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감독은 현장을 어떻게 통솔할까?’
감독은 현장의 지휘자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제작 과정에 참여하는 배우, 디자이너, 기술자, 투자자 등 모든 구성원의 업무를 조율하고 통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감독과 창업자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비슷하다. 창업자가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프로젝트의 리더라면, 조직을 잘 이끄는 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시점을 반드시 맞이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이 이끄는 현장에서 수많은 타인과 함께 살아나갈 줄 알아야 한다. 혼자만 잘 알고, 혼자만 잘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모든 이로 하여금 힘을 내고 싶게, 그래서 각자의 최선을 다해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모든 것이 설득의 과정이다. 유연하지만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을 이끌 줄 아는 감독들에게는 어떤 비결이 있을까.
사람들의 인생이 현장에 있다 –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안판석 감독
대부분의 스태프는 1년 내내 촬영장에서 하루를 보내요.
사람들의 인생이 거기에 있으니까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샤워도 하고 노닥거리기도 하는 일상의 행복이 거기서 이루어져야죠.
촬영은 누군가한테는 특수한 행위일 수 있지만 대부분 스태프들에겐 일상이거든요.
촬영장을 학교라 치면 반 아이들이 모여서 공부도 하고 ‘노가리’도 까고 연애도 하다가 작품은 덤으로 나오는 거죠.
– 2014년 아이즈 인터뷰, <밀회> 안판석 감독
안판석 감독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밀회>, <풍문으로 들었소>, <하얀거탑> 등의 드라마를 만들었다. 2006년에는 영화 <국경의 남쪽>의 각색과 감독을 맡았다.
위의 인용은 시간적 여유나 좋은 복지가 생산성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보다 더 앞서 봐야 할 것은 ‘사람들의 인생이 거기에 있으니까 (…) 일상의 행복이 거기서 이루어져야죠’라는 말에 함축된 안판석 감독의 인간을 향한 공감의 시선이다.
그에게 스태프들은 걸어 다니는 도구가 아니라 저마다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각 개인이다. 고된 일터에서도 일상을 있는 힘껏 잘 가꾸어나가고 싶은 그들의 동기를 이해하고 격려한다. 공감의 눈을 뜬 감독의 통솔 아래 일하는 이들은 대체로 행복할 것이다. ‘여기는 일하는 곳이지만, 너의 삶의 일부이기도 하니 이곳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여겨주는 리더는 흔치 않다.
얼마 전 종영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한 스태프는 개인 SNS 계정을 통해 ‘스태프가 행복해야 예술 하실 수 있는 우리 안감독님’, ‘영화는 12시간 표준 근로제로 찍는데 우린 왜 못하냐며 본인이 덜 찍으면 된다고 하신다’, ‘전날 쉬었다면 뭐 하고 지냈나 얘기도 좀 하고 한숨 돌린 후 카메라 셋업 시키자며 일부러 스태프들보다 30분 천천히 도착하신다’, ‘사람을 부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뭐라도 더 잘하고 싶게끔 만드는 현장을 만났다’라며 감독에게 감사를 표했다. 극에서 경선 역할로 출연하고 있는 장소연 배우는 ‘감독님의 모토가 하루에 12시간 이상 휴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순조롭게 촬영하고 있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일이 ‘삶’의 일부임을 아는 동시에, 일은 삶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는 리더다.
많은 기업이 일과 삶을 분리하지 않는 인재를 원한다. 그러나 정작 직원의 일과 삶을 종합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주는 리더는 드물다. 영어교육 앱 ‘산타토익’을 운영하는 뤼이드의 장영준 대표는 개발자들을 동기부여 하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개발자들의 사적이고 구체적인 욕구들을 포착해 이를 충족시켜주려고 한다. 한 예로 우리 회사에는 유명한 개발 커뮤니티의 운영자가 있다. 해당 커뮤니티에서 오프라인 행사를 하면, 회사 이름으로 꼭 지원 물품을 보낸다. 그럼 그 직원의 기가 산다. 더불어 이 사람의 영향력이 커뮤니티 내에서 커지면 이를 통해 좋은 개발자가 우리 팀으로 들어올 가능성도 커진다.”
자산관리 앱 ‘뱅크샐러드’를 운영하는 레이니스트의 김태훈 대표는 팀원 각각의 ‘문맥’을 알아가는 것이 조직을 이끄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한 사람에 대한 프로파일은 단순히 몇 가지 기호나 취향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변치 않는 고유의 성향은 무엇인지, 현재의 삶을 이끄는 동인은 무엇인지,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김 대표는 사람의 전체 문맥을 파악하고 나면, 그가 어느 자리에서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직원들의 사생활을 사찰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사적인 욕구와 삶의 동인을 아는 것은,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조직의 사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어디까지나 상대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과 공감이 있어야만 가능한 이야기다.
정확한 디렉션과 자유를 동시에 준다 – <레이디버드> 그레타 거윅 감독
즐거운 현장이 동시에 생산적일 수 있을까? 사당오락을 신조로 한 수험생활을 거친 한국인에게 즐거움과 성취는 공존할 수 없는 단어처럼 들린다. 그러나 좋은 감독들이 세상에 내놓은 작품들을 보면, 생각이 조금 달라지기도 한다. 다들 여유롭게 일했다고 하는데, 결과물은 완벽하고 치밀하다. 이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솜씨다. 비결은 정확한 디렉팅에 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앎으로써, 다른 사람의 시간을 절약해준다.
앞서 언급한 안판석 감독의 스태프 역시 ‘모든 씬에 정확한 콘티가 있기 때문에 원씬, 원카트, 원테이크가 다반사’라고 말했다. 2015년 <풍문으로 들었소>에 출연한 배우 유준상은 ‘편집 방향까지 PD의 머릿속에 있다. 음악 편집까지 미리 생각하신다. 분량 조절이 항상 맞을 수는 없는데 한 번도 허투루 빼는 장면이 없다. 효율적으로 연출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은 올해 가장 주목받은 여성 감독이다. 그는 <프란시스 하>, <매기스 플랜> 등의 작품에서 배우로 먼저 활약했다. 이 83년생 감독은 올해 첫 단독 연출작인 <레이디버드>를 세상에 내놓았고, 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부분 작품상을 받았다. 경쟁작은 휴잭맨의 <위대한 쇼맨>,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겟아웃> 등으로 쟁쟁했다. 규모 면에서 독립영화로 분류되는 <레이디버드>가 이례적인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원래 쓰고 싶어 했던 카메라도 포기해야 했을 정도로 빡빡했던 예산, 생애 첫 감독 경험.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현장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수년간 집필한 350페이지의 각본(후에는 100여 페이지로 편집) 덕분이었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입을 모아 ‘각본이 놀라울 정도로 자세했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영화에는 애드립이 거의 삽입되지 않았다.
거윅은 <매기스플랜>을 함께 했던 레베카 밀러(Rebecca Miller) 감독의 가르침대로 스태프와 배우보다 한 시간 일찍 현장에 도착해 그 날의 현장 운영 계획을 세웠다. 또 영화의 배경이 되는 새크라멘토 지역의 과거 졸업 앨범, 사진, 신문 등의 참고 자료를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는 영화가 가야 할 명확한 방향성을 알고 있었고, 이를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잘 공유할 줄 알았다.
감독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모르면, 현장의 스태프들도 함께 우왕좌왕하게 된다. ‘이것도 찍어보고, 저것도 찍어보고…’ 하는 동안 비용과 노동력 그리고 모두의 시간이 소진된다. 그레타는 배우로 오래 일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번은 전 직장의 보스로부터 ‘회사의 방향성을 제시해보라’는 주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나름 민주적인 방식으로 목표를 정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나는 이 회사에 계속 있어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했다. 개별적인 프로젝트의 방향성은 각 구성원이 잡아나갈 수 있다. 그러나 회사가 나아가야 할 길을, 한 명의 뛰어난 직원이 짠하고 나타나 알려주리라는 것이라는 것은 지나친 환상이다.
섬세하고 정확한 디렉팅이 곧 자유의 박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레타 거윅은 한 인터뷰에서 ‘모든 영감은 배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사소한 에피소드로 그는 의상팀에게 영화 속 의상을 한꺼번에 준비하게 한 뒤, 매일매일 배우들이 각 캐릭터가 입을 옷을 직접 고르게 했다. 정확한 방향성 내에서 구성원이 각자마다의 방법을 선택해나가게 하는 것, 그 여지를 만들어주는 것이 그레타 감독의 방식이다.
<노예 12년>과 <헝거>를 만든 스티브 맥퀸 감독은 현장에서 잔뜩 긴장한 배우 다니엘 칼루야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내가 마지노선을 잡아줄게. 그 안에서 네 마음대로 해. 무슨 말인지 알지?”
뛰어난 사람들과 오래 일하는 방법을 안다 – <콜미바이유어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괴테는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사람을 끌어당기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안다’고 말했다.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 그리고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 일할 줄 아는 지혜와 자세. <콜미바이유어네임>, <비거스플래쉬>, <아이엠러브> 등을 만든 이탈리아의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 감독은 이 방면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감독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스탭들과 일해왔다.
이 무리를 이끌고 다니며 일을 한 게 25년 정도 됐다. 우린 집시들이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그냥 아무 데나 텐트를 치고 캠프를 한다.
나는 항상 내가 같이 일하고 싶은, 내 인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만 데리고 다닌다. 25년 동안 같은 사람들이랑 일해온거다.
현장의 분위기는 바로 그런 인간관계에서 자연스레 나온다.
우리가 다 같이 공유하는 가족이라는 감정이 새로 합류한 가족들에게도 전이된다. 이런 작업 환경이 나에게는 아주 소중하다.
-2017년 토론토 국제영화제, <콜미바이유어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콜미바이유어네임>에서 주인공 엘리오 역을 맡은 배우 티모시 샬라메는 루카 감독이 이끄는 현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치 앤디 워홀 공장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모든 멤버들이 감독의 과거 작품에서도 함께 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그저 물려받는 입장이었다.”
루카 감독이 2017년에 내놓은 <콜미바이유어네임>은 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 수상을 포함한 최우수 작품상, 남우주연상, 노래상 등 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다. 350만 달러라는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34일간 촬영한 이 작은 독립영화는, 연출력은 물론 배우들의 연기, 음악, 영상미, 의상 등 다양한 부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25년 간 합을 맞춰온 각 분야의 스태프들이 각자의 몫을 멋지게 해낸 덕분이다. 그의 표현대로 이 멋진 집시 무리의 탁월함은 새로 합류한 뉴페이스에게도 빠르게 전이된다. 누가 들어와도 자신이 가진 것 중 최고의 것을 꺼내고 싶게 만드는 분위기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그가 함께 일할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은 명확하다. “나는 배우들과 사랑에 빠져야만 일을 할 수 있다. 정말로 원하는 배우가 아니면 절대 함께 영화를 찍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매번 같은 배우들과 일한다.” 그는 그야말로 인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만 일한다. 오래 가야 하는 여정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루카 감독과 그의 뮤즈인 틸다 스윈튼과 미완성작과 아직 개봉하지 않은 스릴러 영화 <서스피리아>를 포함해 총 여섯 편의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루카 감독은 배우를 캐스팅할 때 오디션을 보지 않는다. 연기력을 보려면 과거 출연작을 찾아보면 되지, 굳이 오디션을 통해 검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의 ‘기술’을 아는 것보다 ‘성향’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그는 작업하고 싶은 배우와 아주 긴 대화를 나눈다. 탐색의 과정은 수년에 걸쳐 이루어지기도 한다. <콜미바이유어네임>의 티모시 샬라메는 17살 때 감독과 첫 미팅을 했고, 3년 뒤인 20살 때 그의 영화에 출연했다. 올리버 역의 아미 해머 역시 5~6년에 걸친 감독과의 긴 교류 끝에 영화에 합류했다. 중요한 것은 몇 년에 걸친 만남 동안, 루카가 두 배우에게도 그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는 점이다. 인간적인 매력, 능력에 대한 확신, 좋은 대화를 통해 쌓아온 친밀감 등이 서로를 서로에게 안내했다.
물론 촌각을 다투는 스타트업 업계와 예술계의 사정은 몇몇 부분에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의 본질은 같다. 위의 세 감독은 결국 모든 것이 사람으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소위 ‘사람을 갈아 넣어’ 급속히 성장해온 기업들이, 얼마 가지 않아 재기불능 수준으로 추락하는 일은 최근에도 벌어졌다. 할 일도 많은 대표가 사람 관리에 시간을 너무 많이 쏟는 게 아닐까? 하지만 올바른 사람을 올바른 자리에 앉혀놓으면, 일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이만큼 효율적인 조직 관리법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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