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9] 한·미·일 AI 스타트업 인재 전쟁 : ‘문송’은 옛말➁
한 대학생이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지난 기고(BMW 탄 플라톤 : ‘문송’은 옛말➀)를 보고서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졸업은 했지만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역사학도였습니다. 메일 서두에서부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선후배 및 동기들의 취업 현황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들 중 80% 이상이 졸업을 연기하거나, 졸업을 하고도 여전히 취업 준비생에 머물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를 보건대, 한국에서 ‘문송(?)’은 여전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전해주었습니다. 메일엔 긴장감마저 서려 있었습니다.
힘이 될 만한 답장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단순한 장밋빛 청사진이 아니라,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와 데이터가 담긴 나침반을 전달해주고 싶었습니다. 저 역시 전형적인 인문계 졸업생으로 스타트업에서 살아남으려 분투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아래 적힌 사례들을 눈여겨 봐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지금부터 당장 이렇게 하라’라는 지침은 아닙니다. 그럴 능력도 재간도 없습니다. 다만, 지난 칼럼보다 더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여준다면 방향타를 여전히 잡지 못한 ‘문송(?)인’들에게 더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한·미·일 공통 기획, 인재 전쟁
우선 국내외 전문가들의 말들부터 종합해보겠습니다. 이럴 땐 국내 유력 종합일간지를 포함해 뉴욕타임즈나 월스트리트저널, 가디언등 서구 유력 언론의 기획 기사들이 유용합니다. 콘텐츠 미디어 스타트업에서 일하다보니 콘텐츠 대국인 일본 언론도 챙겨야 합니다. 일본의 정론지로 불리는 <아사히신문>과 대표 경제지인 <니혼게이자신문>이 그 대상입니다. 그렇게 가만히 돌아보니, 지난 한달간 이들 전 세계 유력 매체들이 공통으로 다룬 기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AI(인공지능)입니다. 구체적으로는 AI와 인재입니다.
日정부, 年 25만 AI 인재 육성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일본입니다. 지난달 29일 <니혼게이자신문>은 일본 정부가 AI 전문 인력을 매년 25만명씩 양성하기로 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현재 일본 4년제 대학생은 학년별로 약 60만명인데, 이들 중 이공계에서 18만명, 인문계 7만명을 선발해 총 25만명을 AI 인재로 육성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정책대로라면, 향후 일본의 모든 대학에서 AI 과목은 전공을 불문하고 필수교양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인재가 되고 싶다면, 최소한 프로그래밍은 알고 있어야 하며 AI 윤리도 체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번 정책의 목표입니다. AI의 핵심인 ‘딥 러닝’과 ‘알고리즘’ 원리도 기본 소양이 될 것이라고 이 신문은 전했습니다.
대학 교육도 그에 맞춰 재편된다고 합니다. ‘AI 경제학’, ‘데이터 과학과 인문’ 등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과목들이 필수로 지정됩니다. 일본 정부는 기존 대학이 배출하고 있는 AI 인재가 현장 수요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당장 내년에만 해도 30만명 정도가 부족할 것이라고 일본 경제산업성은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대체가 전공을 따져가며 인재를 육성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죠.
美 철학 교수 “IT업체에서 먼저 전화”
이제 미국으로 넘어가 볼까요. 지난 2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전미과학진흥협의회(AAAS) 연례 회의에서 카네기맬런대의 데이비드 댄크스(철학) 교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에서 인문학도 몸값이 최근 5년새 크게 치솟고 있습니다. 기술의 윤리적 측면을 간과하다가 역풍을 맞은 IT 기업이 잇따라 나오면서 철학·윤리 전공자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는 중이죠. (중략) IT가 돈 되는 산업으로 성장하며 한때 인문학도는 찬밥 신세였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날 전미과학진흥협의회(AAAS) 연례 회의의 주제는 놀랍게도 ‘경계를 허무는 과학’이었습니다. 댄크스 교수의 말을 이어서 들어보죠. “몇년 전까지 IT 회사에 전화하면 받기는커녕 콜백도 안 왔습니다. 요즘은 먼저 전화가 오더군요. 철학 전공자를 급히 채용하고 싶으니 연결해달라는 요청입니다. 인문학자들의 몸값이 확 올라가는 느낌이랄까요.” 이어 댄크스 교수는 한 가지 단서를 달았습니다. “물론 IT 기초 지식은 갖춰야지요.”
그러니, 역사학을 전공했다고, 자신은 이공계 두뇌가 아니라고 미리 단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우리 시대 필수 교양으로 다가온 정보·과학·기술을 처음부터 외면해버린다면 스스로 자신의 가능성을 절반 이상 닫아버리는 일이 될 테니까요. 위 회의에 참석한 미국 스탠퍼드대 제니퍼 에버하트(심리학)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공지능·로봇·정체성 등등 이 세상의 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최대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다각도로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엉뚱한 방향으로 기술이 치우칠 위험이 있지요. (중략) 요즘은 전에 없이 온라인 교육도 활성화돼 있습니다. 인문학도가 과학 기술 기본 지식을 습득하기 훨씬 쉬워진 세상입니다!”
미국 최고 명문대 교수 역시 같은 취지의 발언을 내놓았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진취적인 방향으로 노력한다면 인문학도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라는 당부입니다. 그러면서 댄크스 교수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과학·기술 지식 습득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과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 아니냐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대학들도 AI 시대를 맞아 교육 개편에 나서고 있습니다. 에버하트 교수의 말대로 세계 유수의 대학의 최고 권위자들로부터 얼마든지 그 지식을 전달받을 수 있는 길도 열어 놓았습니다.
韓, 유학(儒學) 전공자도 SW 능력은 필수교양
예컨대 성균관대는 전공 수업에 외국 대학이 올린 ‘무크’(MOOC·온라인 공개 수업)를 지난 3월 신학기부터 시범 도입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수업에 앞서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의 온라인 강의를 듣고, 실제 수업 시간엔 해당 과목 현장 교수와 토론하는 것이죠. 소속 대학 강의만 강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란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학은 앞으로 전공과 상관없이 모든 학생들이 소프트웨어 능력을 갖추도록 만들겠다고 최근 밝혔습니다. 이미 3년 전부터 모든 학생이 ‘문제해결·알고리즘’ 및 ‘컴퓨팅 사고·SW 코딩’ 두 과목을 필수 교양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모든 전공 교육과정에 소프트웨어 관련 내용을 적용해 교수들이 강의할 때 이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습니다. 신동렬 총장은 최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재밌는 말도 했네요.
“유학(儒學)과에서도 소프트웨어 기술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대학에 정도전 관련 고서적이 166권 있는데, 그 내용을 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해 분석하면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자기가 연구한 내용을 전자책(E-Book)으로 발간할 때 하이퍼링크를 직접 삽입할 수도 있고요.” 첨단 기술과 거리가 가장 멀어 보이는 유학조차도 기술의 수혜를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대 흐름에 눈 감기보다 이를 적극 끌어안는다면 해당 학문을 더 풍성하게 가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 총장은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영어 강의 듣고 어학연수 갔다고 온다고 미국 아마존이나에 취업이 될까요? 이제 영어뿐 아니라 AI 기술을 활용할 줄 알아야 글로벌 시장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운운하는 대학들이 학생들에게 수천만원의 등록금을 받고도 기본적인 소프트웨어 능력조차 가르치지 않은 채 학생들을 사회로 내보내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한마디로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것이죠.
시차를 달래다
스타트업 종사자들 역시 주말을 잊고 데이터 사이언스와 알고리즘 강의 등을 수강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분들은 물론 사설 업체에 의지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현장 열기는 대단히 뜨겁습니다. 대부분 ‘문송’(?)한 분들이 모여 있다 보니 다소 움직임들이 느릿느릿한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컴퓨터공학 박사들의 논문이 아니니까요.
이른바 인문계를 졸업했다고, 그래서 자신은 기술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고, 이해받고 용서받을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위에서 보았듯, 국내외 유력 매체를 비롯해 최고의 기술 선진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미국의 유수 대학 교수들도 이를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깊이 알지 않아도 된다. 기초적인 지식만 있어도 된다.”
인문계 학생들은 과학기술과 인문학을 결합한 더 넓은 시야를 이공계 학생들보다 더 빠른 시간에 갖출 수 있습니다. 결국 의지와 노력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같은 말이 당장 취업이 급한 준비생에겐 희망에 부푼 연가로 들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장은 이렇듯 ‘융합형 인재’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구조로 급변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꼭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약간의 시차가 생기더라도 괜찮습니다.
필자 소개 : 레이먼드 권(Raymond Kwon) / 前 <한겨레신문> 기자, 어쩌다 <한국기자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는 콘텐츠 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스타트업 <카운터컬쳐>(Counter-culture) 커뮤니케이션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mail : raymond@counter-culture.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