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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8. 글쓰기, 그리고 홍보팀으로 버려지다

대한민국 스타트업을 위한 어느 벤처투자자의 수줍은 고백

“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술을 마셨다. 1차로 맥주만. 순살 마늘치킨과 함께. 취기가 올라오다가 만다. 약간은 헤롱헤롱할 정도여야 밀린 글이 잘 써질텐데, 아직은 부족한 듯 잘 써내려 가지 않는다. 역시나 벤처캐피탈에게 3월은 바쁜 달이다.

나의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난 지독한 열등감에 휩싸여 있었다. KTB에는 왜 그리 잘난 놈(?)들이 많은지. 서울대, 고대 출신이 주도하는 판에 서강대 나온 나 같은 피래미는 그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래도, 서강대는 올해 대통령도 배출한 대학 아닌가?

닷컴버블이 꺼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인터넷투자팀에 들어오다 보니 그 화려했던 영광은 선배들만 누렸을 뿐 난 그 선배들이 싼 똥을 치우기에 바빴다. 닷컴 버블시절에 난발했던 투자는 내가 인터넷팀에 오면서부터 하나 둘 망가지기 시작했다. 닷컴버블 초기에는 조금 투자를 해봤지만 후반기에는 뒤치닥거리만 하기 바빴다. 

뒤치닥거리는 쉽지 않은 일이다. 투자는 돈 쏘는 재미라도 있는데, 남들이 싼 똥들은 지저분할 뿐더러 치우기도 귀찮다. 쌓아두면 냄새만 더 풍기고, 냄새 나는데 안치운다고 팀장들은 악악 대고. 정말 돌아버린다. 그래도, 난 똥 주위에 생긴 구더기, 파리떼를 치우며 냄새도 꾹 참으며 전임자들이 투자한 망가진 포트폴리오를 열심히 뒷수습했다. 어느 누구보다도 팀장께 충성하며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나에게 돌아온 건 인사고과 D.

D! D는 대학 1학년 시절 회계원리 이후 오랜만에 받아보는 평점이다. 난 역시 벤처캐피탈에 적성이 안 맞는 놈인가 보다. 학교도 서울대, 연고대에 밀리고 인사고과도 바닥이니 VC를 떠나야 하나 보다. 그런 열등감은 때론 팀장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나를 괴롭혔다.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회사와 팀을 위해 일했는데.

최소한 나에겐 열등감을 달래는 데 글쓰기가 최고였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영화평을 쓰는 것이다. 이름하여 ‘이희우의 영화 까발리기’. 난 내 이름 넣은 제목을 너무 좋아하는 가 보다. 그때부터 그랬으니. 하여튼 토요일 오전 홀로 조조영화를 보고 영화까발리기를 쓰는 동안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때 만큼은 나에 대한 자책,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만 영화평을 쓰고 즐기는 것은 의미가 없어 영화평을 쓸 때 마다 사내 인트라넷에 올렸다. 직원들이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하루는 학교 선배 광희형이 한마디 한다. 

“희우야, 너 자꾸 그런 글 올리면 윗사람들이 너 노는 줄 알어. 안그래도 찍혔는데 그러다 너 짤린다.”

“아, 네, 저도 아는데 전 쓰면서 스트레스 푸는 스타일이라…”

“그럼, 너 혼자 쓰고 즐겨야지 그런걸 왜 매번 올리냐?”

“제 글 여러사람이 보면 좋찮아요”

“그래도, 쓰지마! 너 한테 안좋아”

“네~”

대답은 했지만 만약 그때 내가 광희형의 얘길 듣고 그대로 따랐다면. 음, 아찔하다. 그때 내가 썼던 ‘영화 까발리기’를 보면 정말 잘 썼다. 자뻑이다. 어쨌든, 그때부터 약간은 훈련이 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거겠지. 이런 생각이 들자 예전 내가 썼던 영화평들이 보고 싶어진다. 언제 기회가 되면 한번 올려보도록 하겠다.

하여튼 2002년 초 갑작스런 인사발령으로 난 홍보팀으로 버려졌다. 일은 안하고 맨난 글만 썼던 놈으로 찍혔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글은 제법 쓰는 걸루 봐서는 홍보팀에도 잘 할 것으로 보였나 보다. 그렇게 보내진 홍보팀,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투자를 하기 위해서 들어온 것이지 보도자료나 쓸려고 VC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어느 상황이 되었건 살아날 구석은 있다. 홍보팀도 사람이 살 만한 곳이다. 마음 한 구석엔 배신감과 허탈감이 있었지만 일단은 적응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다잡아 지지 않는 마음, 항상 이럴 때 외부에서 유혹이 오기 마련이다. 인터넷투자팀 시절 내가 담당했던 ‘리얼미디어코리아’ 정재우 사장으로부터의 러브콜. 그래도 아직은 KTB를 떠날 때가 아닌 것 같아 거절하였다.

내가 정 붙일 곳은 글 밖에 없었다. 기존부터 있었지만 유명무실했던 KTB 이메일 뉴스 서비스 ‘KTB n-Daily’를 내가 편집하게 된 것이다. 그걸 편집하면서 난 나의 글들을 은근슬쩍 웹진에 집어 넣어서 이메일 송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습관이 2007년의 VC 소식지 ‘IDG VC Update’, 그리고 현재 진행하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스타트업 토크쑈 ‘쫄투! 쫄지말고 투자하라’까지 이어진 것 같다.

난 미디어를 아는 벤처투자자로 성장하고 싶다. KTB 홍보팀 근무 경험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Time지 기자출신으로 Google, You Tube, Paypal 등에 투자한 Michael Moritz처럼, ‘승려와 수수께끼’를 쓴 클라이너퍼킨스의 Randy Komisar처럼. 

1997년 KTB 네트워크에서 벤처캐피탈에 입문한 후 현재 코그니티브인베스트먼트를 설립 및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스타트업을 위한 고품격 투자상담 토크쇼 “쫄투! 쫄지말고 투자하라”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 교육에 관심 많아 예비 창업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창업교육 프로그램인 “쫄지마! 창업스쿨”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4년 7월 그 동안 플래텀에 연재한 글과 새로운 창업이야기를 담은 ‘쫄지 말고 창업(이콘출판)’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벤처캐피탈, 창업, 스타트업, 기업가정신 등에 관심이 많아 개인적으론 그쪽 분야를 계속 연구하고 있습니다.

댓글 (1)

  1. 아크몬드 아바타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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