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인터뷰

비야디 왕촨푸는 어떻게 중국 최대 부자가 되었나.

글로벌1위 전기차업체는 중국 광동성 심천을 기반으로 한 비야디(BYD, 比亞迪)다. 테슬라의 형식 파격에는 미치지 못 하겠지만, 비야디는 중국에서 혁신 기업의 대표적 사례로 회자된다. 아울러 경제 성장이 둔화된 현 상황에서도 신재생에너지 기업으로 몸집을 키우는 회사이기도 하다.

1995년 2월 설립된 비야디는 배터리 제조 기업으로 세계 선두 자리에 까지 올라선 뒤, 2003년 자동차 시장에 뛰어들어 중국 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에 자동차 메이커로 이름을 알린다. 더불어 삼성과 모토로라, 레노버, HTC, LG 등 기업의 주요파트너로 ODM 공급을 하는 한편, 친환경 뉴에너지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세계 정상권 기업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20여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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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조업의 혁신이라  불리우는 비야디의 중심에는 왕촨푸 회장이 있다. 

보다 나은 배터리를 꿈꾸던 청년.

비야디의 창업자 왕촨푸(王传福, 52) 회장의 사회 초년은 특별한 것이 없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공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21세 때 베이징에 위치한 배터리 연구소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왕촨푸는 그저 효율이 좋은 배터리를 만들고 싶어하는 기술이 좋은 연구인력에 불과했다.

27세 때 왕촨푸는 연구소가 자회사 격으로 설립한 배터리 회사(비거比格 배터리)에 대표로 취임하며 전문 경영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재직당시 왕촨푸는 일본기업이 포기한 니켈 카드뮴 배터리 제조에서 틈새 시장을 포착한다. 다만 그가 몸담고 있는 연구소는 그의 바람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 되지는 못 했다. 이에 왕촨푸는 29세 때인 1995년 안정적인 직장을 뒤로하고 창업자의 길로 들어선다. 비야디가 세상에 등장한 것이다. 비야디는 심천 국경 근처에서 휴대폰과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배터리 제조회사로 첫 발을 내딛는다.

비야디는 중국 기업에는 흔치않은 영문 이니셜 사명이다. 공식적으로는 중국 사명 比亞迪의 이니셜, ‘Build Your Dreams’의 약자라 말하지만, 이 기업이 시작할 당시에는 없던 해석이다. 왕첸푸는 사업 초중기 기업명의 의미를 ‘bring you dollars‘ 라며 농담으로 설명을 하기도 한다.

36세 ‘배터리 왕’으로 불리우다. 

90년대 배터리 시장은 일본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배터리 기업은 외주형태의 조립일을 하고 있었다. 왕촨푸는 기회를 잡기위해 창업자로 나섰지만, 그것을 구현할 자금이 부족했다. 게다가 일본 기업은 사양산업이라도 배터리 부분에 대해서 정책적으로 설비나 기술 이전을 꺼려하고 있었다.

이에앞서 배터리를 생산하려면 수천 만 위안에 달하는 설비를 구축해야 했지만, 왕촨푸의 손에 있는 자금은 부동산업을 하던 사촌으로 부터 빌린 250만 위안이 전부였다. 환경을 바꿀수 없었기에 왕촨푸는 그 환경에 적응하는 한편 스스로 움직이기로 한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구하러 다니기 보다 가지고 있는 자원 중 우세한 것을 모아 목적을 달성하는 길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왕촨푸는 개발자들과 직접 배터리 핵심 설비를 고안해 만들어 냈고, 나머지 부분은 사람의 손으로 만드는 공정을 도입한다. 저렴하게 가용할 수 있는 인적자본을 바탕으로 한 조립 시스템이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수천 만 위안이 들어야 하는 설비를 100만 위안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관건은 사람 손이 들어가는 공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량률이었다. 왕촨푸는 이를 교육과 별도로 개발한 작업 도구로 극복한다.

비야디는 완촨푸를 비롯한 연구진이 쌓아온 배터리 기술을 바탕으로 효율은 높지만 가격이 저렴한 제품을 통해 중저가 시장에서 저변을 넓혀간다. 소니와 산요 폭스콘 등에서 특허권 침해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야디는 2000년 이후 R&D에 투자해 7년 간의 우여곡절 끝에 배터리 분야 세계 1,2위를 타투는 기업이 된다. 비야디는 창립 이후 매년 100% 이상의 성장률을 달성하고, 니켈카드뮴 배터리는 3년 만에 세계 시장 점유율 40%를 차지한다. 2002년에는 홍콩 증시에 상장하기도 했다. 이때 왕촨푸에게 붙은 별명은 ‘배터리 왕’이었다. 그의 나이 36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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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촨푸 회장과 워렌버핏

워렌 버핏이 투자한 회사

비야디가 세계에서 주목을 받았던 것은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이 투자를 단행하면서 부터다. 2008년 9월 워런 버핏은 미드아메리칸에너지를 통해 비야디의 지분 9.9%를 2510억 원에 매입한다. 화제를 몰고다니는 버핏의 투자였기에 당시 비야디의 주가는 10배 가까이 상승했고, 단숨에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는 기업이 되었다. 하지만 비야디가 몇해 적자를 기록하고 아래 설명할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며 매해 큰 폭의 적자를 기록하자 잘못된 투자이자 실수라는 혹평을 들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핏은 비야디의 경영에는 일체 관여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중국의 전기차 시장이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하면서 비야디는 급성장을 하게 되면서 결국 퍼빗의 선택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배터리왕에 이어 자동차 왕을 꿈꾸다. 

기업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왕촨푸는 다음 사업 목표를 자동차 산업에서 찾는다. 비야디는 2003년 국영기업인 친촨 자동차를 2.7억 위안을 들여 인수해 자동차 분야로 사업을 확장한다. 투자자와 주주 거의 대부분이 반대했던 결정이었다. 이러한 여론은 증시에도 반영되었다. 비야디가 친촨자동차를 인수한 뒤 회사 주가는 무려 21%나 급락했다. 하지만 왕촨푸는 뜻을 꺽지 않았다. 배터리 왕에 됐듯 ‘자동차 왕’이 될거라 호언장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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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회사로 비야디를 알린 하이브리드 자동차 ‘F3’ / 전기자동차 ‘E6’ / 비야디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자동차 ‘친(秦)’

이정표가 된 ‘F3’에서 ‘친(秦)’까지.

비야디의 자동차 초기 전략은 가격대비 성능이었다. 여타 외산 자동차와 성능은 비슷하지만 가격은 절반 정도의 제품을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비야디는 시장에 저변을 넓혀간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이후 중국 자동차 시장의 성장세가 둔화되자 2008년을 기점으로 전기차 개발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비야디 자동차 사(史)에 스프링보드 역할을 하는 모델이 등장한다. 하이브리드 자동차 F3를 29만 대나 판매하며 그해 중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단일 모델 자동차 제조사가 된 것이다. F3는 사실 일본 도요타 코롤라를 본떠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소비자는 코롤라의 반값에 성능을 대부분 구현해 낸 F3에 열광했다. 이후 비야디는 전기 자동차 F3e, E6,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자동차 친(秦) 등의 히트모델을 선보이며 자타공인 중국 정상의 위치에 올라선다. 아울러 글로벌 시장에서 신재생에너지차 제조기업 선두권에 나서게 된다.

비야디는 2016년 실적만 따졌을 때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기자동차를 판매한 기업이다. 포춘이 선정한 ‘세상을 바꾼 혁신기업(2015)’에 랭크업되기도 했다. 아울러 왕촨푸는 중국 최고 부호 순위 맨 위에 몇년에 걸쳐 이름을 올린다. *왕촨푸는 2016년 중국 최고 주식부자이기도 하다.

친환경 자동차 시장의 틈새시장을 찾다.

모든 이가 비야디의 다음 승용차를 기대할 때 왕촨푸는 이익 최대화를 위한 틈새시장을 공공부문에서 찾는다. 자동차 산업이 신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중국 및 글로벌 시장에서 수요가 급등할 것이라는 예측을 한 것이다. 이 판단은 옳았다. 중국을 비롯한 각 나라에서 친환경 운송 수단을 찾을 때 비야디는 훌룡한 대안이 되었다. 비야디의 전동버스와 택시 등이 미국과 영국 등에 수출되었고 중국 시장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또 중국 심천시 등의 정책 방향에 맞춰 대중교통 수단인 시내버스, 택시 등의 관용차로 전기자동차를 공급했다. 업계의 추이를 분석해 시장을 개척해 나간 것이다.

비야디는 승용차를 비롯해 택시, 버스, 관공서용 특장차 등을 생산한다. 비야디의 한국 진출차량도 관용 차량이다.

모방에서 혁신을 찾다. 

결과적으로 성공했지만, 왕촨푸가 배터리 산업에 이어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 것은 큰 모험이었다. 비야디는 자동차 선업의 비전문가였고, 경험과 기술도 부족했다. 단지 전략과 실행력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왕촨푸는 부족한 기술과 시설을 자체적으로 키우고 구축하는 작업을 한다. 믿을 것은 사람 뿐이었다. 왕촨푸는 사내 기술자들과 함께 유명 자동차 브랜드를 해체해 자체적으로 기술을 쌓아 나아가는 한편 특허침해 소지를 원천적으로 막기위해 틈새 기술을 찾는다. 이 과정에서 비야디는 짝퉁 자동차 기업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비자의 선택을 얻어 사업은 점차 성장한다.

자금력이 어느정도 쌓인 다음에는 대규모 자본과 연구인력을 들여 기술개발에 집중한다. 이것이 심화되어 비야디는 단순한 자동차 조립회사가 아니라 제조사로 태어난다. 왕촨푸는 기존 자동차 메이커의 관습이라 할 수 있는 외주 생산을 지양하고 시작부터 자체 생산을 선택한다. 그것이 중국 여건에 맞는 제조 방식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재 비야디는 자동차를 만들 때 엔진을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부품을 자체적으로 만든다는 것이 자랑이다. 무모할 정도의 실행력이 배터리 산업뿐 아니라 전 스마트폰 이후 가장 큰 시장으로 분류되는 전기 자동차 산업의 중심에 서게 한 것이다.

시장의 흐름을 읽어 들이는 능력.

만약에 왕촨푸가 전통의 화석연료 자동차 제조만을 고집했다면 현재의 성장은 어불성설이었을 것이다. 왕촨푸는 자신의 길을 가는 기업가이기도 했지만, 시장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사업 전환을 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렇기에 세간에서는 비야디의 성장을 로켓에 비유한다. 하지만 왕촨푸는 매우 신중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장기적으로 세밀하게 전략과 전술을 기획하는 기업인이다. 큰 그림을 그리되, 그 과정으로 가는 선과 면의 디테일을 자신이 가진 강점으로 채워나가는 스타일이다. 기업의 역량과 시장의 동향을 동시에 저울질 해 치고 나갈 때 속도를 내는 것이다.

비야디는 중국 정부를 비롯해 여러나라가 신재생 에너지를 정책적으로 추진함에 따라 향후 더 성장해 나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비야디는 2016년 7월 유상증자를 통해 지분 9%를 팔아 총 145억위안(약2조 5천억원)자금을 유치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전자는 455 만달러를 들여 이 회사의 지분 2%를 취득하기도 했다. 비야디의 기업가치를 높게 판단한 것이다.

우리나라 자동차 제조, 신재생에너지 회사에게 있어 비야디는 주목해야 할 기업이다. 타겟시장이 같은 실질적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제 50대 초반의 왕촨푸가 있다.

설립 당시 20명에 불과했던 비야디 임직원 수는 2017년 현재 22만 명 규모다.비야디는 심천 본사를 비롯해 서안, 북경, 상해, 창사에 5개 자동차 생산 산업단지를 구축하고 있다.

심천 도심에서는 비야디에서 생산한 전기 버스를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비야디 본사 내부는 거대한 전기 자동차 충전소다.  / 본사 내 주차장겸 충선소는 한 번에 400대의 차량을 탑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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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디는 중국에 스카이레일 교통시스템을 구축해 주력사업으로 키운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라 2016년 10월 비야디는 심천 본사에서 시작되는 4.4km 거리의 모노레일 노선(스카이 레일)을 개통했다. 비야디는 이미 광둥성 산터우 시로부터 250㎞ 길이의 모노레일 건설 주문을 받아놓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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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현장 중심으로 취재하며, 최신 창업 트렌드와 기술 혁신의 흐름을 분석해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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