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전에 들었고, 백 년 후에도 들을 음악 DB 만든다.” 무료 클래식 스트리밍 서비스, ‘클래식매니저’
스무 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한 정연승 대표는 음악이 인생의 전부였다. 6년간 러시아에서 클래식 음악 공부를 하고 한국에 돌아와 작곡병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나니 그의 나이 서른 살. 주변 친구들이 “음악 해서 뭐 먹고 살지?”라며 고민할 땐 그리 와닿지 않던 고민이 어느덧 그에게도 찾아왔다.
엔터테인먼트사, 인디 레이블사에서 작곡을 하면서 그는 화려한 무대 뒤 음악가들의 척박한 현실을 마주했다. 학원 출강 부업이 필수이던 그들의 빠듯한 일상에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결국 어느 날 그는 음반 작업할 스튜디오를 빌릴 돈이 없어 부모님께 손을 내밀다가 문득 ‘나름 열심히 음악만 했는데, 이렇게 경제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는 건가?’라고 되뇌게 되었다.
좌절감에 휩싸인 바로 그때였다. 이때까지 ‘열심히 살았던’ 경험들이 선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박사 과정 중 연구하던 ‘자동 작곡에 대한 알고리즘’ 개발 기획안을 들고 한 스타트업을 찾아갔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펼쳐졌다. 그리고 군 생활 시절 도맡아 처리했던 문서 작업 경험은, 스타트업에서 정부 연구 과제들을 수주하는 실력으로 이어졌다.
Artists’ Card, Inc. 정연승 대표(34)
Q. 작곡만 하던 사람이 ‘회사 일’을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니 다소 의외다.
■ 예술가에서 사업가로 거듭나게 한 스타트업 합류
‘제이디사운드‘라는 스타트업에 합류하여 정부 연구 과제들도 수주 및 수행하고 소프트웨어 개발도 하면서 PM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다. 나도 내가 그렇게 일을 잘할 줄 몰랐다. 음악가로 활동할 때는 1년간 고생해서 낸 앨범이, 많이 팔렸음에도 불구하고 빚만 생겨 허무했는데, 회사에서는 열심히만 해도 즉각적으로 인정받아서 상대적으로 예술활동에 비해 ‘일’이란 게 쉽게 느껴졌다.
경제적 구조에 대해 전혀 모르던 내가 스타트업의 모든 프로세스를 경험해보면서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떤 곳에서 투자를 받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1년 반 동안 거의 매일 야근하면서, 음악만 했던 사람이 완전히 ‘비즈니스맨’으로 다시 태어났다. 진정으로 회사를 위해 일하다보니 오너 마인드도 생겼다.
Q. 그러고 나서 창업을 결심했나.
■ 3년 전의 나를 떠올려.. 음악에서부터 출발하는 게 맞다고 생각
그쯤 되니 창업을 해야겠다는 꿈이 생겼다. 그리고 기왕 창업하려면 음악하는 사람들을 살리는 아이템으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3년 전의 나, 정연승 같은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줄 순 없겠지만, 정직하게 돌아가는 괜찮은 음악 판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회사명을 ‘아티스츠 카드(Artists’ Card)’라고 지었다. ‘예술가의 명함’, 참고로 예술가는 ‘명함’이 없다. 그들의 작품과 연주가 명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는 그 명함을 보여줄 수 있는 판조차도 거의 없다. 그래서 정보기술로 예술 시장을 성장시키자는 비전을 갖고 출발했다.
주변에서는 말렸다. 시장이 작고 어렵다고 했다. 내가 다니던 스타트업에서도 “음악 시장은 정말 힘들다. 다른 아이템으로 사업한다면 보내주겠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먼저 이곳에서부터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음악을 했었기 때문에 음악에 대해 잘 아는 내가 음악 시장에서조차도 어떤 성과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Q. 어떤 서비스를 만들었는지 소개해달라.
■ 무료 클래식 스트리밍 서비스
‘클래식매니저(Classic Manager)‘는 고음질 클래식 스트리밍 서비스이다. 음반정보 입력 시 저작권과 저작인접권 만료 여부를 자동으로 걸러주는 시스템을 특허 출원하여 사람들이 저작권이 만료된 클래식을 무료로 들을 수 있게 했다. 사용자는 회원 가입 없이도 음악을 감상할 수 있고, 가입 후에는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와 라디오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11월 베타 서비스 출시 후 별다른 마케팅 없이 국내에서만 현재 1일 활성 사용자 수가 1,000여 명, 평균 체류 시간은 약 25분을 기록하고 있다.
Q. 사람들이 흔히 어렵다 말하는 시장에 도전하면서 어떤 전략을 세웠나.
■ “무료는 무료로 들어야 하고, 유료는 유료로 들어야 한다.”
보수적인 음악 시장 중에서도 클래식 음악은 훨씬 더 보수적인 시장이다. 기존 시장에서 음악가들의 대표적인 수익 모델은 공연과 레슨이다. 처음에는 연간 2조 원에 달하는 레슨 시장으로 바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도저히 보수적인 기존 시장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음악 시장을 혁신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멜론‘은 TV가 갖고 있던 음악 미디어 권력을 가져왔다. 아티스트들이 제일 소망하는 건 이제 TV 음악프로그램 1위가 아니라 멜론 챠트 1위이다. 멜론이 작은 내수시장에서 10년째 적자를 기록하다가 흑자로 전환하였는데, 많은 사용자를 모을 수 있었던 성공의 원동력 첫 번째가 바로 디지털 콘텐츠였다. 멜론에서 음악 듣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멜론 메인화면에 어떤 신보가 걸리느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콘텐츠를 장악한 후에는 유통 사업으로 확장했다. 이후 매니지먼트로 확장하면서 ‘아이유’ 같은 가수를 키우기 시작했고, 현재는 공연 사업까지 하고 있다. 반면 무료 스트리밍 음악 앱 ‘비트’는 서비스를 접었다. 정말 훌륭한 팀이었고 앱도 잘 만들었지만 결국 연간 140억 원에 달하는 저작권료를 감당하지 못했다.
무료는 무료로 들어야 하고, 유료는 유료로 들어야 한다는 게 내가 얻은 결론이다. 유료를 무료로 듣도록 한 건 ‘음악은 공짜’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그로 인해 음악 하는 사람들을 더 힘들게 했다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무료를 유료로 듣게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퍼블릭 도메인’, 다시 말해 저작권이 소멸한 곡을 현재 돈을 받고 서비스하고 있는 것은 문제이다.
나는 음반 활동을 통해 음악 저작권을 경험하면서 국내외 법상 퍼블릭 도메인에 해당되는 클래식 곡들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또한, 현재 클래식 음악을 디지털로 듣고 있지 않은 ‘숨은 고객’이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국내 음악의 5%를 차지하는 클래식 음악 시장을 검증하면 이를 바탕으로 궁극적 목표인 글로벌로 갈 수 있다고 보았다.
전 세계적으로 ‘클래식’ 하면 동영상 분야에서는 ‘유튜브‘, 악보 분야에서는 ‘IMSLP‘가 사람들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 현재 음원 분야는 마땅히 떠오르는 곳이 없다. 우리가 이 음원 분야를 선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Q. 클래식 시장이 가능성 있다 판단한 배경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달라.
■ 100년 전에도 들었고, 100년 후에도 들을 음악
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40년 전에 락에 열광했다. 20년 전에는 세계적으로 힙합이 인기였으며, 요즘에는 EDM 음악이 최고이다. 그렇다면 100년 후에는 무엇을 듣고 있을까? 알 수 없다.
클래식은 아이템의 영속성 측면에서 강점이 있다. 100년 전에도 들었고, 100년 후에도 들을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콘텐츠는 사람들이 10년 후, 100년 후에도 들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한 번만 DB를 잘 구축해놓으면 평생 갈 수 있다고 본다. 더군다나 광고, 콘텐츠 판매 등 도입할 수 있는 수익모델로 버틸 수 있으면서도 저작권료로 나가는 비용은 거의 없다는 장점도 있다.
Q. 앞으로의 계획 및 목표가 있다면.
■ ‘클래식’ 하면 사람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회사
내년 2월 전까지 모바일 앱을 출시하고 마케팅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일 계획이다. 사용자가 어느 정도 모인 후에는, 클래식 앨범을 내기 어려운 아티스트를 위해 우리가 어느 정도 앨범 제작을 돕고 그 콘텐츠를 클래식매니저에 오픈 라이센스인 CCL(Creative Commons License) 방식을 통해 상위 노출함으로써 신진 아티스트의 명성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싶다.
2년 안에 ‘클래식’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회사가 되는 게 목표이다. 그때가 되면 연계 시장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1등인 서비스, 연계 시장을 구축한 서비스가 되더라도 나는 이를 베타 서비스라고 간주하려고 한다. 글로벌로 가는 게 정식 서비스이다.
콘텐츠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에게 수익이 돌아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시장이 작든 크든지 간에 예술 사업을 하려면 예술가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시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
Q. 끝으로 하고픈 말
■ 50년간 혁신이란 게 없던 이 판을 바꿔보고파
내 개인적인 목표는 연쇄 창업가이다. 음악가로 살아왔기에 제일 자신 있고, 제일 살리고 싶고, 제일 혁신하고 싶었던 게 클래식 음악이었다. 대개 클래식에 관심 있는 사람은 IT에 관심 없고, IT에 관심 있는 사람은 클래식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50년 동안 전혀 혁신이 일어나지 않은 시장이 바로 클래식 음악 시장이다. 이 판을 한 번 바꿔보는 게 꿈이라서 일단 시작했다. 만약 나보다 더 뛰어난 분들이 클래식 시장을 바꾸기 위해 시장에 뛰어든다면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만드는 게 좋다. 내 이름으로 새로운 걸 많이 만들어놓고 싶다. 그 ‘무언가’가 예전에는 음악이었고, 지금은 서비스인 셈이다. 만들어야겠다 싶으면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만든 것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기 전까지는 접지 않을 생각이다.
원문 : [찾아가는 인터뷰 94] “백 년 전에 들었고, 백 년 후에도 들을 음악 DB 만든다.” 무료 클래식 스트리밍 서비스, ‘클래식매니저’
안경은 앱센터 외부필진 /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즐깁니다. 글로 정리해 사람들과 공유할 때 신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