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슨 황이 대만 타이베이의 컴퓨텍스 무대에 선 그 순간, 어쩐지 세상이 조금 더 빨라진 것 같았다. 그의 검은색 가죽 재킷은 여전했지만, 그가 품고 있는 미래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이 와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AI 슈퍼컴퓨터”라고 그들이 말하는 DGX Spark를 보았을 때의 기분은 묘했다. 1,000 AI TOPS라는 숫자 뒤로 펼쳐지는 상상의 나래. 이 작은 상자 하나가 우리의 책상 위에서 어떤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는 아직 그 기적의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에이서, 기가바이트, MSI. 익숙한 이름들이 갑자기 미래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들이 만드는 것은 더 이상 단순한 컴퓨터가 아니라, 꿈을 현실로 바꾸는 연금술사의 도구였다.
한편 DGX Station이라는 또 다른 괴물은 784GB의 일관된 메모리 공간을 품고 있었다. 숫자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 안에 무엇이 담길 수 있을까. 인류의 모든 지식?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디어들의 요람?
그런데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NVLink Fusion이었다. 엔비디아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개방한다는 것. 마치 작가가 자신의 문체를 다른 누군가와 나누는 것처럼, 위험하면서도 아름다운 일이다. GPU당 1.8TB/s. 이 속도로 무엇을 전송할 수 있을까. 사랑? 기억? 아니면 우리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어떤 감정의 조각들? 퀄컴, 후지쯔, 미디어텍, 마벨. 이 이름들이 하나로 묶이는 순간, 세상은 조금 더 연결된 곳이 되었다.
그리고 GR00T-Dreams. 이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웃음이 났다. 로봇이 꿈을 꾼다니. 한 장의 사진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이 기술을 보면서, 문득 소설가의 작업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장면에서 시작해 전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36시간 만에 업데이트된다는 GR00T N1.5. 인간은 평생을 걸쳐 배우는 것들을 로봇은 하루 반 만에 습득한다. 부럽다가도, 한편으로는 서글프다. 학습의 속도가 곧 진보의 척도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배워야 할까.
AeiRobot, Foxlink, Lightwheel, NEURA Robotics. 이 회사들의 이름을 듣고 있자니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팡파르 같았다. 이들이 만들어낼 로봇들이 우리의 일상에 스며드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어색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하늘 위에서는 DGX Cloud Lepton이 떠다니고 있었다. 구름 너머에 떠 있는 무한한 연산 능력. 전 세계의 GPU들이 하나의 거대한 두뇌를 이루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어딘가에서는 AI가 깨어 있어 무언가를 학습하고, 생각하고, 꿈꾸고 있을 것이다.
대만 최초의 AI 슈퍼컴퓨터 프로젝트에서 폭스콘과 TSMC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는 묘한 감동이 있었다. 하나의 섬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순간. 지정학적 긴장 속에서도 기술은 국경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간다. 젠슨 황이 말한 “피지컬 AI가 차세대 1조 달러 규모의 산업이 될 것”이라는 예언. 숫자는 크지만, 그 안에 담긴 꿈은 더 크다. 로봇이 우리 집에 들어와 함께 살게 될 그날. 그것이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아마도 그 중간 어딘가의, 평범하고 특별한 일상일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더 빠른 연산? 더 똑똑한 로봇? 아니면 단순히 더 편한 삶? 젠슨 황의 발표를 듣는 내내 느낀 것은 그가 파는 것이 기술이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점이었다. 마치 한 권의 소설이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듯이.
컴퓨텍스의 복도를 걸으며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표정이 흥미롭다. 어떤 이의 눈빛에는 흥분이, 어떤 이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어려 있다. 기술자들은 새로운 도구에 대한 갈증을, 투자자들은 다음 유니콘에 대한 기대를, 일반인들은 막연한 불안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같은 미래를 보고 있지만, 각자 다른 색깔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대만 정부 관계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이번 AI 슈퍼컴퓨터 프로젝트는 단순한 기술적 성취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작은 섬나라가 거대한 대륙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가는 방식. 반도체라는 언어로 세계와 대화하는 방법.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프트 파워가 아닐까.
엔비디아의 생태계 전략을 지켜보는 것은 한 편의 대서사시를 읽는 것과 같았다. 하드웨어에서 시작해 소프트웨어로, 클라우드로, 그리고 이제는 로보틱스까지. 마치 작가가 단편소설에서 시작해 연작소설을, 그리고 마침내 대하소설을 완성해가는 과정처럼. 각각의 요소들이 독립적이면서도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PCIe 5.0 대비 14배 빠른 속도라는 NVLink의 성능을 듣고 있자니 문득 언어의 진화를 떠올렸다. 인간이 몸짓에서 말로, 말에서 글로, 글에서 인터넷으로 소통의 속도를 높여온 것처럼, 기계들도 자신만의 언어를 완성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서로 주고받는 신호들 속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의미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Isaac GR00T N1.5가 물체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영상을 볼 때였다. 그 로봇의 움직임에는 인간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우아함이 있었다. 효율적이면서도 정확한, 그러나 어딘지 서툰 아름다움. 마치 외국어를 배우는 아이가 어색하지만 정성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모습처럼.
컴퓨텍스 2025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떠날 때, 전시장에는 미래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 미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아니, 애초에 미래를 맞이할 준비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어쩌면 중요한 것은 준비가 아니라 받아들임일지도 모른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변화 속에서 여전히 인간으로 남는 것. 엔비디아가 보여준 것은 기술의 진보였지만,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기술과 함께 살아가는 법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젠슨 황의 검은 가죽 재킷이 다시 생각났다. 수년 동안 변하지 않은 그 복장은 어쩌면 그의 철학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겉모습은 변하지 않지만 그 안의 내용은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기술도, 인간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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