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마지막 아침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언제였는지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날 아침을 떠올릴 것이다. 2025년 6월 15일, 디지털타워 37층에서 맞이한 새벽. 창밖으로는 테헤란로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고, 나는 평소처럼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창가에 서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날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자 첫 번째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새벽 다섯 시의 테헤란로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도 불이 꺼지지 않을 디지털파크가 어둠에 잠겨있었다. 검색 포털로 시작해 인공지능과 메타버스까지 아우르는 ‘모래시계’의 본사. 한국 IT 산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곳이라고들 했다. 그들의 매출이 10조를 넘어섰다는 뉴스가 며칠 전에 났었다. 우리 회사의 두 배.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거리는 조금씩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벤처플렉스에도 하나 둘 불이 켜졌다. 메신저 하나로 시작해 모빌리티, 결제, 쇼핑까지 아우르는 슈퍼앱으로 성장한 ‘레인보우’의 사옥이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그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우리의 경쟁자이자 롤모델. 하긴 이제는 그들도 우리를 경계한다고 들었다.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기댔다. 서늘한 감각이 밤새 쌓인 피로를 조금은 덜어주는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IPO 관련 서류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밤새도록 검토했지만 아직도 절반도 못 읽은 것 같았다. 투자자들은 회사의 기업가치를 5조 원 정도로 점치고 있었다. 내 지분 15%를 계산하면 7,500억. 스물아홉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숫자였다. 서른다섯의 나는 그저 피곤할 뿐이었다.
서랍을 열었다. 가장 아래칸,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2010년, 첫 사무실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일곱 명이 좁은 공간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맨 오른쪽에서 V자를 그리고 있는 건 현우였다. 당시 스타트업계에서 알아주는 개발자였던 그를 영입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자랑이자 후회였다. 지금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현우가 마지막이었다.
책상 위 달력이 6월 15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 6년 전 오늘, 현우는 회사를 떠났다. 시리즈 C 투자 유치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준서야, 이건 아니야. 너무 빨리 가려고 하는 거 아닐까?”
그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 내가 내린 선택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단기 성과를 위해 프로덕트의 방향을 바꾸고, 개발팀을 재편하고, 기술 부채는 나중으로 미뤘던 순간들. 매번 나는 ‘성장’이라는 단어로 자신을 설득했다. 우리는 이제 스타트업이 아니야. 실적을 내야 해. 가장 빠른 방법은 구조조정이고.
시리즈 A 투자를 받고 나서부터였을까. 나는 점점 차가워졌다. 매출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었다. 개발자들의 번아웃은 불가피한 것이라 여겼고, 성장이 둔화될 때마다 가차없이 팀을 갈아엎었다. 실리콘밸리의 독설가 VC처럼 되어가는 자신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CEO의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대표님, 곧 뉴욕타임즈 취재진이 도착합니다.”
커뮤니케이션 리드인 은선이 노크와 함께 들어왔다. 뉴욕타임즈는 나스닥 상장을 앞둔 우리 회사를 취재하러 온 것이다. ‘한국의 새로운 혁신가’라는 타이틀도 따라붙었다. 처음 그 기사를 봤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공허할 뿐이었다.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속의 내가 낯설어 보였다. 이것이 성공한 CEO의 모습인가. 형광등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깜빡임에서 무언가 이상했다.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아니,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거울 속에서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되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모든 것이 뒤로 달려갔다. 양복이 후드티로 바뀌고, 구두가 운동화로 변했다. 흰머리가 사라지고, 피곤한 눈빛이 젊은 반짝임으로 바뀌었다.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낯익은 화장실에 서 있었다. 삼성역 근처 오피스텔 7층, 우리의 첫 사무실이었다.
거울 속에는 스물아홉의 내가 서 있었다. 까만 후드티, 청바지, 그리고 초조한 눈빛. 2010년 6월 15일 오전 9시 27분. 현우를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휴대폰을 꺼냈다. 아이폰3GS.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면접 보러 왔습니다. 7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 강현우”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것이 꿈인가, 현실인가. 하지만 모든 게 너무나 선명했다. 화장실 타일의 차가운 감촉, 형광등의 희미한 윙윙거림, 멀리서 들려오는 키보드 소리까지.
물을 틀어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는 순간, 이것이 현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2025년의 기억을 안고 2010년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번에는…”
거울 속의 젊은 얼굴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르게 해보자.”
문을 열었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젊은 남자. 노트북을 품에 안고 서 있는 뒷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15년 만에 보는 현우였다.
시간은 거꾸로 흘렀지만, 기억은 그대로였다. 6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 그리고 더 먼 과거, 처음 이 사무실에서 만났던 순간의 기억이 겹쳐졌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발걸음을 옮겼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진짜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강현우 씨.”
현우가 고개를 돌렸다. 15년 전의, 아니 방금 전의 그 표정 그대로였다. 이번에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