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스토리텔링(1)] “소셜미디어는 커뮤니티의 기회다.”
커뮤니티스토리텔링(1) – 미디어의 변화와 커뮤니티의 운명
오늘부터 ‘커뮤니티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공동체는 수다를 통해 완성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다를 떨다보면 자연스럽게 규범도, 윤리도, 제도도 확립되어 자연스럽게 계승 발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반면 수다가 없는 공동체는? 대화 없는 가정을 상상하시면 될 겁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고 살아간다고 볼 수 있겠죠? 이 연재는 “공동체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누구와 어떤 수다를 어떻게 떨어야 하나?”에 관한 거라고 보셔도 됩니다. 많이들 읽어주시고, 의견남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세계적인 미디어학자인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란 인간의 확장(Media is the Extension of Man)”이라고 정의했다. 땅을 파야 한다면 삽, 굴삭기 등이 맨손을 확장하는 미디어이고, 달려야 한다면 자전거, 자동차, 기차 등이 맨발을 확장하는 미디어이며, 소리를 외치려 한다면 메가폰, 마이크와 앰프 등이 육성을 확장하는 미디어이고,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면 편지, 잡지, 신문, 방송 등이 웅변을 확장하는 미디어인 셈이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 기능을 확장하려고 애썼고, 그 결과 다양한 미디어를 만들어냈다. 그 중에서도 공동체와 관련해서는 ‘메시지를 지배하기 위한 미디어’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의 존속과 안녕을 위해서는 일정한 규범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이 규범을 확산하고, 교육하고,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메시지가 공동체 구석구석까지 미칠 수 있게 하는 미디어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미디어란 말도 바로 이 ‘메시지를 지배하기 위한 미디어’를 가리킨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공동체(Community)에 대해 간단하게 정의하자. 이 글에선 특정한 공동체를 제한적으로 쓰지는 않을 거다. 앞으로 언급할 공동체는 개념적으로 스펙트럼이 꽤 넓다. 부족이나 나라처럼 대규모의 공동체도 있고, 학회나 동호회처럼 소규모의 공동체도 있다. 사회참여와 봉사 같은 비영리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브랜드나 상품, 그리고 서비스를 중심으로 한 영리 공동체도 존재한다. 규모와 내용을 물론하고 일정한 정체성을 갖고 다른 무리와 구별되는 모든 무리를 공동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그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유지 또는 관리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스토리텔링을 이야기할 것이다.
‘의식(儀式)’과 ‘구전(口傳)’
공동체의 규모가 크지 않았을 때는 특별한 미디어가 필요치 않았다. 아니 뒤집어 생각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미디어가 없을 때 공동체의 규모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미디어라고 해봐야 일정한 ‘의식(儀式)’과 ‘구전(口傳)’, 그리고 눈에 보이는 ‘상징’이 전부였을 때, 공동체의 최대규모는 부족사회 정도였다.
당시에는 우리가 어떻게 시작됐고(곰이 백일간 마늘을 먹어 사람이 됐다는),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홍익사상 같은 모양으로)를 알려주는지를 이야기란 형태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됐을 것이고, 의식(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같은)이란 형태로 반복됐을 것이며, 상징(삼족오 같은)의 모습으로 공유됐을 것이다.
이들 미디어가 공동체의 메시지를 구석구석에까지 전달하면서 비로소 공동체의 정체성은 형성됐을 것이다. 공동체의 권력도, 그래서 제의를 관장하는 사람들에게 집중됐다. 부족공동체 대부분이 제정일치사회라는 건 제의를 관장하며 이야기를 발신하는 계층이 공동체를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문자의 등장
하지만 문자라는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구전에 의존하던 메시지가 ‘기록’되기 시작했고, 매우 ‘정확하게’ 메시지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메시지의 내용도 신화처럼 간단한 형태에서 벗어나 제법 복잡해질 수 있었고, 분야도 다양해질 수 있었다. 부족을 훨씬 뛰어넘는 ‘나라 공동체’가 등장한 것도 활자 미디어의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권력의 변화도 당연히 뒤따랐다. 제의와 이야기를 관장하던 그룹이 독점하던 공동체의 권력은 글을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로 나뉘었다. 이른바 학자 또는 관료 그룹이 등장했다. 당연히 제의와 정치도 분리됐다. 이른바 제정분리사회. 나라 공동체에서도 이런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과거 같은 제도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인쇄술과 잡지의 등장
인쇄술은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무한복제가 가능한 기술이 등장하면서 소수 엘리트에게 한정됐던 ‘해독력’은 계급을 초월해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활자를 지배했던 계층은 권력이 나뉘는 걸 지켜볼 수만은 없어 반발하기도 했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카톨릭의 위협을 무릅쓰고 독일어로 번역한 성서를 인쇄해서 배포한 건, 그래서 혁명이라 불러줄 만했다.
인쇄술 덕분에 ‘잡지’라는 미디어가 등장했다. 잡지는 인쇄술을 통해 메시지의 독과점이 허물어졌다는 신호탄이었다. 활자를 다룰 줄 아는 지식인이라면, 계급이나 지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세상을 향해 지속적인 메시지로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자체로 ‘대중화’라 말하기는 어렵다. 인쇄술로 무한복제가 가능해졌다지만, 활자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이른바 상류층으로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잡지를 중심으로 기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다종다양한 공동체들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념이나 철학, 기호와 새로운 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가 잡지를 촉매제 삼아 활발화게 조직되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구한말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잡지는 처음에는 주로 교회와 협회, 각종 단체 등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발행됐다가 뒤이어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동인지와 각종 문예지들이 속속 등장했다.
공동체가 있는 곳에는 늘 잡지가 있었다. 잡지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공동체의 정보를 공유했다. 잡지는 이를테면 공동체 구성원에게 산소와 에너지를 공급하는 ‘혈관’ 같은 존재였다. 내가 잡지를 ‘소셜미디어의 원형’으로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라디오의 등장과 대중매체 시대
한편 19세기 말 라디오의 발명과 함께 비로소 대중매체, 즉 매스미디어 시대가 열린다. 전파를 타고 전달되는 소리는 굳이 활자 해독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계층은 물론이고 지식유무도 거의 상관이 없었다. 물론 초창기에는 단말기를 보유할 수 있는 사람이 제한적이었지만 그마저도 함께 모여 듣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매스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동일한 메시지가 지위고하와 유무식을 불문하고 동시에 전달될 수 있는 획기적인 공간이 만들어졌다.
대중의 눈과 귀는 활자보다는 훨씬 쉽게,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한 이 대중매체에 집중됐다. 옛날 같으면 건너건너 이야기로 전해 듣던지, 그도 아니면 활자를 해독하며 발신자의 뜻을 이해해야 했다면, 이제는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발신자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매체 환경이 바뀐 만큼 공동체의 주도권도 빠르게 재편됐다. 라디오로 시작된 대중매체의 시대는 텔레비전으로 꽃을 피웠다.
대중매체에 고정된 눈과 귀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자본과 권력도 함께 집중됐다. 공동체를 지배하고 싶은 권력과 자본은 대중매체를 장악하고 싶어 했고, 어느 정도 성공하기도 했다. 미디어를 장악해 메시지를 독점하고 싶었던 거다.
한편 대중매체의 출현은 공동체에겐 지독한 악재가 됐다. 저마다의 메시지로 저마다의 공동체를 꾸려가던 움직임이 위기에 봉착했다. 고작 잡지 미디어에 의존하던 공동체는 매스미디어의 압박을 이겨낼 수 없었다.공동체의 활기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사라지는 공동체도 속출했다. 운 좋게 대중매체의 조명이라도 받아야 그나마 활기를 띠는 정도가 됐다.
수평적 미디어, 인터넷의 등장
네트워크 기술이 발달하면서 기존 매스미디어와는 완전히 다른 수평적인 미디어, 인터넷이 등장했다.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별도의 ‘관문’이 있냐없냐에 있었다. 매스미디어는 송출하는 주체와 콘텐츠 생산자가 방송국이란 형태로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다. 대중은 매스미디어에 일률적으로 연결되어 수동적으로 콘텐츠를 소비할 수밖에 없다. 방송국이란 문지기가(작가든, 피디든) 선택한 콘텐츠가 아니면 미디어를 탈 수 없다. 따라서 그 방송국 하나만을 지배하면 메시지를 독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네트워크로 연결된 인터넷은 장악이나 독점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누구나 생산할 수 있고, 누구나 소비할 수 있다. 굳이 방송국이란 거간꾼을 거치지 않아도 생산자와 소비자간 직거래가 가능하다. 이런 수평적 네트워크 구조는 2000년대 초 P2P(Peer to Peer) 서비스를 통해 극명하게 표현됐다. 별도의 중앙 서버 없이도 각자의 컴퓨터 하드끼리 네트워크로 연결돼 음원 파일을 얼마든지 공유할 수 있었다. 매스미디어만 바라보고 있던 기존의 음악시장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결국 시장주도권을 내놓고야 말았다.
2000년대 초 대한민국의 콘텐츠 시장을 봐도 수평적 미디어의 힘이 어마어마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초고속 통신망과 함께 플래시애니메이션이라는 툴이 통용되면서 ‘마시마로’, ‘뿌까’, ‘우비소년’, ‘졸라맨’ 등의 새로운 캐릭터가 쏟아져나왔다.
본래 애니메이션은 최소 수십억원의 제작비가 필요하고, 또 방송에 반드시 걸려야 흥행할 수 있는 매우 ‘무거운’ 콘텐츠였지만 플래시란 툴이 보급되면서 혼자서 별도의 제작비 없이도 애니메이션 하나를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가벼워졌다. 특히 초고속 통신망 덕분에 수많은 이용자들이 손쉽게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쉽게 만들어지고, 쉽게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결과가 바로 ‘새로운 캐릭터’였다.
‘엽기적인 그녀’로 대표되는 인터넷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만 해도 소설가가 되려면 각 언론사나 문예지가 주최하는 신촌문예류에 응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문학계 원로로 구성된 심사위원의 선택을 받아야 비로소 대중과 소설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 환경은 그런 ‘관문’을 생략해버렸다. 인터넷에 접속한 대중은 어느 공모전 당선작인지를 따지지 않고, 그저 재밌는지 없는지만 따졌다. 그 결과 신춘문예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청소년 작가가 시대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책으로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되는가 하면, 영화로 제작돼 흥행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처럼 수평적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특정 계층이 더 이상 메시지를 독점할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굳이 특정한 계층에 속하지 않더라도, 특정 관문을 통과하지 않더라도, 특정 스펙을 쌓지 않더라도 원하는 메시지를 누구나 발신할 수 있고, 또 직접 수용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미디어가 민주화되면서 메시지 또한 민주화되었다고 할까?
개인의 눈부신 활약에 비해 공동체는 이 변화된 환경을 기회로 활용하는 데 썩 성공적이질 못했다. 기민하게 움직인 게 홈페이지를 만드는 정도였는데, 콘텐츠의 지속적인 생산과 관리 부담이라는 벽에 부딪혀 그것을 공동체의 미디어로 활용하는 데는 대부분 실패했다. 공동체에게 인터넷은 그저 낯선 환경이었다.
인터넷 포탈의 반동
최소한 한국 인터넷은 2000년대 중반을 거치며 수평적 미디어로서의 매력을 스스로 포기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소수 포탈 사이트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수평적이어야 할 인터넷환경은 다분히 수직적으로 변해갔다. 방송을 타지 않으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 것과 같이 포탈에 검색이나 노출되지 않으면 인터넷에서 없는 취급을 받았다.
더구나 포탈들은 음악, 영화, 쇼핑 등의 핵심 서비스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직접 콘텐츠를 생산하기도 하고, 기존 서비스에 브랜드를 빌려주는 형태로 수수료를 챙기기도 했다. 이처럼 포탈들이 다양한 인터넷 비즈니스 분야에 문어발식으로 개입하면서 각 분야에서 자생적으로 자라날 수 있는 새로운 서비스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당연히 활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 특정 포탈이 한국 인터넷을 장악한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앞서 소개한 2000년대 초반의 활기차고 발랄한 캐릭터와 신인 작가들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콘텐츠뿐만이 아니다. 1999년의 소리바다나 아이러브스쿨 같은, 세상사람들을 놀래킬 혁신적인 서비스도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수평적이었던 인터넷의 각종 기회와 활력들이 포탈 중심으로 수직화되면서 종적을 감춘 셈이다.
포탈이 지배하는 인터넷 공간에서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카페’ 정도를 만들어 운영하는 정도였다. 그나마 카페는 홈페이지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들락거렸다. 운영자가 부지런하면 꽤 활성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미디어로서는 한계가 분명했다. 공동체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자기의 메시지로 세상과 소통하는 데는 한계가 분명했다. 카페는 그래서 공동체의 미디어가 될 수 없었다.
소셜미디어와 공동체의 기회
하지만 새로운 기회가 공동체에 주어졌다. 2009년 11월에 아이폰이 우리나라에 비로소 상륙하면서, 새로운 수평미디어인 소셜미디어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소셜미디어가 기존의 인터넷과 다른 점이라면 콘텐츠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이란 것이다. 특히 소셜미디어가 확산되면서 웹환경 자체가 사람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전망하는 전문가도 많다. 단순히 새로운 서비스가 하나 등장한 게 아니라 웹문법 자체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훌륭한 콘텐츠’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며 정보를 뒤졌다면, 이제는 ‘친구가 추천하는 콘텐츠’를 함께 공유하며 수다를 떨기 위해 인터넷을 한다는 말이다.
앞서 수평적 미디어를 통해 메시지가 민주화됐다고 언급한 바 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기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콘텐츠 중심의 웹환경에서는 뜻하지 않은 장애요소도 만만찮았다. 우선 수많은 메시지가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메시지를 선별해내는 작업이 난해해졌고, 익명성에 숨어 악성루머와 악플 등이 기승을 부리며 인터넷 환경을 오염시켰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의 과도한 범람은 그래서 신디케이션 비즈니스를 잉태했고, 그 과정에 한국의 인터넷 대중은 포탈 중심의 수직 구조화를 선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중심으로 웹환경이 재편되면서 기존 웹이 가졌던 부작용은 상당부분 개선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 중심의 웹에선 콘텐츠 중심의 웹에선 존재하지 않던 ‘신뢰 네트워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신뢰라는 자산은 콘텐츠 선별에 들어가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절감시킬 것이고, 그만큼 생산적인 활동으로 유도할 가능성이 높다.
소셜미디어가 공동체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정한 조건이나 신념, 혹은 기호를 중심으로 신뢰 네트워크가 바로 공동체의 정체성이 될 텐데, 그것을 이뤄낼 수 있는 미디어가 바로 소셜미디어이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인쇄술에 기반한 잡지 미디어가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촉매역할을 했듯이 사람 중심의 소셜미디어도 다양한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훌륭한 촉매가 될 수 있다.
아울러 기존 인터넷 환경과 또 다른 점은 소셜미디어의 진입장벽이 현저하게 낮다는 것이다. 홈페이지의 경우에는 폼나는 콘텐츠를 생산하고 시스템을 유지보수 관리하는 이슈가 공동체에겐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반면 소셜미디어는 140자의 글, 사진 한 장만으로도 훌륭한 콘텐츠가 될 수 있다. 대중매체처럼 고도로 훈련 받아야 비로소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다. 맘만 먹으면 누구나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는 미디어다.
사실 자본과 첨단기술로 무장한 매스미디어가 지배하던 시절 공동체는 사실 속수무책이었다. 운 좋게 매스미디어에 노출되지 않으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던지, 근근히 연명하는 운명에서 벗어나기가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소셜미디어는 매스미디어 이전의 잡지미디어처럼 공동체가 구성원은 물론 세상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독자적인 매체를 만들어줄 수 있게 됐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수많은 공동체들이 아직까지 이 사실을 모르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거다. 누군가가 인용해서 유명해진 말을 한 번 패러디해본다.
“미디어는 이미 공동체에 와있다. 다만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