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스토리텔링(2)] “스토리텔링은 공동체의 핵심전략이다.”
공동체에게 미디어가 중요한 이유는 안으로 메시지를 구석구석 전파해야 하고, 밖으로 세상, 즉 다른 공동체와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공동체가 여느 생명체처럼 성장도 하고 유지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디어를 통해 전파하고 소통해야 할 공동체의 메시지는 어떤 것들일까? 다른 공동체와 구분되는 자기 공동체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구성원간 유대를 유지하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떤 메시지를 발신해야 할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씨족 및 부족사회는 일단 넘어가자. 기록을 통해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최고(最古)의 시대는 고대국가 정도인데, 모두 ‘신화’를 중요한 메시지로 삼았다. 서양에는 ‘그리스로마 신화’가, 중국에는 ‘삼황오제’가, 우리 민족은 ‘단군신화’가 그 출발 선상에 있다. 이처럼 공동체의 핵심 메시지는 다름 아닌 ‘이야기’였다.
공동체의 핵심 메시지는 ‘이야기’
문자와 기록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던 이 때는 주로 구전에 의존했다. 여러 단계의 입을 거쳐야 하니 메시지 전달을 위해서는 이야기가 단순해야 했다. 등장 인물의 캐릭터와 이야기 플롯은 거의 1차원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동체의 기원과 정체성,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규범)을 전파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가 잘 아는 단군신화를 살펴보자.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 중 일부분.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 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홍익인간[弘益人間])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면서 항상 신웅(환웅)에게 빌기를, “원컨대 (모습이) 변화하여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20개를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하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이것을 받아서 먹고 기(忌)하였는데 삼칠일(三七日 : 21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기하지 않아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항상 신단수 아래서 아이를 가지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고 그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당고(唐高, 요[堯])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칭하였다.
신화를 보면 고조선이란 공동체가 어디에서 왔고(하늘의 환인), 조상이 누구며(환웅과 곰), 그래서 어디에 있으며(평양을 도읍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홍익인간)에 관한 내용이 간단하지만 명확하게 담겨 있다. 공동체의 정체성과 규범이 담겨 있는 이 이야기는 의식과 구전을 통해 반복되며 공동체 구석구석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거다.
문자가 지배하던 시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신념을 기초로 한 종교공동체를 생각해보자. 이 땅의 모든 고등종교는 ‘경전’이라는 걸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성서, 이슬람의 코란, 불교의 불경 등 이미 수천년 전에 만들어진 텍스트들이다. 그런데 그 경전의 대부분이 역시 ‘이야기’다. 에세이도 아니고, 법령도 아니다. 설명하고 주석을 달아 가르치기(prescriptive) 보다는 상황을 그리고 장면을 펼쳐 묘사하는(descriptive)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경전에는 신화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누가 조상인지,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아울러 신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해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공동체는 이들 풍부한 서사를 바탕으로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복잡한 규범을 만들고 발전시킨다.
메시지를 전파하는 방식도 보다 정교해진다. 일정한 주기로 예배 같은 의식(또는 집회)을 반복하고 경전을 당대에 맞게 해설하는 설교, 설법, 강론 등의 프로그램을 배치한다. 종이 매체가 등장하면서는 주보, 월보, 소식지 등의 잡지를 발행해 소속감을 고취시킨다. 규모가 커지면 내부적으로 청년회, 학생회, 부인회, 주일학교, 속회 등의 소규모 공동체를 조직해 생활 구석구석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스토리텔링 통해 정체성과 규범 전파
현대사회에서도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공동체의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웬만한 공동체는 ‘설립자(또는 발기인)’과 ‘감동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10년사나 20년사 같은 기록물을 통해 최초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며, 정기적인 집회와 의식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공동체의 메시지를 환기시킨다. 어떤 단체는 슬로건을 비석에 새겨 세상에 알리기도 하고(로타리클럽의 ‘초아의 봉사’ 같이), 어떤 단체는 뱃지를 상시 착용해(라이온스클럽처럼) 소속감을 표시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그 핵심은 여전히 ‘이야기’다. 다음은 로타리클럽의 이야기 중 일부.
1905년 황폐해진 미국 사회, 특히 시카고의 상황을 심히 염려한 청년변호사 폴 해리스가 세 사람의 친구와 상의하여 2월 23일 첫번째 모임을 가진 것이 로타리클럽의 탄생(誕生)이다. 로타리라고 한 것은 회원 각자의 사무실에서 번갈아 돌아가며 집회를 가진 것에서 연유되었다. 이 클럽은 이후 꾸준히 성장 발전하여 현재 200개 이상 국가 및 자치령에 퍼져 33,979클럽에 회원수 122만여 명으로 크게 늘어났고, 이들 클럽을 멤버로 하여 국제로타리가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스토리텔링은 예나 지금이나 공동체 운영을 위한 핵심 전략이었다. 공동체는 이야기라는 친밀한 형태로 공동체의 정체성과 규범을 담아냈고, 그것을 다양한 형태로 확대재생산함으로써 공동체성을 유지하고 발전시켰다.
하지만 정작 ‘스토리텔링’이란 말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건 공동체 때문이 아니었다. 1995년 미국 콜로라도에서 ‘디지털스토리텔링페스티벌(DSF)’이 처음 개최됐는데, 이후로 스토리텔링이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대접’ 받기 시작한다. 비유하자면 공동체와 별개로 ‘단독샷’을 받기 시작한 거다.
당시는 인터넷이 막 시작될 때로 수평적인 네트워크와 다양한 프로그램(소프트웨어)들이 예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역동적인 스토리텔링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특히 수형도(樹型圖) 같은 위계적인 경로를 거치지 않고 그물망처럼 콘텐츠가 콘텐츠와 바로 연결되는 하이퍼텍스트 구조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줬고 IT와 함께 디지털콘텐츠산업, 즉 엔터테인먼트산업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스토리텔링은 도깨비 방망이?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흐름에 따라 스토리텔링이란 말이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된다. 이때 갓 출범한 DJ정부가 벤처와 함께 문화산업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당시 대한민국을 지배하던 문화산업 담론은 주로 쏘나타 수출효과였다. ‘쥐라기 공원’, ‘타이타닉’,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등의 영화 한편이 벌어들이는 수익이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품인 쏘나타 수천 대를 하는 것보다 더 효과가 크다는 식. 천연자원은 없지만 우수한 인력만큼은 자신 있었던 대한민국은 본격적으로 문화산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와 업계에서는 “기술은 있는데 스토리가 약하다”는 푸념이 파다했다. 수십년간 축적된 미국, 일본 등지의 애니메이션 하청 노하우와 디지털 관련 벤처 열풍이 몰아치면서 기술력은 세계 정상급에 근접했지만, 정작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내는 능력’이 일천해서 히트작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과 미국, 영국 등지로 사람들을 보내기도 하고 거기서 성공한 사람들을 초청해 콘퍼런스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스토리텔링은 자연스럽게 ‘돈 벌어주는 기술’로 인식된다. 심지어 정부는 ‘이야기산업’이란 말까지 직접 지어 부르며 거금을 들여 매년 이야기공모전을 개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대박 콘텐츠가 나와주면 경제적 파급효과는 자동차 수천대를 만드는 그 이상의 효과를 나타낼 거라고 주장한다. 이야기는 어느새 우리나라 경제를 일으키고 부를 가져다줄 도깨비 방망이나 주문(呪文)이 된 것이다.
이렇게 자리잡은 스토리텔링 담론은 콘텐츠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로 확산되었다. 기업은 브랜드 이미지와 마케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스토리텔링 기법을 도입한다고 한다. 교육계도 스토리텔링 기법을 도입해 학습효과를 드높인다고 한다. 광고계는 스토리텔링 기법을 도입해 소비자의 기억에 오래 남을 캠페인을 기획한다 하고, 지자체도 스토리텔링 기법을 활용해 지역관광 활성화에 나선다고 한다.
지난 수년간 기업이든 공공기관이든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할 때 ‘스토리텔링’은 이처럼 그럴 듯한 수식어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언제나 유동적이고 불투명했다. 각 분야에서 스토리텔링 기법이라고 불린 것들은 예전 방법론들과 내용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고, 새 기법을 도입해 실제 얼마나 효과를 거뒀는지도 입증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21세기 들어 스토리텔링이 국내외를 물론하고 크게 유행한 건 사실이지만, 그 실체는 여전히 모호한 상태다.
공동체의 스토리텔링 역수입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 했던가? 이 시기 공동체는 오히려 스토리텔링에서 멀어졌다. 스토리텔링이 본래 공동체가 만들어낸 핵심 생존전략이었지만, 스토리텔링이란 용어가 독자적인 개념으로 성장하며 공동체 본연의 스토리텔링은 완전히 다른 기준으로 재평가 받기에 이른다. 특히 ‘콘텐츠의 소재’로 얼마나 (경제적인) 가치가 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주체와 객체가 뒤바뀐 것이다.
2000년대 초 전세계를 풍미했던 영화가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였다. 이 두 영화는 공동체가 갖고 있던 신화와 설화가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를 낳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줬다. 사람들은 신화와 설화에 다시 주목했고, 우리 정부는 한국의 신화와 설화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우리문화원형의 디지털콘텐츠화 사업’ 같은 매머드 사업도 장기간 추진했다(9년간 635억원 투입). 이처럼 공동체의 이야기는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적인 효과를 측정 받기 위해 ‘동원’됐다.
그렇다고 공동체들이 마냥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니, 공동체들도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데 ‘본래 자기 것이었던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돈벌이로서의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가진 게 문제였다. 공동체가 자기네 정체성과 규범을 확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사업성을 높이기 위해, 홍보와 마케팅을 위해, 요컨대 대박과 성공을 위해 스토리텔링에 기웃대기 시작한 거였다.
작년에 한 기관에서 스토리텔링을 주제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사회적 기업을 육성하는 곳이었는데, 주최측은 “어떻게 스토리텔링해야 사업에 도움이 되는지”를 알려달라고 주문했다. 각자의 사업아이템에 맞춰서 어떤 이야기를 발굴하고, 그걸 어떻게 포장해서 전달해야 돈벌이에 도움이 되겠는가를 가르쳐 달라는 거였다.
지금 공동체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스토리텔링도 딱 이 정도다. 돈벌이든, 회원확장이든, 홍보마케팅이든 공동체의 특정 목적에 ‘써먹을 수 있는’ 테크닉 정도인 거다. 하지만 이 수준으로 공동체가 이뤄낼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돈벌이든, 회원확장이든, 홍보마케팅이든 이름 좋게 스토리텔링 기법 도입했다고 없던 성과가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은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다.
대신 공동체는 스토리텔링이 자기 것이란 걸 먼저 ‘자각’할 필요가 있다. 대박을 터트리는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우리의 스토리텔링’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탐구할 필요가 있다. 옛날 고대국가가 나라를 세우며 정체성을 만들고 규범을 세우기 위해 스토리텔링했던 것처럼, 공동체들도 어떤 도구적 목적이 아니라 바로 ‘자기 존재’를 위해 스토리텔링을 생각해야 한다. 디지털 기술과 돈벌이에 현혹돼 잠시 놓쳤던 스토리텔링의 주도권을 다시 공동체의 한복판에 가져다 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