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때로 이 세상의 변화 속도에 현기증을 느낀다. 오늘의 미래가 내일의 과거가 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현기증은 더욱 심해진다. 이커머스 시장이 그렇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인터넷에서 물건을 사는 일이 생소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아침에 주문한 신선식품이 저녁 식탁에 오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 속도의 중심에서 네이버와 컬리가 만났다.
네이버와 신선 식품 이커머스 업체 컬리가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다. 18일 양사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 안에 네이버플러스 스토어에 컬리가 입점하게 된다. 네이버플러스 스토어는 네이버가 지난달 출시한 쇼핑 애플리케이션으로,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해 주는 온라인 오픈마켓 서비스를 제공한다.
최수연 네이버 대표는 “신선식품 분야의 독보적 큐레이션 역량을 갖춘 컬리와의 파트너십으로 네이버 쇼핑 생태계가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며 “이용자의 쇼핑 경험 고도화와 혜택 강화에 초점을 두고 협업 서비스를 구체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김슬아 컬리 대표도 “컬리와 네이버는 다른 플랫폼이 쉽게 따라올 수 없는 각 사만의 명확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어 최적의 협업 파트너”라며 “이번 양사의 업무 제휴를 기점으로 더 많은 고객들이 좋은 상품과 우수한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화답했다.
신선식품은 이제 이커머스의 핵심 전장이 되었다. 배송 서비스가 고도화하면서 온라인에서 신선 식품의 중요도는 급격히 커지고 있다. 국내 온라인 신선 식품 시장은 2020년 21조원에서 올해 36조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이는 우리의 식탁이,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다.
이 시장에서 국내 신선 식품 분야의 강자로는 쿠팡과 컬리, 오아시스가 꼽힌다. 이 중 네이버가 컬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네이버는 현재 이커머스 업계 1위 쿠팡과 온라인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또 다른 업체인 오아시스는 티몬을 인수하며 자체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특히 컬리는 신선 식품 중에서도 프리미엄을 취급하는 점이 특징이다. 단순히 많은 상품을 판매하기보다는 엄선한 좋은 제품을 선별해 제공한다는 것이 컬리의 브랜드 정체성이다. 네이버는 이러한 컬리와 ‘반쿠팡 연대’를 꾸려 초저가와 가성비를 내세운 쿠팡에 대항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번 발표는 그동안 시장에서 꾸준히 제기되던 네이버의 컬리 지분 인수 가능성과 연관지어 주목받고 있다.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네이버는 컬리 구주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초기 투자자가 보유한 컬리 지분 약 10%를 확보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컬리의 최대 주주는 홍콩계 사모펀드(PEF) 운용사 앵커에쿼티파트너스로, 지분 13.49%를 보유하고 있다. 창업자인 김슬아 대표가 보유한 지분은 5.69%에 불과하다. 네이버가 지분 10% 가량을 인수하면 김슬아 대표를 단숨에 제치게 된다.
특히 앵커에쿼티파트너스가 2023년 마지막 투자를 단행할 때 컬리 기업 가치를 2조9,000억원으로 매겼지만, 기업공개(IPO)가 미뤄지면서 몸값이 크게 낮아졌다. 컬리는 최근 장외 시장에서 주당 1만5,000원에 자사주 매입을 추진한 바 있으며, 이를 토대로 기업 가치를 역산하면 6,335억원 수준이다. 컬리의 기업 가치가 낮아진 만큼 지분을 확보하기에 좋은 상황이라는 분석이다.
이번 제휴는 플랫폼 기업과 전문 커머스 기업 간 ‘보완적 동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네이버의 지난해 e커머스 부문 거래액은 50조원 규모로 쿠팡의 지난해 연간 거래액(55조원) 수준에 근접했다. 네이버 e커머스 부문은 오픈마켓 형태의 사업 구조로 매출이 수수료 기반으로 집계된다.
네이버는 이번 전략적 제휴로 최대 약점으로 지목되는 신선식품 부문을 강화하고, 컬리의 새벽배송 물류 시스템에도 올라탈 수 있다. 컬리는 자사 앱에 더해 네이버에서도 상품을 판매해 매출 확대를 꾀할 수 있다. 양사가 서로의 고객층을 유입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도 협업 효과가 클 것으로 전망된다.
프리미엄 식품 중심의 고객층, 검증된 새벽배송 인프라, 자체 브랜드 신뢰도를 갖춘 컬리는 네이버 이커머스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네이버는 압도적 트래픽과 검색 기반 쇼핑 경험, AI 추천 시스템으로 컬리의 사업 확장에 기여할 수 있다.
국내 이커머스 시장은 수년에 걸쳐 쿠팡의 ‘1강’ 체계로 굳어졌다. 지난해 쿠팡의 연간 매출은 41조2901억원으로 국내 백화점 소매판매액(40조6595억원)을 넘어섰을 정도다. 2015년 처음으로 연간 실적 1조원을 넘긴 뒤 9년 만에 덩치를 40배 키웠다.
알테쉬(알리익스프레스, 테무, 쉬인)로 대표되는 C커머스의 국내 시장 침투도 거세다. 이에 맞서 기존 이커머스 기업들은 하나둘씩 살길을 찾아 나섰다. 신세계그룹의 자회사 G마켓은 알리바바인터내셔널과 손잡고 5 대 5 합작법인을 설립하기로 했다. 토종 이커머스 11번가는 외형 성장보다 수익성 강화 전략을 택했다.
소비 침체가 장기화한 가운데 이커머스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기업들은 위기에 직면했다. 대표적인 기업이 티몬과 위메프다. 지난해 9월 기업회생 후 새로운 인수자가 나타났지만 이렇다 할 회복 방안은 제시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런 격변하는 시장 속에서 네이버와 컬리의 전략적 파트너십이 이커머스 생태계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그리고 쿠팡과 같은 주요 경쟁사들이 어떻게 대응할지 주목된다. 양사는 협업을 구체화해 새로운 협력안을 올해 안에 추가로 공개할 예정이다.
이커머스 시장의 다음 장을 열어갈 네이버와 컬리의 협업이 신선식품 배송의 판도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우리의 식탁은 또 어떻게 변화할지 기대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이커머스의 변화는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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