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2] 스타트업이 ‘유관순’을 맞이하는 법
이념 지향을 논할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검토하고 있는 6개 종합일간지(경향, 동아, 조선, 중앙, 한겨레, 한국)는 올해 신년기획으로 모두 ‘3·1운동 100년’ · ‘임시정부 100년’을 다뤘습니다. 단 하나의 매체도 이 주제만큼은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었지만, 실제로 신문을 펼쳐 이를 직접 확인하는 것은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스타트업의 ‘해석전쟁’
물론 이 주제를 다루는 취지·방법·내용은 매체별로 편차를 보였습니다. 때문에 더 입체적으로 100년 전을 돌아볼 수 있었죠. 그렇다면 이제 관건은, 남겨진 자들의 가치판단과 적용일 것입니다. ‘1919년 3월1일, 민족 대표 33인을 포함한 시민과 학생들이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만세 운동을 벌였다’라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 ‘사실’이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에 어떤 ‘가치’를 전달해주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해석전쟁’ 말입니다.
‘창업가 = 역사학자(?)’
앞선 글 [연재를 시작하며 : 바보야, 문제는 ‘연결’이야]에서 저는 스타트업을 ‘주류 비즈니스의 틈새에 새 둥지를 트는 일’로 비유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스타트업 리더들의 최대 화두는 늘 이 질문으로 요약되곤 합니다. ‘어디에 어떻게 둥지를 틀 것인가?’ 이와 유사한 질문을 통과하지 않고 창업에 나선 이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디’는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는 방법론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창업가들은 마치 역사학자나 인류학자들처럼, 이같은 질문을 직접 자신에게 던지고, 그에 맞게 응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창업 과정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당신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보를 수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X축(시간)과 Y축(공간)으로 구성된 좌표평면(역사)에 하나씩 놓아봤겠죠. 이어 해당 점(정보)을 선(맥락)으로 연결(Connection)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의 곡선이 떠올랐는데, 그 곡선이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함수였다면, 당신은 ‘유레카’를 외쳤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함수를 끌어안고 울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바야흐로, 당신은 이 함수를 현실화할 Z축(방법론)을 궁리하면서 빠르게 3차원 현실로 진입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스타트업이 역사(인문학)와 무관하다’, ‘스타트업은 IT 천재들의 전유물이다’라는 속단은 하지 말도록 합시다. 역사는 일종의 의미망인데, 이를 조망할 능력이 없다면 새 둥지를 틀기도 전에 주류 비즈니스의 아류로 전락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어쩌면 비즈니스 창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역사가의 눈’은 해당 창업가가 어떤 분야를 공부했는지와는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니까요. 그러므로 ‘아, 올해가 3·1운동 100년이구나!’ · ‘임시정부 수립도 마찬가지구나’ 정도의 인식에만 머물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현실 비즈니스에 적용해 봅시다
예컨대, 만약 당신이 콘텐츠 스타트업에 몸담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사실상 IT 전문 업체들도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콘텐츠 기업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새 콘텐츠를 시장에 내놓을 때, 올해가 ‘역사의 해(年)’가 될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면, 당신의 콘텐츠에 3·1운동이나 임시정부 주역들에 대한 에피소드(or 코드)를 삽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콘텐츠가 상향 평준화한 시대에 우리가 애타게 찾는 차별화는 바로 이런 곳에서 생겨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네이티브’(이른바 1990년대생)가 역사에 관심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편견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잠재된 관심을 콘텐츠 생산자가 끌어내주기만 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구매 행위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것입니다. 나아가 자발적 마케터가 되어 새 연결망을 만들어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역사(특히 현대사)는 지금도 우리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만큼 이를 바라보는(해석하는) 시각도 첨예하게 엇갈립니다. 따라서 시대착오적인 해석을 당신의 콘텐츠에 담는다면 곧바로 도태될 것입니다. 반면 한걸음 훌쩍 나아간 ‘힙’한 해석을 가미한다면 당신은 해당 콘텐츠로 매출을 끌어올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당대의 ‘아젠다’를 ‘세팅’하는 오피니언 리더로도 도약할 수 있습니다.
# Ex 1. 여성 고객을 잡아라
3·1운동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가치’로 끌어올려 비즈니스에 적용해본다면 다음과 같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3·1운동=유관순=희생’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 곱씹어보면 이는 얼마간 낡은 인식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3·1운동을 ‘여성의 희생 서사’로 축소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근래 여성운동이 촉발한 거대한 인권운동은 ‘유관순’을 새 시대를 열어젖힌 근대적 주체로 호명하고 있습니다. 특출난 여성의 희생이 3·1운동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에 도도하게 흐르던 여성의 힘이 유관순을 기점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그런만큼, 이같은 코드(해석)를 당신의 콘텐츠에 은근하게 담아낸다면 그 폭발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입니다.
# Ex 2. 블록체인과 플랫폼 혁명
한가지 더. 우리 민족은 100년 전부터 그 어떤 중앙의 통제 없이도 자발적인 시민들의 결사만으로 거대한 항거 운동을 일궈냈습니다. 이같은 기운은 우리들의 ‘얼’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4·19혁명(1960年), 5·18광주(1980年), 6월 항쟁(1987年), 촛불(2017年)이 그랬습니다. 그러니 이를 되새김질해봅시다. 각자의 자리에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단자(單子)들이 자율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열망과 실력을 우리는 지난 100년간 꾸준히 확인해왔으니까요. 그 렇게 만들어낸 ‘신뢰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우리는 ‘블록체인’ 선진국으로 진화할 수 있었습니다. 플랫폼 혁명(Platform Revolution)에도 역시 능동적으로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탈중앙화를 위한 기본 정신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축적해왔기 때문입니다.
최소한의 생존술
한국의 유력 종합일간지 6곳이 모두 ‘3·1운동 100년’ · ‘임시정부 100년’을 신년기획 주제로 삼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100주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이 기획을 추진했던 것만도 아닙니다. 아젠다 세팅(Agenda Setting)에 늘 골몰하는 저널리스트들이 한 목소리로 ‘역사’를 올해의 키워드로 길어 올렸으니, 비즈니스 영역에서 이를 활용해보자는 것입니다. 당대의 맥락을 선점해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는 ‘추종자(Follower)’에만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리더(First Mover)’가 되고 싶다면, 달라져야 합니다. 비즈니스는 결코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성공의 열쇠도 ‘연결’로 넘어왔습니다. 그런만큼, 우리는 역사와 비즈니스의 역학을 더 세심하게 살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 스타트업의 최소한의 생존술이기 때문입니다.
필자 소개 : 레이먼드 권(Raymond Kwon) / 前 <한겨레신문> 기자, 어쩌다 <한국기자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는 콘텐츠 미디어 크리에이티브 스타트업 <카운터컬쳐>(Counter-culture) 커뮤니케이션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mail : raymond@counter-culture.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