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가문의 무대
라스베이거스 베네치안 호텔에서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3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 상당수는 오렌지색 옷을 입고 있었다. 비트코인의 상징색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비트코인 컨퍼런스 ‘비트코인 2025(BITCOIN 2025)’였다.
비트코인 컨퍼런스라고 했지만, 사실 이날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트럼프 가문이었다. JD 밴스 부통령이 현직 미국 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비트코인 컨퍼런스에 섰고, 대통령의 두 아들이 기존 금융 질서에 선전포고를 했다.
밴스는 스테이블코인이 “우리 경제력의 승수 효과를 내는 힘”이라고 말했다. 복잡한 금융 용어였지만 요약하면 이런 뜻이었다: 달러는 죽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강해진다. 그는 비트코인을 “진정한 바닥에서 시작된 혁신”이라고 평가하며, 미국 내 비트코인 보유자가 현재 5천만 명에서 2배로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트럼프 정부가 비트코인 전략 비축을 선언하고 실크로드 창립자 로스 울브리히트를 사면한 것도 암호화폐 규제 완화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50만 달러어치 비트코인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했다. 정치인이 자신의 암호화폐 보유 현황을 공개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투명성이 미덕이었다.
그 다음에는 트럼프 형제의 차례였다. 에릭과 도널드 주니어. 테크노 음악 ‘샌드스톰’의 현악 밴드 연주가 끝나자 사토시 나카모토의 이름을 딴 무대에 올랐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비트코인을 만든 정체불명의 인물이다. 아직도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형제들이 암호화폐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개인적인 경험이 있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었을 때 그들 가족은 ‘디뱅킹(de-banking)’과 ‘디인슈어링(de-insuring)’을 당했다. 은행들이 정치적 이유로 그들의 계좌를 폐쇄하고 보험사들이 보험을 취소한 것이다. 이런 경험이 그들을 중앙집권적 금융 시스템의 대안으로서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로 이끌었다.
도널드 주니어는 전통적인 은행 시스템을 “일종의 폰지 사기”라고 비판했다. 금융 소비자들을 차별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가상 자산을 통한 “금융 민주화”를 주장했다.
에릭 트럼프는 만원인 홀에서 이렇게 말했다: “증오라는 단어를 쓰기 싫지만, 일부 대형 은행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싶다. 그들은 그럴 만하다.” 그는 은행들이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계좌를 폐쇄하는 것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며, 암호화폐 기반 금융 시스템의 보안성과 공정성을 강조했다.
도널드 주니어는 더 간결했다. “우리는 암호화폐에 매우 적극적이다. 이는 현재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큰 부분이다.” 그는 자신과 에릭이 아버지의 시각을 회의론에서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기술 지지로 바꾸는 데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암호화폐의 장점이 설명되자 그 잠재력을 빠르게 이해했다는 것이다.
형제는 비트코인 가격에 대해서도 대담한 예측을 내놨다. 도널드 주니어는 2026년까지 15만 달러에서 17만5000달러 사이의 가격을 예상했고, 에릭은 더 높은 목표를 제시하며 유명한 “달까지(the moon)”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이전에 비트코인이 100만 달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예측한 바 있다.
두 형제는 또한 미국 내 비트코인 채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국의 에너지와 시설을 활용해 이 산업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암호화폐 업계 라운드테이블에 참여하고 있으며, 가상 자산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리더들을 전통적인 정치인들과 대조하며 칭찬했다.
실제로 트럼프 가문은 지난 1년간 암호화폐 제국을 구축해왔다.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 USD1 스테이블코인, 그리고 트럼프 미디어 & 테크놀로지 그룹을 통한 25억 달러 규모의 비트코인 투자, 아메리칸 비트코인 상장, 그리고 수억 달러를 벌어들인 밈코인 ‘$TRUMP’. 마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 것 같았다.

스테이블코인의 부상과 정책적 변화
흥미롭게도 이번 컨퍼런스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비트코인이 아니라 스테이블코인이었다. 달러에 연동된 디지털 토큰. 이름부터 모순적이다. ‘안정적인 코인’이라니. 암호화폐의 가장 큰 매력이 변동성인데 말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스테이블코인을 사랑했다. 달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켜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시아 루미스 상원의원 같은 이들은 8월 전에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데이비드 삭스 백악관 암호화폐 차르는 재무장관과 상무장관에게 미국 정부의 비트코인 취득 방안을 찾아달라고 촉구했다. 한때 무정부주의자들의 놀이로 여겨졌던 것이 이제는 국가 전략이 되었다.
크리스 라시비타 트럼프 선거 캠페인 매니저는 컨퍼런스의 “수많은 친구들”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농담조로 트럼프가 졌다면 “범죄인 인도 조약이 없는 나라”를 찾아야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암호화폐 애호가들이 바이든 행정부와 “전쟁” 상태라고 여겼던 시절은 끝났다. 새로운 정부는 암호화폐 회사 조사들을 중단시켰고, 디지털 자산의 광범위한 채택을 추진하며, 정부 차원의 비트코인 보유를 추진하고 있다.
베네치안 운하 옆의 다양한 풍경들
마이클 세일러, 파올로 아르도이노, 블라드 테네프 같은 업계 거물들이 참석했다. 트럼프가 최근 사면한 실크로드 창립자 로스 울브리히트도 연사로 나섰다. 그의 감옥 물품들이 경매에 나왔고, 첫 번째 비트코인 매거진은 1만 달러에 팔렸다. 과거와 현재, 죄와 사면이 뒤섞인 장면이었다.
2만1000달러를 내고 ‘고래’ 자격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다른 세계가 열렸다. ‘더 딥’이라는 고래 전용 공간. 그곳에서 그들은 보 하인스 같은 트럼프의 젊은 고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루이비통 가방 추첨에 참여하며, 블루 오리진 로켓을 타고 우주로 가는 여행에 신청할 수 있었다. 현실과 가상, 지구와 우주의 경계가 흐려지는 곳이었다.
윙클보스 쌍둥이가 쿠션 깔린 카펫을 가로질러 이동하고, 오렌지색 비트코인 모자를 쓴 남성이 바텐더에게 잃어버린 신용카드를 물으며, 의회 의원들이 가짜 베네치안 운하 옆을 거니는 풍경. 제미나이는 오렌지색 테슬라 사이버트럭을 경품으로 내걸었다.
‘죽지 말자’ 투자자 브라이언 존슨부터 곤경에 처한 뉴욕시장 에릭 아담스까지. 온갖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치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온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같았다.
변화의 의미
작년 내슈빌에서 트럼프가 미국을 “비트코인 초강대국”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면, 올해는 그 약속이 어떻게 현실이 되는지 보여주는 무대였다.
컨퍼런스 기간 중 비트코인 가격은 11만 달러에서 10만4745달러로 떨어졌다. 5% 하락. 하지만 아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들에게 변동성은 일상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CBS, CNBC 같은 주류 언론들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때 인터넷 구석의 괴짜들 놀이로 여겨졌던 것이 이제는 국가 정책의 핵심 의제가 되었다.
16년 전, 정체불명의 사토시 나카모토가 기존 통화에 대한 불신으로 만들어낸 디지털 화폐. 처음에는 투기꾼들과 범죄자들이 좋아했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와 미국 대통령이 지지하는 자산이 되었다.
라스베이거스 사막에서 벌어진 이 3일간의 컨퍼런스는 그 변화의 속도와 규모를 실감하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모든 것을 바꿔놓는지 보여주는 증거 같았다.
오렌지색 모자를 쓴 사람들이 가짜 운하 옆에서 화폐의 미래를 논했다. 그것이 현실인지 사막의 신기루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그들이 진지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진지함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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