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이 한국에게 보내는 편지가 도착했다. 겉봉투에는 ‘환율보고서’라고 정중하게 적혀 있지만, 편지를 펼쳐보는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것은 연애편지가 아니라 절교장이라는 것을.
AI 정책 플랫폼 기업 코딧 부설 글로벌정책실증연구원이 10일 발간한 「2025년 미 환율보고서 분석과 통상 리스크 대비: 한국의 대응 전략」 이슈페이퍼는 이 ‘편지’의 진짜 의미를 해독한 보고서다. 그리고 그 해독 결과는 섬뜩하다. 미국이 한국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더 이상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그런 점잖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문서를 읽다 보면 묘한 기시감이 든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보내온 ‘공동생활 준수사항 안내문’을 받은 기분이랄까. 겉으로는 친절한 안내문이지만, 행간에는 암묵적 위협이 스며있다. 스콧 베센트라는 이름의 재무장관이 “불공정 환율 관행에 대해 모든 가용 수단을 동원한 강력한 대응”을 천명했을 때, 그것은 경제학자의 차가운 분석이 아니라 권투선수가 링에 오르기 전 내뱉는 으름장 같았다.
한국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관찰대상국’이라는 애매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미국의 3대 평가 기준을 살펴보면 그 이유가 명확해진다. 대미 무역수지 흑자 550억 달러(기준 150억 달러 초과), GDP 대비 5.3%의 경상수지 흑자(기준 3% 초과)로 두 항목에서 기준을 충족했다. 다행히 외환시장 순매수 개입은 GDP 대비 0.6%로 기준인 2%에는 미달했지만, 이미 관찰대상국 지정에는 충분했다. 이 숫자들은 언뜻 한국 경제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지표처럼 보이지만, 미국의 시각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마치 성적표에서 100점을 받았는데, 그것이 벌을 받는 이유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더욱 주목할 점은 미국이 향후 분석 대상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기존 중앙은행의 직접적인 외환시장 개입뿐만 아니라 자본이동조치(capital flow measures), 거시건전성조치(macroprudential measures), 연금펀드, 국부펀드 등 정부투자기관의 활동까지 ‘환율조작’의 범주에 포함시키겠다는 것이다. 2025년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명시된 이 방침은 사실상 한국 정부의 모든 금융정책 수단을 감시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이는 마치 축구 경기에서 갑자기 손을 쓰면 안 된다는 규칙을 발목도 포함한다고 바꾸는 것과 같다. 게임의 룰이 바뀌는 순간, 모든 플레이어는 다시 학습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진정한 위협은 관세와 환율을 하나의 통합 패키지로 운용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2019년 8월 중국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었을 때가 미중 무역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시점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번에도 7월 8일이라는 관세 협상 시한이 설정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날짜가 아니라 일종의 ‘데드라인’이다. 그 이후 어떤 조치가 뒤따를지는 2020년 스위스와 베트남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된 후 겪었던 후속 압박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상황을 수치로 보면 더욱 아이러니하다. 2016년 이후 23차례 환율보고서 중 21차례나 관찰대상국으로 지정되었다. 예외는 2023년 11월과 2024년 6월 단 두 차례뿐이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환율조작국이라는 낙인은 피해왔다. 이는 마치 교통위반을 반복하면서도 아직까지는 면허정지를 당하지 않은 운전자와 같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줄타기가 가능할까? 더욱이 이제 환율 문제가 ‘국가 안보’라는 프레임과 결합했다. 2025년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national security implications are self-evident”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경제 문제가 안보 문제가 되는 순간, 모든 대화의 성격이 바뀐다.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전쟁터가 되는 것이다.
코딧 연구원이 제시한 대응 전략들—통합적 전략 기획, 신통상질서 대응 역량 강화, 환율-안보 연계 리스크 관리, 제도적 기반 정비—은 모두 합리적이고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룰 기반의 게임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문제는 상대방이 룰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환율보고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문서는, 사실상 새로운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리고 이 게임에서는 경제적 합리성보다는 정치적 의도가 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명확하다. 이 새로운 게임의 룰을 빠르게 학습하고 적응하거나, 아니면 계속해서 구식 게임을 하다가 도태되거나. 환율보고서는 더 이상 경제 보고서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메시지’이고, ‘외교적 압박 도구’이며, 때로는 ‘선전포고문’이기도 하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이웃이 보내온 이 ‘안내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것이 앞으로 우리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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