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1] 공간이 스타트업을 춤추게 한다
래퍼 빈첸(VINXEN)에게 ‘공간’은 노랫말을 떠올리고 그에 어울리는 사운드를 입히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제 위치는 합정역 7번 출구 도보 4분 정도 거리 지하방
대각선 방향에는 메세나폴리스 What
거기 사는 그대들은 어떤 기분이신가요
신호를 기다리며 바라보면 괜시리
허무한 느낌이 들고 여러 감정이 오가요
그대들의 돈은 노력인가요 집안인가요
그걸 떠나 그대들은 어떤 기분이신가요”
(빈첸이 2018년 5월 내놓은 <제련해도> 앨범 수록곡 ‘그대들은 어떤 기분이신가요’ 中)
그는 자주 서울 지하철 2·6호선 합정역 인근의 낮은 둔덕에 앉아 고층 빌딩을 바라봤을 것입니다. 중세 이탈리아 성당처럼 드높게 솟아오른 ‘메세나폴리스’는 자신이 거주하던 ‘지하방’에 비하면 비현실로 비쳐졌겠죠. 계급적 박탈감 속에서 그는 체념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토로합니다. “허무한 느낌이 들고…그대들의 돈은 노력인가요”
“스타트업 = 예술”
타고난 것이든 길러진 것이든, 세상을 감각하는 촉수가 예민한 예술가(Artist)들은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공간’을 재료 삼아 작품을 길어 올립니다. 그들에게 ‘공간’은 그래서 절대적이죠. 떨쳐내고 싶어도 ‘지하방’에서 올려다 본 풍경들이 작업 과정에 수시로 비집고 들어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는 음악·영화·문학·미술 등 우리가 흔히 예술(Art)이라 부르는 분야를 업(業)으로 삼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앞선 글 [연재를 시작하며 “바보야, 문제는 ‘연결’이야”] 에서 저는 스타트업을 ‘주류 비즈니스의 틈새에 새 둥지를 트는 일’로 비유한 바 있습니다. 빈첸의 ‘힙합’을 포함한 모든 예술 창작은 결국 일상의 미세한 빈틈을 겨냥한 뒤 이를 전복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스타트업 역시 예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니까요. 이것이 과장이라고 해도, 스타트업은 적어도 ‘잠재적 유(有)’를 ‘실체적 유(有)’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인 것만은 사실일 것입니다.
<조선일보> ‘신년기획’의 재해석
올해 첫날, <조선일보> 1면에 게재된 ‘신년기획’ [질주하는 세계 – 대학] 편을 받아들고 제가 떠올린 키워드는 그래서 되레 ‘공간’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스타트업의 ‘공간’이었습니다. 아마도 해당 ‘신년기획’은 이를 중점에 두진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일보>는 해외 명문 공과대학[미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스위스 취리히 공대, 싱가포르 난양 공대, 이스라엘 테크니온 공대, 인도 공대(IIT) 등]을 찾아가 AI(인공지능)시대를 준비하는 학자 및 연구원들의 현황을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이어 이들의 연구가 미래 먹거리인 IT 및 바이오 산업(스타트업 포함)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도 보여줬습니다. 때문에 모든 기사들은 그들의 연구 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기초·응용학문과 산업 간 클러스터가 얼마나 두터운가를 강조했습니다. 과연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제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이 모든 기사들의 리드(기사의 첫 문장 혹은 첫 문단을 일컫는 저널리즘 용어)에 존재하는 공통점이었습니다. 그 문장들 안에는 성공한 스타트업들의 비밀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죠. 아래 사례를 통해 이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사례1]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 본관 옆 스타타(Stata) 센터. 여러 개의 빌딩이 찌그러지고 기울어져 뭉쳐진 듯한 건물이다. 내부도 미로처럼 구부러져 쭉 뻗은 복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MIT 최대 연구 조직 ‘컴퓨터과학·인공지능연구소(CSAIL)’는 이런 곳에 있었다. 애덤 코너 시몬스 CSAIL 커뮤니케이션 총괄은 “센터를 설계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과학자들이 자주 만나 의견을 듣고 함께 고민하고 융합하라는 뜻에서 복잡하게 만든 것”이라고 했다.
[2019.1.1. <조선일보>·1면 ‘모든 학문은 AI로 통하라’, MIT의 교육혁명]
[사례2] ▲지난달 21일 아침 아마존·비자카드·삼성전자·델컴퓨터 등 글로벌 기업의 대형 연구소 10여곳과 스타트업 사무실이 밀집해 있는 벵갈루루 동부의 펀즈시티.
[2019.1.4. <조선일보>·8면 ‘모디 총리, 미국으로 직접 날아가 구글·MS에 벤처 세일즈’]
[사례3] ▲라파엘로 단드레아 취리히 공대 교수는 창업으로 엄청난 부를 얻었다. 상대는 아마존. 이탈리아 출신인 그는 미 코넬대 교수를 지내다 2007년 취리히공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창업한 회사는 이뿐 아니다. 그는 취리히공대에 가로·세로·높이 10m인 실내 드론 훈련장인 ‘플라잉 머신 아레나’를 만들었다.
[2019.1.7. <조선일보> 8면 ‘글로벌 두뇌 모인 工大 옆으로…애플·구글·IBM이 이사왔다’]
[사례4] ▲지난달 21일 싱가포르 난양이공대 의대 실험실. 10여 명의 학생들이 머리에 VR 기기를 쓰고 인체 해부 실습을 하고 있었다. 손에 기름을 묻히지 않고 항공기 터빈 엔진 속을 들여다본다. 병원과 기업에서 사용하는 방식을 대학 교육 현장에 들여온 것이다.
[2019.1.8. <조선일보> 8면 ‘노벨상 꿈 대신… VR수술·無人셔틀, 돈되는 기술만 한다’]
물론 이는 현장 취재 기사를 쓰는 펜(Pen)기자들의 흔한 기사 작성 방식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주안점은 이 문장들 속에 담긴 공통 분모를 찾아내는 것에 있겠죠. 즉, 대학이 상아탑으로 외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과 수시로 상호작용하며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 연구진·기업가·투자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매일 난상 토론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강점이라는 뜻입니다. 위 [사례1]에서 알 수 있듯, 미국 MIT 스타타 센터는 건물을 토론에 유리하도록 독창적으로 설계했습니다.
여러분들의 공간은 어떻게 연결돼있나요?
저명한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前 하버드大 교수)이 전 세계에 파란을 일으키며 퍼뜨린 <통섭(統攝·Consilience)>을 굳이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학제·산학 간 경계는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아니, 무너져 내린 지 오래입니다. 바야흐로, 당대의 패러다임은 ‘연결(Network)’로 넘어왔습니다. 때문에 2004년부터 본격화된 신경건축학의 연구 성과를 참고해서라도, 이 뛰어난 두뇌들이 자유롭게 연결돼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구축하는 일에 해외 유수 대학들이 골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요. 구체적으로 한국의 대학 풍경은 어떠합니까. 올해 예산이 다소 증액됐다고 하지만, 기초학문에 대한 정부 지원은 여전히 열악한 실정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응용학문과 산업 간 연계 역시 원활하지 못합니다. 예컨대 경기도 성남에 자리한 ‘판교 테크노밸리’에선 1200여 개 기업·7만여 명의 고급 인재들이 한국판 구글·페이스북을 꿈꾸며 일하고 있지만 이들의 아이디어가 대학 연구실에서부터 발현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연약하게 각자도생하고 있는 것이죠. 둘 사이 물리적 거리도 멀거니와, 한국의 대학 사회는 여전히 변화 앞에 보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성공한 스타트업 대표들이 특강을 열어 단발적으로 비법을 전수해주거나, 비전임 초빙교수로 한 학기 정도 예컨대 ‘기업가 정신’ 과목을 가르치는 것으로 갈음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게 한국의 유수 두뇌들은 흩어져있을 뿐, 연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남의 자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죠.
산학 연계에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업계 내부도 마찬가지죠. 여전히 많은 스타트업들은 직사각형에 갇혀 있습니다. 참신한 아이디어는 있지만 초기 투자금이 부족한 이들이 얻을 수 있는 수도권 내 사무실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높은 임대료 때문이죠. 겨우 얻은 사무실이라도, 기존 오피스를 그대로 따른 것이어서 스타트업에서 가장 중요한 ‘창의성’이 발현될 여지는 여전히 높지 않습니다.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
정재승(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는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2016)(콜린 엘러드 著)(원제 : Places of The Heart)에 쓴 감수(監修)의 글에서 “건축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을 축조하는 과정’이기에, 행복한 삶을 설계하는 건축가들에게 ‘우리는 어디에서 가장 행복한가’에 대한 신경과학적 이해는 필수”라면서 “내 공간을 둘러보고 내 삶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나의 공간이 얼마나 적절한가를 성찰해보자”고 조언한 바 있습니다.
[에스토니아 출신 건축 거장 루이스 칸(Louis Kahn)이 1959년에 지은 미국 샌디에이고의 생명공학 연구소 ‘솔트 인스티튜트’는 건축주(바이러스 학자, 조너스 솔크)의 요청으로 천장을 높게 지었고, 이후 이 연구소에서만 23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됐습니다. 이에 놀란 신경과학자들이 해당 인과관계를 연구한 결과, 단순 연산의 경우 천장 높이가 2.4미터로 낮을 때 가장 좋은 성과가 나온 반면, 창의·추상·복합 사고에서는 천장이 가장 높은 3.3미터일 때 가장 높은 성과가 나왔습니다. 우리 뇌가 천장의 높이에 따라 다른 성과·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이로써 학계의 인정을 받은 것이죠.]
그러니 한국의 모든 스타트업 리더들이여! 그리고 ‘규제 개혁’만이 스타트업을 진흥시킬 수 있다고 믿는 섣부른 비판자들이여! 우선 여러분들이 근무하고 있는 공간부터 둘러보는 것은 어떨지 감히 제안드리고자 합니다. 신경건축학자에게 컨설팅을 받아서라도 오피스 구조를 여러분들의 업무 형태에 맞게 바꿔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자는 것이죠. 여러분들의 사무실엔 어느 정도의 다양성(전공과 나이, 연령과 국가, 직업과 성별을 불문하고)이 확보되어 있습니까? 그런 임직원들은 어떤 공간에서 자유롭게 연결돼 있습니까? 위에 서술한 사례대로, 예컨대 천장의 높이는 어떠한가요? 강산이 변해도 꿈쩍도 않는 정부 정책만을 바라보고 한탄만 하고 있는 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스타트업계에선 더더욱 시간(Timing)이 생명일테니까요.
<조선일보>가 부단히 발품을 팔아 세계를 누볐지만, 그래서 이 신문은 규제 개혁이 스타트업계 활성화를 위한 1순위 과제라고 부르짖고 있지만(이는 부분적으로는 옳은 말일 수 있습니다), 그보다 당장 오늘부터 작은 변화를 시도해보는 게 더 빠르고 현명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바로 저와 당신의 공간을 새롭게 네트워킹하는 것이죠. 결국 공간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니까요. 예술가들처럼, 스타트업에도 ‘공간’은 절대적입니다.
필자 소개 : 레이먼드 권(Raymond Kwon) / 前 <한겨레신문> 기자, 어쩌다 <한국기자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는 콘텐츠 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스타트업 <카운터컬쳐>(Counter-culture) 커뮤니케이션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mail : raymond@counter-culture.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