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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T칼럼] 늘 계약서가 문제다

최근에 고객사로부터 저작권 관련 문의를 받았다. 저작권 관련 업무도 특허법인의 주요 업무 중에 하나다. 사실관계를 들어보니, 실제 사실관계는 조금 더 복잡하지만, 요는 시공사 발주처가 본인이 설계한 내용을 기반으로 자신과 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다른 업체에게 설계내용을 넘기면서 본인을 시공업무에서 배제했다는 내용이었다. 보통의 경우처럼 명시적인 도급계약서를 작성하거나 발주할 때 설계 내용에 대한 권리귀속을 명시했다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문제상황이 그러하듯이 업무에 익숙한 업체끼리 바쁘게 업무협의를 하고 내용을 주고 받다보면 계약서가 생략되는 경우가 예상보다 많은 것 같다.

설계도면이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저작권법이 보호하는 창작물이라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저작권법은 건축물과 건축을 위한 설계도면을 모두 저작물의 한 유형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저작권 인정여부의 핵심은 창작성이다. 설계자가 법규나 구조적 제약을 고려하면서도 남다른 형태·동선·재료 배합 같은 독자적 선택을 했다면 그 결과물은 저작권으로 보호된다. 반대로, 누구나 동일한 법규를 적용하면 비슷하게 나올 수밖에 없는 획일적 평면도나 구조계획이라면 보호받기 어렵다. 법원 역시 기능적 제약이 큰 설계라 하더라도 설계자의 창조적 개성이 형태나 배치, 디테일에서 드러나면 보호 대상이 된다고 판단해 왔다.

저작권이 성립한다면, 계약서가 없더라도 권리는 원칙적으로 설계자에게 귀속된다. 저작권은 창작과 동시에 자동 발생하기 때문이다. 발주처가 설계비를 일부 지급했더라도, 그 사실만으로 설계자가 권리를 넘겼다고 보지는 않는다. 설계자가 서면으로 명시적으로 양도하겠다고 약정하지 않았다면, 발주처가 얻는 권리는 통상 한 번 건물을 짓기 위한 제한적 사용권 정도에 머문다. 즉, 설계자를 배제한 채 다른 시공사에 도면을 넘겨 추가로 공사를 진행하면 무단 복제나 2차적저작물 작성에 해당할 수 있다. 실제로 대법원 2017다261981 사건에서는 발주처가 기본설계를 제공받은 뒤 제3의 건축사에게 실시설계를 맡겨 공사를 진행했는데, 법원은 “지붕 형태, 회랑 배치 등 독창적 표현이 실질적으로 동일하다”며 저작권 침해를 인정하고 발주처와 후임 건축사 모두에게 손해배상을 명령했다. 

손해배상 범위도 적지 않다. 저작권법은 고의적 침해가 인정되면 실제 손해액의 최대 세 배까지 배상을 명할 수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두고 있다. 입법 논의에 따르면 그 한도를 다섯 배로 높이자는 개정안도 올해 국회에 상정되어 있다. 설계자가 침해로 입은 직접적 손해를 산정하기 어렵다면, 법원은 통상 사용료(설계 허락에 대한 비용)나 침해자가 얻은 이익을 참작해 손해액을 정한다. 건축 규모가 크면 수억 원대 배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침해를 주장하려면 두 가지를 입증해야 한다. 먼저, 자신의 도면이 저작권법이 보호할 만한 창작물이라는 점이다. CAD 원본 파일, 버전 기록, 스케치 노트, 내부 검토 이메일 등을 통해 창작 과정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상대방이 도면에 접근했고 결과물이 실질적으로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접근 사실은 발주처가 도면을 직접 전달했다는 이메일이나 메신저 로그로 쉽게 증명될 수 있다. 유사성은 두 도면을 포개어 비교하거나 완공 건축물 사진과 원도면을 대조해 핵심 디자인 요소가 겹치는지 설명하면 된다.

설계 현장에서 자주 발생하는 또 다른 쟁점은 묵시적 이용허락인데, 설계를 의뢰한 건축주는 보통 해당 프로젝트 안에서 도면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묵시적 권리를 갖는다. 그런데 목적 범위를 넘어 도면을 재활용하거나, 발주처와 전혀 무관한 별도 부지에 그대로 복제하면 초과 이용이 될 수 있다. 법원은 이런 경우에도 저작권 침해를 인정해 왔다.

실무적으로는 분쟁 전 단계에서 내용증명을 통한 경고가 가장 현실적인 대응이다. 설계자는 도면의 저작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밝히고, 무단 사용을 중단할 것을 요구해야 하며, 손해배상이나 설계비 정산 등의 협의를 제시할 수 있다. 내용증명을 보내는 것으로 사건이 해결되진 않을 수 있지만, 상대방이 쉽게 모른 척하기도 어렵고, 특히 언론에 민감한 중견 이상 기업의 경우에는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협상이 결렬되면 민사소송을 통해 손해배상을 청구하거나, 형사 고소로 압박을 가하는 방법도 있다. 저작권 침해는 친고죄이므로 권리자의 고소가 있어야 수사기관이 움직인다. 고소장에는 침해 행위와 손해 규모, 고의성이 드러나는 증거를 최대한 상세히 기재할 필요가 있다.

이미 공사가 진행 중이라면, 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공사금지가처분도 이론상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인용률이 낮다. 이미 공정이 상당 부분 진행된 현장에서 공사를 멈추면 사회경제적 손실이 크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인데, 대신 법원은 손해배상으로 구제하는 편을 택한다. 다만 공사가 초기 단계이고 설계 변경 여지가 크다면 가처분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또 다른 옵션으로, 분쟁이 장기화되는 것이 부담되면 한국저작권위원회 조정 제도도 활용할 수도 있다. 위원회가 제시하는 타협안을 당사자들이 수락하면 법적 구속력을 갖는 조정조서가 작성된다. 비공개 절차라 기업 이미지 보호 측면에서도 이점이 있다.

한편, 국제적으로는 미국도 AWCPA(Architectural Works Copyright Protection Act)를 통해 건축물과 설계도면을 보호한다. 이 법에 따라 미국에 등록된 설계도면을 무단으로 시공하면 15만 달러까지 법정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일본 저작권법 역시 설계도서를 저작물로 인정하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창작성 판단 기준을 적용한다. 해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설계사는 현지 법제를 미리 점검해 두어야 불필요한 분쟁을 피할 수 있다.

설계사무소나 기업이 분쟁을 예방하려면 무엇보다 표준 설계용역 계약서를 잘 활용해야 한다. 설계용역계약 표준약관에는 설계도서의 저작권은 건축사에게 귀속되며, 건축주는 해당 공사를 제외하고 임의로 사용할 수 없다는 조항이 기본적으로 들어있다. 여기에 추가로 도면 사용 범위와 횟수, 2차적저작물 작성 금지, 대금 전액 지급 전에는 도면 사용을 제한한다는 조건, 및 위반 시 손해배상 기준 등을 명시해 두면 분쟁 가능성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디지털 시대에는 설계도면이 PDF, DWG, IFC 등 다양한 파일 포맷으로 오간다. 파일 내부 메타데이터에는 작성 날짜, 저자, 수정 이력, 레이어 구조가 거의 그대로 남는다. 프로젝트 관리 시스템이나 클라우드 스토리지에 올릴 때도 누가 언제 어떤 파일을 다운로드했는지 로그가 남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혹시 모를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이러한 로그는 법정에서 강력한 증거가 되므로, 설계자는 파일 관리 정책을 체계적으로 세워두는 편이 좋다. CAD 파일 이름에 버전과 날짜, 작성자 이니셜을 넣고, 중요한 단계마다 PDF를 출력해 전자서명과 타임스탬프를 찍어 두면 창작 시점을 명확히 입증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설계자의 권리 보호는 결국 업계 전반의 신뢰를 지키는 장치다. 도면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수십 번의 미팅, 수백 개의 옵션 검토가 반복된다.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창작 과정을 존중해야 건강한 파트너십이 지속될 수 있다. 발주처 입장에서도 원 설계자를 배제해 얻는 단기적 비용 절감은 결국 소송 내지 공사 지연 또는 브랜드 이미지 훼손이라는 장기적 비용으로 돌아올 수 있다. 더욱이, 스타트업이나 소규모 인테리어 사무소처럼 계약이나 법무 지원이 부족한 환경에서는 공인전자문서센터를 이용한 온라인 계약 시스템도 활용할 수 있다.

설계도면은 창작성만 인정되면 강력한 저작권 보호를 받는다. 계약서가 없더라도 권리는 기본적으로 설계자에게 있다. 발주처가 다른 업체와 공사를 진행하며 설계자를 배제하면 무단 복제 내지 2차적저작물 작성 및 성명표시권 침해 등을 동시에 저지르게 될 위험이 있다. 설계자는 내용증명, 조정, 민형사소송 등을 통해 권리를 지킬 수 있고, 상대방은 최대 손해의 세 배까지 배상해야 할 수도 있다. 반대로 발주처와 시공사는 설계 초기에 계약서를 제대로 작성하고 설계자의 동의를 얻어야만 안전할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계약서가 명확히 존재하면 쉽게 해결될 일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항상 계약서가 문제이자 해결방법이다.

원문 : 늘 계약서가 문제다

글 : 유철현 BLT 변리사 / 유 변리사는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직접 투자하는 ‘엑셀러레이터형’ BLT 특허법률사무소를 시작으로, IT와 BM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다양한 기술 기반 기업의 지식재산 및 사업 전략 컨설팅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심의위원과 한국엔젤투자협회  팁스(TIPs)프로그램 사업 심사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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