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 퀄컴의 기술 시연은 CDMA가 유리한 환경에서 했기에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신에 같은시간, 같은 환경에서 TDMA와 비교테스트를 하자는 역제안이 들어온다. 그래서 1991년 달라스에서 두 기술의 비교시연이 진행된다. 결과는 CDMA의 우세였다. 퀄컴은 이에 자신감을 갖고 TIA에 다시 표준 제안을 하고 TIA는 별수없이 접수를 받는다. 1년 이상 표준 채택을 주저하던 TIA는 1993년에서야 퀄컴의 CDMA를 미국의 이동통신 기술 표준으로 인정한다. 이때부터 미국의 기술표준은 TDMA와 CDMA 양대 기술 체제로 가게된다.
더 힘든 싸움의 시작
앞선 싸움이 전초전이었다면 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은 CDMA가 두 번째 표준이 된 이후부터였다. 당시 시장에서는 많은 회사들이 TDMA기술을 활용해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TDMA 망인프라를 깔아놓은 다음이었기에 그것을 걷어내고 새로 CDMA 망을 구축하는 것은 기업들에게 부담이기도 했다. 또 CDMA는 표준은 됐지만 여전히 많은 이슈가 있었다. 당시 TDMA시장은 점점 커가는 중이었고, 이에 맞춰 다수의 제조사들이 TDMA기반 장비와 단말기를 만들고 있었다. 반면에 CDMA 장비와 핸드폰을 만드는 업체는 한 곳도 없었다. 이통사가 CDMA서비스를 시작한다 해도 그것을 받아줄 휴대폰이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TDMA기술은 더 확산되었고 퀄컴은 초조해진다. 시간이 더 흐르면 기술의 좋고 나쁨을 떠나 상품화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퀄컴은 중대한 결정을 한다. 스스로 휴대폰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상적인 결정은 아니다. 퀄컴은 제조사도 아니고 제조 경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퀄컴은 CDMA폰과 CDMA장비를 만들기 시작한다. 아무도 안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머니에 들어가는 휴대폰을 만들려면 큰 부품을 작은 반도체 안에 넣어야 한다. 그런데 CDMA반도체를 만들려는 회사는 아무데도 없어서 퀄컴이 이것도 직접 만들기로 결정한다. 당시 퀄컴에는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전무했다. 그래서 퀄컴 엔지니어들은 MIT등에 가서 반도체에 대해 배우면서 동시에 반도체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한다. 초기 CDMA 장비와 단말기는 소니 등에서 기술이전을 받아 만들어 낸다. 퀄컴은 그렇게 만든 장비와 단말기를 CDMA 서비스를 하고 싶어하는 회사들에 공급한다. 그렇게 CDMA서비스가 시작하게 된 것이다. 어느정도 시장이 형성되자 그 뒤부터 삼성과 LG등 다른 업체들도 폰과 장비를 만들면서 시장이 커지게 된다.
빨리 더 많이 … 퀄컴의 전략
8~90년대 이동통신 규격 전쟁이 있었다면 70년대에는 비디오테이프 규격싸움이 치열했다. 소니의 베타멕스(Betamax)와 마쓰시타의 VHS 간 싸움이었고, 승자는 VHS였다. VHS가 이긴 이유는 빠른속도로 특허를 내고 관련 제품의 숫자를 통해 시장을 장악해 압도한 것이다. 제이콥스도 같은 생각을 했다. CDMA를 빠른속도로 전세계에서 서비스해야 TDMA와의 싸움에서 이길거라 본 것이다. 그래서 퀄컴은 미국에서 표준이 된 이후 전세계를 돌며 프로모션을 실시한다.
퀄컴의 첫 타겟국가는 중국, 홍콩, 한국이었다. 퀄컴은 일본이 TDMA를 국가 표준으로 선택한 것을 가리키며 더 이상 일본을 쫓아가는 전략을 취해서는 안 된다 말했다. CDMA가 더 좋은 기술이고, 이동통신에 있어서만큼은 일본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한국 기업을 설득했다. 그결과 한국은 가장 먼저 CDMA를 론칭하는 국가가 된다. 1996년에는 한국을 비롯해 홍콩, 페루, 미국에서 CDMA 이통통신이 론칭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이동통신업계에서는 여전히 CDMA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계속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 1996년 9월 기사를 보면 스텐포드 대학 교수의 말을 인용해 ‘퀄컴의 CDMA 주장을 믿으면 이동통신 업계는 수십 조 원의 손해를 볼 수 있다’라고 보도했었다.
하지만 2000년 대 중반에 이르러 CDMA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이동통신 표준이 된다. 한국에서는 4세대(4G) 이동통신이 대중화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는 CDMA 방식으로 통신을 하고 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이것이 제이콥스 전 회장의 방문에 붙어있던 ‘we make imposible posible’의 배경이다. 퀄컴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작은 스타트업이 전세계 전문가들의 불가능하다는 기술을 가지고 생사를 건 모험을 통해 이뤄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