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7] ‘정치적 올바름’이 밥 먹여준다 : ‘캡틴 마블’과 ‘BBC’
얼마간 오해가 있었습니다. 지난주 칼럼(‘스타트업이 밀레니얼과 일하는 법 : 시(詩)팔이를 떠올리며’), 마지막 문단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글을 맺었습니다.
“그러니까 도대체가 그것이 미학적 아방가르드이든,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갖춘 주장이든, 재미가 없는 것은 용서받지 못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문제는 어떤 종류의 ‘재미’냐는 것이겠죠. 모든 형태의 ‘유머’가 다 통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그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맥락 안에서 유머도 발휘돼야 할 것입니다. <유머니즘>(문학과지성사, 2018)의 저자 김찬호(성공회대) 교수도 책의 서두에 이를 전제했습니다.
“함께 웃지 못하는 웃음은 폭력이다. (중략) 한쪽에서는 고통에 시달리거나 수치심에 빠져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희희낙락하는 구도. 웃음의 주체와 대상이 양분되는 경우는 한국 사회에서도 자주 발견된다.”(45p)
때문에 ‘유머’를 자사의 콘텐츠에 내장할 땐 그것의 ‘정치적 올바름’까지 면밀히 따져봐야 합니다. 그것이 스타트업 브랜드 이미지를 좌우하는 경우가 최근 숱하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죠. 특히 밀레니얼 세대를 주 고객층으로 삼는 스타트업에게는 앞서 지적한 ‘유머’만큼이나 이번 회에 짚어볼 ‘정치적 올바름’도 상당한 폭발력을 지닙니다. 다음 사례를 봅시다.
‘청춘여락’과 ‘맛있는 녀석들’
지난 2월말 유명 여행 유투버인 ‘청춘여락’은 3.1절 100주년을 앞두고 일본 여행을 안내하는 영상을 올렸다가 커다란 곤혹을 겪었습니다. 다수의 시청자들이 “곧 3.1절인데 역사의식이 너무 없는 것 아닌가요?”, “하필 이 시점에 일본 홍보 영상을 올려야만 했나요?”라는 비판을 쏟아냈기 때문입니다.
‘청춘여락’은 사과의 의미로 “영상 수익을 ‘위안부’ 할머니들께 기부하겠습니다”라는 답변을 내놓았지만 여론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 돈을 받으실 할머니들의 기분을 생각해봤나요?”라는 비난이 쇄도한 것이죠. 상황이 악화일로에 접어들자, ‘청춘여락’은 무릎 꿇고 사과하는 영상에 더해 2차례 사과문까지 남겨야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코미디TV> 예능 ‘맛있는 녀석들’ 제작진 역시 비슷한 이유로 곤경에 처한 바 있습니다. 3.1절 당일, ‘일본 가정식&미국 가정식’을 소개한 것입니다. 일본식 꼬치구이 덮밥을 먹는 장면이 전파를 타자 네티즌들의 뭇매가 날아들었습니다. 제작진은 곧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위 사례로 보건대, 밀레니얼 세대에게 ‘올바름’에 대한 감수성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한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비즈니스와 정치는 철저히 다른 영역이라고 선을 긋고 팔짱 끼고 있는 스타트업들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브랜드 이미지 구축에 치명타를 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정치’는 대부분 대문자 ‘정치’입니다. 국회·정당·정부 등 거대 제도권 정치가 바로 그것이죠.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소수자·인종·난민 등 이른바 소문자 ‘정치’로 받아들여지던 영역들이 실제 비즈니스에선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마블>의 철학
이는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특히나 콘텐츠 스타트업들은 자사 콘텐츠가 지니고 있을지 모를 사회적 편견을 늘 경계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난 7일 미국 마블 스튜디오 제작 총괄 빅토리아 알론소는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Top Marvel Executive: ‘The World Is Ready’ for a Gay Superhero in the MCU)에서 “마블 영화에도 이제 동성애자 수퍼 히어로가 나타날 때가 됐다”면서 “다양성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성공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각종 차별이 여전히 넓고 깊숙하게 퍼져있는 미국에서조차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감수성을 보유한 문화 콘텐츠에 대중들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압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적 올바름’이 돈이 되는 시대!
<2019 아카데미>의 사례
올해 개최된 아카데미 시상식을 볼까요? 멕시코 여성들의 연대를 그린 <로마>가 감독(알폰소 쿠아론)상을, 흑인과 백인의 연대를 다룬 <그린북>이 작품상을, 흑인 주인공 히어로 영화 <블랙팬서>가 음악상·미술상·의상상을 휩쓸었습니다. 지난 6일 국내 개봉한 <캡틴 마블>도 비슷합니다. ‘강한 여성’을 중심으로 난민 문제까지 짚어낸 이 영화는 개봉 첫 주만에 제작비 1억5200만달러(약 1726억원)을 회수했습니다.
국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폐 소녀와 변호사 이야기를 다룬 영화 <증인>은 250만명, <항거 : 유관순 이야기>는 100만을 넘어섰습니다. 예술로서 두 영화가 가진 매력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이들이 다루는 주제의식이 명징하다면, 대중들은 폭넓게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영화 발전을 위한 긍정적 방향인지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습니다.)
해리포터가 흑인 소녀라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출판계도 살펴볼까요? 지금 <뉴욕타임즈> ‘북섹션’을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45주 연속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소설이 있을 것입니다. <Children Of Blood and Bone>이 그 작품이죠. 한국에도 지난 1월 <피와 뼈의 아이들>(다섯수레)로 번역 출간됐습니다. 미국 하버드대 영문과에 재학 중인 신예 작가 토미 아데예미(25)가 쓴 이 소설은 서아프리카 신화를 바탕으로 검은 피부·하얀 머리를 지닌 소녀 ‘제일리’가 마법을 부리며 차별과 폭력을 넘어서는 모험기입니다.
나이지리아계 미국인인 그는 지난 13일 <조선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마법을 지닌 흑인 주인공, 본 적 있으세요?)에서 “우리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예술가들이 환영받는 새로운 황금기에 들어서고 있다”면서 “수십년 동안 미국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선 백인들의 이야기만이 잘 팔릴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게 틀렸다고 증명하는 사례들이 점점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특히 이번 소설을 구상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흑인을 신성하거나 마법의 힘을 가진 캐릭터로 묘사한 적이 없다. 평생 열렬히 책을 읽었지만 유색 인종이 중요 인물로 등장하는 소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심지어 어렸을 때 내가 쓴 소설조차 백인이 주인공이었다. 저처럼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자신과 비슷한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모든 책은 우리 주변을 둘러싼 세계의 진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세대가 핵심 소비자로 자리잡은 시대에 우리는 비즈니스를 펼쳐가야 합니다. 흑인이 영웅으로 등극한 영화에 열광하고, 해리포터가 백인 소년이 아니라 흑인 소녀일 수 있는 소설에 매혹된 세대들과 말이죠. 그러니까 ’학습된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태생적 올바름’ 속에서 성장한 세대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들에겐 ‘속도’보다 ‘정확성’, 그리고 ‘올바름’이 더 중요합니다.
<BBC>의 철학
영국 공영방송 <BBC>에서 800여명이 넘는 기자단을 진두지휘하는 취재 및 보도 총괄 본부장 조너선 먼로(52)의 말을 들어볼까요? 그는 지난 1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디지털 시대 저널리즘 미래’ 세미나에 참석해 “무수한 속보와 페이크 뉴스가 넘쳐나는 시대에 ‘처음이 되기보다 정확하게 하는 것이 낫다(it’s better to be right than to be first)”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발표를 맺었죠.
“모든 것은 브랜드 가치로 되돌아오는 법이다. 우리가 보도하는 내용이 정확하고 공평할 때 어떤 권위가 이의를 제기해도 우리는 ‘진실성’에 근거해 반박할 수 있다.
우리의 질문, 당신의 고민
제가 몸담고 있는 <카운터컬쳐>의 고민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희는 ‘▲콘텐츠+▲미디어+▲크리에티브+▲스타트업’을 표방합니다. 토미 아데예미가 깊이 빠져있다는 방탄소년단(BTS), 그리고 이들을 위시로 한 K-pop이 일궈놓은 문화 콘텐츠를 새롭게 개발해 북미 시장으로 직행(이스턴 디스트릭트 : Eastern District)했습니다. 때문에 어떤 가치를 우선 순위에 둘 지 논의를 거듭해야만 했습니다.
저희는 이 세 분야에 어떤 ‘유머’와 어떤 ‘정치적 올바름’을 담아, 밀레니얼 세대에게 다가가야 할지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이 질문을 공유하면서 해답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올바른 유머 = 돈
<넛지(Nudge)>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캐스 선스타인은 정치학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이룬 학자(現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이기도 합니다. 그는 2003년 미국에서 출간한 <Why Societies Need Dissent>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펼쳐 보였습니다. 이 책은 2009년 한국에도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후마니타스)로 번역 출간됐는데요. 이 책의 옮긴이(송호창 변호사 등)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더군요.
“말과 용어 사용에서, 인종·민족·종교·성 차별 내지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주의. 어떤 종류의 언어를 쓰느냐가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준다는 가설에 바탕을 둔다.”(개정판, 31p)
그러니까, 콘텐츠 스타트업들에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고를 하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가늠할 수 없는 경제적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유머!’ 어렵지만, 아니 어렵기 때문에, 가장 가치 있는 탐구가 아닐까요.
필자 소개 : 레이먼드 권(Raymond Kwon) / 前 <한겨레신문> 기자, 어쩌다 <한국기자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는 콘텐츠 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스타트업 <카운터컬쳐>(Counter-culture) 커뮤니케이션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mail : raymond@counter-culture.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