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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구름 위에

5월 8일 오후 6시 7분(로마시간) 백의 구름이 시스티나 성당 굴뚝에서 올라왔다. 거대한 인파가 성 베드로 광장에 모였다. 로마의 하늘은 맑았다. 흰 연기는 검푸른 하늘을 가로질러 올라갔다. 누군가 ‘하베무스 파팜’이라고 외쳤다. 우리에게 교황이 있다.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다. 미국 출신이다. 그는 베드로의 자리에 올랐다. 레오 14세라는 이름을 택했다. 레오 13세의 정신을 잇겠다는 뜻이다. 레오 13세는 인간 노동의 존엄을 말했다. 19세기 말, 산업화 시대에 노동자의 인권을 교회가 외쳤다. 그때의 외침이 다시 필요한 시대다.

콘클라베는 4번째 투표에서 결론을 내렸다. 추기경 133명 중 89명 이상이 그에게 손을 들었다. 투표용지가 불탔다. 검은 연기가 나왔다. 다시 투표했다. 또 검은 연기가 났다. 세 번째도 그랬다. 네 번째 투표에서 백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로마 사람들은 환호했다. 성 베드로 광장은 환희에 잠겼다.

로버트 프랜시스는 교황청 주교부 장관이었다. 바티칸 내에서도 개혁적인 인물로 알려졌다. 페루 빈민가에서 20년간 사목했다. 남미 민중의 땀과 눈물을 보았다. 그곳에서 그는 교리가 아닌 구원을 말했다. 교회는 화려한 성당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말이 아닌 몸으로 신앙을 행했다.

그의 나이는 69세다. 교황으로는 젊은 편이다. 건강하다. 아직 일할 날이 많다. 그는 철학에 해박하다. 신학에 조예가 깊다. 신앙의 근본을 알되,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는다. 전통과 혁신 사이의 균형을 안다. 그런 이가 교황이 됐다.

레오 14세 교황은 발코니에 섰다. 그의 첫 말은 평화였다. 군중은 침묵했다. 로마의 공기가 일순 맑아졌다.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그는 두 손을 들었다. 바티칸 전통의 흰 수단을 입었다. 흉패에는 십자가가 있었다. 교황 모자를 썼다. 그는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처음 민중 앞에 섰다.

가톨릭교회는 새 선장을 맞았다. 교회라는 배는 시대의 풍랑을 만났다. 인류의 믿음은 흔들렸다. 과학의 발전은 신앙의 영역을 위협했다. 물질주의의 범람은 영성을 약화시켰다. 그럼에도 구원을 향한 인간의 갈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 갈망 앞에 새 교황이 섰다.

레오 교황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닦은 길을 이어간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화려한 왕관을 버렸다. 소박한 삶을 살았다. 권위가 아닌 겸손으로 세상에 다가갔다. 화려한 마차 대신 작은 차를 탔다. 궁전이 아닌 소박한 방에 머물렀다. 그 뜻을 레오 교황이 이어간다.

미국과 유럽 사이의 간극을 메운다. 권위적인 바티칸이 아닌 겸손한 바티칸을 지향한다.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문제를 다룬다. 기계가 지배하는 시대에 인간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과학이 전능한 세상에서 신앙의 자리는 어디인가. 부의 양극화 시대에 교회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레오 교황이 답한다.

교황은 한국과 인연이 깊다.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총장 시절 세 차례 한국을 찾았다. 그는 한국 신자들의 열정을 보았다. 한국 교회의 성장을 목격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성장한 한국 교회에 경외감을 품었다. 2027년 서울의 세계청년대회를 이끈다. 그때 우리는 교황이 서울 거리를 거니는 모습을 볼 것이다. 인사동 골목에서 한복을 입은 소녀들과 만날지도 모른다. 광화문 광장에서 북을 치는 청년들을 만날지도 모른다.

한반도 화해도 그의 손에 달렸다. 교황의 방북 가능성이 점쳐진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녘 땅에 십자가가 선다. 남북의 어둠이 걷힌다. 가톨릭 2천년 역사에 새 장이 열린다. 최초의 미국 교황이 쓰는 이야기다.

인류 역사는 이어진다. 신앙의 강물도 흐른다. 기독교가 유럽을 넘어 새 대륙으로 건너갔다. 백인 남성이 교회를 이끌던 시대는 갔다. 이제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이 교회를 이끈다. 라틴 아메리카의 정신이 로마로 건너왔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목소리가 바티칸에 울린다. 세계화는 신앙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졌다.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은 다양했다. 백인, 흑인, 황인종, 혼혈.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환호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낯선 이름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프레보스트’라는 이름은 로마에서 처음 듣는 발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이름은 세계 가톨릭 신자 13억 명이 기억할 이름이 됐다.

백의 연기가 올라가는 그 하늘 아래서, 새 교황은 또 다른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그가 흰 두 손을 들어 축복했다. 그 손길이 로마를 넘어 세계로 뻗어갔다.

“이 평화의 메시지가 여러분의 마음 속으로 들어와 여러분의 가족과 어디에 있든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기자 / 제 눈에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연예인입니다. 그들의 오늘을 기록합니다. 가끔 해외 취재도 가고 서비스 리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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