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철에서 우연히 본 광고 하나가 계속 신경 쓰인다. ‘당신의 감정을 분석해드립니다’라는 카피와 함께 웃고 있는 직장인의 얼굴. 그런데 누가 내 감정을 분석한다는 거지? 그리고 왜? 며칠 후 또 다른 광고를 봤다. ‘AI가 찾아주는 당신만의 커리어 패스’. 이번엔 정장 입은 여성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광고들을 보며 드는 생각은, 과연 누구를 위한 분석이고 누구를 위한 패스일까 하는 것이다. 딜로이트가 최근 발표한 ‘2025 글로벌 인적자원 트렌드’ 보고서를 읽으며, 바로 이런 의문이 더욱 구체화됐다.
보고서가 그리는 미래는 놀랍다. 회사가 AI로 직원 개개인의 성격과 동기를 분석한다. 그리고 그에 맞춰 완벽한 맞춤형 업무 환경을 제공한다. 스포티파이가 음악 취향을 분석해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주듯이.
아마존은 이미 모든 직원에게 ‘AI 문화 코치’를 배정했다. 과거 성과 데이터를 학습해서 개별 조언을 해준다. 한 트레이딩 회사는 트레이더들의 심박수를 실시간 체크한다. 스트레스가 돈과 직결되니까. 결과는? 집중력 향상, 이직률 감소, 수익 증가.
모든 게 윈-윈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과연 누구를 위한 ‘개인화’일까?
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기업들은 경험 있는 인재를 원한다. 하지만 사회초년생들이 경험을 쌓을 기회는 사라지고 있다. AI가 신입사원의 일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로펌에서는 AI가 계약서 초안을 쓰고 판례를 검색한다. 신입 변호사들이 해야 할 일들이다. 그럼 신입들은 뭘 하나? 처음부터 복잡한 송무를 맡아야 한다. 자전거 보조바퀴 없이 바로 고속도로에 나서는 셈이다.
메드트로닉 같은 회사는 IT 인력의 절반을 학력 무관으로 채용한다. ‘잠재력’을 본다고 한다. 그런데 잠재력이란 게 뭘까? 결국 누군가의 주관적 판단 아닌가?
가장 흥미로운 건 관리자의 운명이다. 전 세계 조직의 20%가 2026년까지 중간 관리직을 절반 이상 줄일 계획이다. ‘언보싱’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왔다. 상사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중간 관리직 채용 공고가 42%나 줄었다. 그런데 정말 관리자가 필요 없어질까?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나타난다. AI가 관리 업무를 자동화할수록, 진짜 인간적인 리더십이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결국 관리자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변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웃긴 통계가 하나 있다. 최고인사책임자 중 자사의 성과 관리 시스템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고작 2%다. 그런데도 수십 년째 새로운 평가 시스템을 만들고, 실패하고, 또 바꾸기를 반복한다.
등급제를 없애보기도 하고, 동료 평가를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만족하지 않는다. 관리자는 평가하기 싫고, 직원은 평가받기 싫다. 그래도 평가는 해야 한다. 승진과 보상을 결정해야 하니까.
보고서는 ‘인적 성과 설계’라는 해법을 제시한다. 평가 방식만 바꾸는 게 아니라 업무 환경 전체를 인간의 성과에 맞게 설계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성과라는 게 과연 설계할 수 있는 대상인가 하는 것이다.
보고서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AI가 우리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 것이라는 낙관론이다. AI가 지루한 업무를 대신하면, 인간은 더 창의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30년 케인스도 비슷한 예언을 했다. 기술 발전으로 100년 후엔 주 15시간만 일하게 될 거라고. 하지만 2024년 현재 우리는 여전히 주 40시간 이상 일한다. 오히려 일의 강도는 더 세졌다.
개인용 컴퓨터가 나올 때도 종이 없는 사무실을 약속했다. 하지만 프린터 사용량은 늘어났다. 이메일이 나올 때도 업무가 간소해질 거라고 했다. 하지만 소통의 부담만 커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기술적 약속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무조건적인 거부보다는, 이 기술들을 우리 방식으로 길들이는 방법을 찾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까.
보고서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직원 동기 분석이다. 32%는 ‘생계를 위해’, 25%는 ‘목적의식 때문에’, 18%는 ‘일 자체가 즐거워서’ 일한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의 동기가 이렇게 딱 떨어질까? 같은 사람도 월요일과 금요일이 다르고, 월급날 전후가 다르다. 설문에서는 ‘목적의식’이라고 답했지만, 실제로는 ‘돈’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데이터가 완전히 무의미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숫자들 뒤에 숨은 진짜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만 나온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인간관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맥라렌 레이싱팀이 포뮬러 원에서 우승한 비결은 첨단 기술만이 아니었다. “팀원의 복지가 차량 성능만큼 중요하다”는 철학이 있었다. 생산직 직원과 레이싱 팀에게 똑같이 의료진과 상담사를 제공했다.
구글의 ’80/20 룰’도 마찬가지다. 직원들이 업무시간의 20%를 개인 관심사에 쓸 수 있게 한 건 정교한 관리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의 자율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메일이나 구글뉴스가 나올 수 있었다.
이런 사례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건, 기술과 인간성이 대립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기술이 발전할수록 진짜 인간다운 가치들이 더욱 중요해진다.
그렇다면 개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몇 가지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
첫째, 회사의 AI 도구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적극적으로 활용해보자. 그 과정에서 무엇이 도움이 되고 무엇이 방해가 되는지 직접 판단할 수 있다.
둘째, 동료들과의 관계에 더 신경을 쓰자.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여전히 사람들 간의 대화에서 나온다.
셋째, 평생학습의 자세를 유지하되, 단순히 기술적 스킬만 쫓지 말자. 오히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들 – 공감, 창의, 윤리적 판단 – 에 더 집중하는 게 현명하다.
딜로이트 보고서는 흥미로운 미래를 그린다. 하지만 그 미래가 과연 우리가 원하는 모습인지는 의문이다. 회사가 우리를 더 잘 이해하려 할 때, 그 진짜 이유가 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다고 변화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그 변화의 방향을 누가 결정하느냐다. 기술은 중립적이다. 하지만 그 기술을 사용하는 방식은 중립이 아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는 정말 더 나은 일터를 원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회사가 우리를 좀 내버려두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어쩌면 진짜 문제는 회사가 우리를 너무 이해하려 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우리가 뭘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혼란스러움 자체가,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 아닐까.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