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스타트업

노트북을 열고 세상과 마주하는 청년들의 시간

지하철 2호선 강남역 9번 출구를 나서면서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든다.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그저 학원가였는데, 이제는 테헤란 밸리, 또는 스타트업 밸리라는 별칭으로 불리운다. 카페마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화상회의를 하는 청년들, 벽에 붙인 포스트잇 위로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는 일행들, 그리고 ‘유니콘’, ‘스케일업’, ‘펀딩’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들려오는 대화 소음들이 있다. 어느새 이런 광경이 서울의 일상이 되었다. 스타트업블링크가 발표한 ‘글로벌 스타트업 생태계 지수 2025’를 보니, 서울이 전 세계 1,000개 도시 중 상위 20위권 안에 들었다고 한다. 아시아에서는 5위 안에 든다. 나쁘지 않은 성적표다. 하지만 숫자보다 흥미로운 건 그 이면의 이야기들이다.

서울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들여다보면 묘한 기시감이 든다. 마치 1990년대 초반 홍대 앞 인디 음악씬을 보는 것 같다. 기성 질서에 맞서는 젊은 에너지, 작은 공간에서 시작되는 큰 꿈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있다. 보고서를 보면 서울의 강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우선 정부의 지원이 남다르다. ‘팁스(TIPS)’, ‘K-유니콘 프로젝트’, 서울시의 ‘창업허브’ 같은 이름들이다. 영어 약자로 된 정책명들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글로벌’해지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다. 마치 K-팝 아이돌들이 데뷔와 동시에 빌보드를 겨냥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부 지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서울 시민들의 기술 수용성이 그것이다. 새로운 앱이 출시되면 하루 만에 수십만 명이 다운로드받고, 배달 음식을 시킬 때도 로봇이 문 앞까지 가져다주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서울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와 높은 스마트폰 보급률을 자랑한다. 새벽 2시에 치킨을 주문해도 30분 안에 받아볼 수 있고, 지하철에서 4K 영상을 끊김 없이 스트리밍할 수 있다. 이런 환경은 스타트업들에게 실험실이 되어준다. 성공의 속도도 빠르지만 실패의 속도는 더 빠르다.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의 스타트업들이 특히 강세를 보이는 분야는 게임,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핀테크, 인공지능, 바이오헬스케어, 그리고 최근에는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이 모든 것들이 ‘즉시성’과 관련이 있다.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는 사회의 욕망이 고스란히 반영된 셈이다. 최근 강남 한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만난 스타트업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성공하면 어디서든 성공할 수 있어요. 여기만큼 까다로운 소비자들은 없거든요.” 맞는 말이다. 한국 유저들은 앱을 설치한 지 3초 만에 판단을 내린다. 로딩이 조금만 늦어도, 디자인이 조금만 투박해도 가차 없이 삭제한다.

서울의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대기업의 존재다. 삼성, LG, 현대, SK라는 이름들이다. 이들 대기업은 오랫동안 한국 경제의 중심이었고, 스타트업들에게는 넘사벽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이 관계가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 보고서는 대기업과의 협력이 서울 생태계의 중요한 강점 중 하나라고 분석한다. 과거에는 거대한 장벽이었지만, 이제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협력 파트너가 되어가고 있다. 대기업들이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인수하고, 때로는 실패를 용인하기까지 한다.

네이버의 D2SF, 카카오벤처스, 한화투자증권의 한화시스템 등 대기업 계열 벤처캐피털들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돈만 투자하는 게 아니라 기술, 인프라, 고객까지 함께 제공한다.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든든한 백그라운드를 얻는 셈이다. 이런 변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결국 생존이라는 게 가장 강력한 동력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과거의 적을 동료로 만든다. 디지털 전환의 물결 앞에서 대기업도 스타트업의 민첩함을 필요로 하고, 스타트업도 대기업의 안정성을 원한다.

서울의 또 다른 강점은 인재다. 보고서는 한국의 높은 교육열과 이공계 중심의 탄탄한 인재 공급을 주요 경쟁력으로 꼽는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는 물론이고 KAIST, 포스텍 같은 공과대학들이 매년 우수한 개발자들을 배출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교육열이 때로는 발목을 잡기도 한다.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들이 안정적인 대기업이나 공무원을 선호하는 경향은 여전하다. 스타트업은 여전히 ‘리스크가 큰 선택’으로 여겨진다.

그래도 변화의 조짐은 곳곳에서 보인다. 몇 년 전부터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주요 대학들이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대폭 강화했다. 학점 대신 창업을 선택하는 학생들도 늘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경험을 쌓고 돌아온 한국인 개발자들이 서울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한편 K-콘텐츠의 글로벌 성공은 단순히 엔터테인먼트 산업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다. BTS, 블랙핑크, 봉준호, 윤여정 등의 성공은 한국이라는 브랜드 자체를 끌어올렸고, 한국의 스타트업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줬다.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한국 화장품을 주문하고, K-푸드 레시피 앱을 다운로드받는 외국인들이 있다. 이런 연쇄 반응은 한국 스타트업들이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때 중요한 교두보가 된다. ‘한국산’이라는 라벨이 더 이상 불리하지 않다. 오히려 호기심과 신뢰를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웹툰 플랫폼, 뷰티 테크, 푸드 테크 분야의 한국 스타트업들이 동남아시아와 북미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러나 과제도 만만치 않다. 보고서는 서울이 극복해야 할 문제들을 냉정하게 짚어낸다. 첫 번째는 글로벌 스케일업의 어려움이다. 국내에서는 성공했지만 해외 진출에 고전하는 스타트업들이 많다. 언어 장벽, 문화적 차이, 현지 네트워크 부족 등이 주요 원인이다. ‘본 글로벌(Born Global)’ 스타트업, 즉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하는 기업들을 더 많이 키워내야 한다는 숙제가 남아있다.

두 번째는 규제 환경이다. 핀테크, 모빌리티, 헬스케어 등 혁신적인 서비스들이 기존 법규에 발목을 잡히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규제 샌드박스 같은 제도가 있지만,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계속 제기된다.

세 번째는 민간 투자 생태계의 한계다. 정부 지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민간 중심의 자생적인 투자 생태계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 특히 후기 단계 투자, 즉 스케일업 펀딩을 유치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많은 스타트업들이 Series A나 B 단계에서 성장의 벽에 부딪힌다.

보고서에서 강조하는 또 다른 과제는 다양성이다. 해외 우수 인재 유치를 위한 환경 개선, 여성 창업가 지원, 다문화 배경의 창업가들을 위한 프로그램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서울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여전히 20-30대 남성 중심적이다. 물론 최근 들어 여성 창업가들과 외국인 창업가들의 활약이 늘고 있지만, 실리콘밸리나 런던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다양성은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일 때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 혁신은 경계를 넘나들 때 일어난다.

요즘 서울의 스타트업들을 만나보면 참 재미있다. 누구나 ‘글로벌’을 말하고 ‘유니콘’을 꿈꾼다.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스타트업을 뜻하는 유니콘이라는 말이 이렇게 일상화된 것을 보면, 우리의 꿈이 얼마나 커졌는지 알 수 있다. 한국에도 이미 여러 유니콘 기업들이 있다. 쿠팡, 크래프톤, 비바리퍼블리카(토스), 위메프 등이다. 이들의 성공은 후배 창업가들에게 가능성을 보여주는 롤모델이 되고 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때로는 작은 꿈들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동네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앱, 할머니들도 쉽게 쓸 수 있는 서비스, 소외된 이웃을 위한 기술들이다. 최근 서울시가 진행하는 ‘리빙랩’ 프로젝트를 보면 이런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혁신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성수동의 한 소셜벤처 창업가는 이렇게 말했다. “유니콘도 좋지만, 저는 동네에서 필요한 회사가 되고 싶어요. 거창한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보다는, 우리 동네 어르신들이 더 편하게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

서울 밖에서도 흥미로운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스타트업블링크 보고서를 자세히 보면, 한국이 글로벌 15-20위권 국가가 된 것은 서울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부산, 대전, 판교, 수원, 인천이라는 이름들이 글로벌 순위 1,000위 안에 각자의 이름을 올리고 있다. 몇 달 전 부산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해운대 근처의 한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스타트업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 사람들은 아직도 우리를 ‘지방’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다르게 생각해요. 여기는 아시아 최대 항구고, 블록체인 특구예요. 서울에서 할 수 없는 걸 여기서 하고 있거든요.”

실제로 부산은 글로벌 순위 150-250위권에 안정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물류와 해양 산업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 기술, 영상 콘텐츠 산업까지다. 서울과는 완전히 다른 색깔의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대전은 또 어떤가. ‘과학 수도’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KAIST와 대덕연구개발특구를 중심으로 한 딥테크 생태계가 인상적이다. 글로벌 순위 200-300위권이지만, 기술의 깊이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연구소에서 나온 박사들이 창업하는 회사들을 보면, 서울의 빠른 속도와는 다른 묵직함이 있다.

판교는 어떨까. 성남이라는 이름보다는 ‘판교테크노밸리’로 더 유명한 이곳은 한국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글로벌 순위에서도 200-300위권에서 독립적인 클러스터로 인정받고 있다. 네이버, 카카오, NHN 같은 IT 대기업들과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풍경은 실리콘밸리를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각 도시마다 자신만의 특색을 찾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수원은 삼성전자의 본거지답게 전자·IT 분야에서, 인천은 국제공항과 항구를 끼고 글로벌 비즈니스와 바이오 분야에서, 포항은 POSTECH을 중심으로 한 첨단 과학기술에서 각각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포항에서 만난 한 바이오 스타트업 창업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서울에 있었다면 아마 핀테크나 커머스를 했을 거예요. 하지만 여기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바이오를 하게 됐고, POSTECH의 연구진들과 협업할 수 있었어요. 이게 지방의 장점 아닐까요?” 광주는 AI 특화 도시를 꿈꾸고 있고, 대구는 의료와 로봇에, 울산은 수소경제에 집중하고 있다. 각자 자신이 가진 산업적 DNA를 스타트업과 결합시키려는 노력들이다.

지방 도시들이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들도 만만치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투자다. 대부분의 벤처캐피털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투자를 받으려면 결국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인재 문제도 심각하다. 지방 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학생들이 대부분 서울로 향한다. 지방에 남아서 창업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다. 글로벌 네트워크 접근성도 떨어진다. 해외 투자자들이나 파트너들을 만나려면 결국 서울이나 해외로 나가야 한다.

하지만 변화의 조짐도 곳곳에서 보인다. 코로나19 이후 원격근무가 일상화되면서 지방에서도 충분히 글로벌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생활비는 서울보다 훨씬 저렴하고, 삶의 질은 오히려 더 좋을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역이주’하는 스타트업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제주도로 본사를 옮긴 IT 회사들, 강원도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창업가들의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보고서를 다시 들여다보면서 느끼는 건,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여전히 ‘미완’이라는 것이다. 서울도, 지방 도시들도 모두 완벽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이 많고,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하지만 이런 한계들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완벽한 생태계보다는 여전히 거칠고 불완전하지만, 그 안에 역동적인 에너지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역 근처 청파동의 한 낡은 건물에서 만난 스타트업 팀이 있었다. 사무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비좁고, 인테리어라고 할 것도 없는 공간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밝았다. “아직은 작지만, 5년 후에는 꼭 IPO를 하겠다”고 말하는 대표의 목소리에서 묘한 확신이 느껴졌다. 부산의 스타트업도, 대전의 연구소기업도, 판교의 IT 회사도 비슷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확신들이 모여서 한국을 글로벌 15-20위권의 스타트업 국가로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별적으로는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모이면 거대한 에너지가 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생태계의 힘이다. 서울의 스타트업들이 꿈꾸는 것들을 보면서, 결국 우리가 원하는 건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월급쟁이로 평생을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 좋은 아이디어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세상,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세상을 말한다. 그런 세상이 정말 올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서 노트북을 열고 세상과 마주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적이다.

결국 모든 위대한 변화는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서울 어딘가의 작은 사무실에서, 누군가 지금도 세상을 바꿀 꿈을 키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꿈들이 하나씩 현실이 될 때마다, 서울은 조금씩 더 나은 도시가 되어간다.

기자 / 제 눈에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연예인입니다. 그들의 오늘을 기록합니다. 가끔 해외 취재도 가고 서비스 리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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