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실리콘밸리와 테헤란밸리가 중세 신학자들보다 인간을 잘 이해한 방법에 대하여

어느 날 인터넷에 밈 하나가 떠돌았다. ‘한국인의 7대 죄악’. 트위터는 분노, 페이스북은 교만, 인스타그램은 질투. 배달의민족은 폭식, 유튜브는 나태, 쿠팡은 탐욕, 야놀자는 색욕.
웃고 넘기기엔 너무 정확했다.
중세 신학자들이 수백 년에 걸쳐 정리한 인간 본성의 어두운 목록을, 21세기 플랫폼 기업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완벽하게 포착해낸 것이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이 신학자들보다 인간을 더 잘 이해한 걸까.
분노의 최적화
트위터(현 X)의 설계는 분노에 최적화되어 있다. 280자. 이 제한은 뉘앙스를 허락하지 않는다. 복잡한 생각은 단정으로 압축되고, 단정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분노를 낳는다.
애초에 140자였다. 2006년 출시 당시 SMS 문자 제한에 맞춘 설계다. 2017년에 280자로 늘었지만, 플랫폼의 문법은 이미 굳어진 뒤였다. 지금은 프리미엄 구독자에게 25,000자까지 허용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긴 글은 타임라인에서 외면받는다. 짧고 날카로운 문장이 리트윗되고, 뉘앙스 있는 글은 스크롤에 묻힌다. 돈을 내면 길게 쓸 수 있지만, 플랫폼은 여전히 짧은 분노에 보상을 준다.
리트윗 버튼은 이 분노를 증폭시키는 장치다. 동의든 분노든, 강한 감정이 실린 트윗일수록 더 빠르게 퍼진다. 알고리즘은 이를 학습했다. “사람들이 싸우면 체류 시간이 늘어난다.” 타임라인은 그렇게 전장이 되었다.
일론 머스크가 인수한 이후 상황은 더 악화됐다는 평가가 많지만, 사실 분노의 문법은 처음부터 플랫폼에 내장되어 있었다. 머스크는 발명한 게 아니라 뚜껑을 열었을 뿐이다.
거울과 창문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같은 회사 소속이지만 다른 죄악을 담당한다. 페이스북은 거울이고, 인스타그램은 창문이다.
페이스북에서 우리는 자신을 비춘다. 인생의 하이라이트만 골라 올린다. 승진, 결혼, 출산, 여행. 좋아요 숫자는 사회적 인정의 계량화다. “내 삶은 이 정도야”를 과시하는 교만의 무대.
인스타그램에서 우리는 타인을 들여다본다. 남들의 큐레이팅된 완벽한 삶을. 해변의 비키니, 루프탑의 칵테일, 미슐랭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 피드를 내릴수록 내 삶은 초라해진다. 이것이 질투의 창문이다.
메타(옛 페이스북)는 인간에게 거울과 창문을 동시에 쥐여줬다. 자신을 과시하면서 동시에 타인을 부러워하게 만드는, 꽤 잔인한 설계다.
마찰의 제거
배달의민족이 한 일은 단순하다. 음식과 나 사이의 마찰을 제거한 것이다.
예전에 야식을 먹으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다. 전단지를 찾고, 전화를 걸고, 더듬더듬 주소를 말하고, 현금을 준비해야 했다. 이 마찰들이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정말 시켜 먹을 만큼 배고픈가?”를 스스로 묻게 만드는.
배민은 이 모든 과정을 몇 번의 탭으로 압축했다. 이제 충동과 치킨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폭식의 합리화 비용이 0에 수렴한 것이다. 새벽 2시에 떡볶이를 주문하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건, 앱이 그 죄책감을 느낄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2025년 10월 기준, 배달의민족의 월간 사용자는 2,170만 명이다. 한국 성인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매달 이 앱을 연다는 뜻이다. 배달 앱 전체로 보면 2,705만 명. 전년 대비 4% 늘었다. 마찰이 사라진 자리에 습관이 들어섰다.
시간의 블랙홀
유튜브의 자동재생 기능을 설계한 사람은 인간의 나태를 완벽히 이해한 사람이다.
“한 편만 더.” 이 문장이 무한반복되는 구조. 영상이 끝나면 다음 영상이 몇초 후 자동으로 시작된다. 멈추려면 행동해야 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계속된다. 인간의 디폴트가 관성이라는 걸 알고 있는 설계다.
그리고 그 다음 영상은 무작위가 아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당신이 무엇을 봤는지, 얼마나 오래 봤는지, 어디서 멈췄는지를 전부 기억한다. 좋아요를 누른 영상, 끝까지 본 영상, 검색한 키워드. 이 데이터를 조합해 “이 사람이 클릭할 확률이 가장 높은 영상”을 계산해낸다. 알고리즘의 목표는 단 하나, 체류 시간 극대화. 조회수가 아니다. 당신이 플랫폼에 머무는 총 시간이다.
숏폼의 등장은 이를 더 가속화했다. 15초짜리 영상은 “그만 봐야지”라는 결심조차 무의미하게 만든다. 한 편이 뭐 대수냐고. 그렇게 30분이, 한 시간이, 하루 저녁이 사라진다.
통계청의 2024년 생활시간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하루 평균 미디어 이용 시간은 2시간 43분이다. 여가 시간 5시간 8분 중 절반 이상을 스크린 앞에서 보낸다는 뜻이다. 알고리즘은 당신의 취향을 당신보다 잘 안다. 그리고 그 앎을 당신의 시간을 빼앗는 데 쓴다. 인간의 나태와 기계의 정밀함이 만난 결과다.
즉각과 충동
쿠팡이 설계한 것은 탐욕의 고속도로다.
로켓배송은 욕망과 만족 사이의 시간을 극단적으로 압축했다. 오늘 주문하면 내일 온다. 아니, 새벽에 온다. 기다림이 사라지면 욕망은 절제되지 않는다. “며칠 기다리는 동안 다시 생각해보니 필요 없더라”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원클릭 결제는 충동과 후회 사이의 방벽을 허물었다. 예전에는 카드를 꺼내고, 번호를 입력하고, 비밀번호를 누르는 사이에 “정말 필요한가”를 자문할 시간이 있었다. 이제는 손가락 한 번이면 끝난다.
와우 멤버십은 여기에 죄책감 면제부를 더했다. 월 7,890원을 내면 무료배송이다. 이미 돈을 냈으니 더 주문해야 본전이라는 심리. 배송비 아끼려다 더 사게 되는 역설. 탐욕에 합리성의 외피를 씌운 것이다.
쿠팡의 슬로건 중 하나는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지?”다. 정직한 슬로건이다. 탐욕의 인프라가 완성되면, 그 이전의 삶은 상상하기 어려워진다.
프라이버시의 설계
야놀자에 색욕을 대응시킨 건, 솔직히 말하면 과거의 이미지가 남아 있어서일 것이다.
숙박 앱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떠올린 용도는 분명했다. 비대면 예약, 간편한 결제, 조용한 체크인. 프라이버시를 극대화한 이 UX가 어떤 수요에 봉사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물론 지금의 야놀자는 다르다. 호텔, 리조트, 펜션, 항공권, 레저 액티비티까지 아우르는 종합 여가 플랫폼이다. 기업가치 10조 원의 유니콘이 “그 이미지”에 머물러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밈은 정확히 그 지점을 찌른다. 플랫폼의 출발점이 어떤 욕망 위에 세워졌는지를. 성장하고 확장하고 세련되어져도, 창업의 문법은 어딘가에 남는다. 야놀자가 아무리 ‘놀자’를 강조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앱이 해결해준 최초의 마찰을 기억한다.
죄는 없고 구조만 있다
이 글을 쓰면서 계속 생각한 것이 있다. 이 플랫폼들이 죄악을 ‘만들었는가’, 아니면 ‘드러냈는가’.
답은 후자에 가깝다. 분노, 교만, 질투, 폭식, 나태, 탐욕, 색욕. 7대 죄악이라 불린 이 목록은 인간 본성에 이미 내장되어 있던 것들이다. 중세 신학자들이 이를 목록화한 건 8세기 무렵이다. 스마트폰이 발명되기 1300년 전이다.
플랫폼들이 한 일은 발명이 아니라 발굴이다. 인간 안에 이미 있던 욕망을 찾아내고, 그 욕망을 실현하는 데 따르는 마찰을 극단적으로 줄인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유니콘의 공식인지도 모른다. 가장 큰 시장은 항상 인간의 원초적 욕망 위에 세워진다. 그리고 승자는 그 욕망에 가장 빠르고 매끄러운 경로를 제공한 자다.
고해성사 없는 시대
중세의 7대 죄악에는 해법이 있었다. 고해성사. 죄를 인식하고, 고백하고, 용서받는 절차.
플랫폼 시대의 죄악에는 그런 장치가 없다. 아니, 죄악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다. 우리는 분노하면서 “공분”이라 부르고, 과시하면서 “기록”이라 부르고, 충동구매하면서 “셀프 선물”이라 부른다. 플랫폼은 죄책감을 느낄 틈을 주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스크린타임 알림이 뜨면 무시하고, 결제 내역이 오면 외면하고, 알고리즘이 제안하는 다음 영상을 또 클릭한다. 우리는 구조 안에서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그 자유는 설계된 자유다.
그래서 이 밈이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웃기지만 너무 정확해서. 우리가 매일 쓰는 앱들이 어떤 인간을 전제하고 만들어졌는지를, 한 장의 이미지가 폭로해버렸기 때문이다.
손가락은 이미 다음 앱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그게 어떤 죄악이든.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