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80%가 사라진다?
‘청진기가 사라진다’라는 제목의 책은 있어도 ‘의사가 사라진다’니 무슨 말일까?
지난해 의료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람이 있다. 전설적인 벤처투자자 비노드 코슬라(Vinod Khosla)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썬마이크로시스템즈(SUN Microsystems)의 공동창업자였고, 지금은 코슬라벤처스(Khosla Ventures)의 대표로 있는 그는 작년 1월 테크크런치(TechCrunch)에 기고한 ‘의사가 필요한가? 알고리듬이 필요한가?(Do We Need Doctors Or Algorithms?)‘라는 제목의 글에서 기술의 발전으로 앞으로 대부분의 의사가 닥터 알고리듬(Doctor Algorithm 또는 Dr. A)에게 자리를 내줘야 할 것이라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지난해 9월 락헬스(Rock Health)가 개최한 두 번째 헬스이노베이션서밋(Health Innovation Summit)에서도 계속됐는데, 비노드 코슬라는 와이어드(Wired)지 편집주간 토마스 고츠(Thomas Goetz)와의 기조연설 인터뷰에서 지금의 헬스케어는 마술(Witchcraft)과 같다며 기술이 80%의 의사를 대체할 것이라 말했다.
물론 비노드 코슬라의 도발적인 발언은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임상의과학자(Physician-Scientist)이자 포브스(Forbes) 기고가인 데이비드 셰이위츠(David Shaywitz)는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가 의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비노드 코슬라의 주장을 비판했고, 가정의학과 전문의 데이비드 리우(David Liu)는 알고리듬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며 최전선에서 생명을 구하는 의사를 무시하면 안된다고 경고했다. 또 <청진기가 사라진다(The Creative Destruction of Medicine)>의 저자 에릭 토폴(Eric Topol)은 기술을 통한 변화의 필요성에는 동의하나 80%의 의사가 대체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지금의 헬스케어 시스템에 파괴적 혁신(Distruptive Innovation)이 필요하고 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하지만 비노드 코슬라의 주장처럼 정말 80%의 의사가 기술로 대체될 수 있을까? 그의 주장은 근거없는 억측일까? 아니면 기술 이상주의자의 환상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13쪽에 달하는 그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주장이 다소 과장되게 들릴 수 있어도 ‘“포함된 20% 의사”: 기술 낙천주의자의 견해와 사색(“20% doctor included”: speculations & musings of a technology optimist)‘이라는 제목의 글은 다가오는 미래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준다.
예술 대 과학
비구조적 문제(Unstructured Problems)를 다루는 분야는 항상 예술과 과학에 대해 첨예한 논의를 벌여왔다. 복잡한 문제를 정의하고 인간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분야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요소를 포함한다. 컴퓨터 프로그래밍도 예외는 아니다. 프로그래머의 성서로 통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예술(The Art of Computer Programming)>의 저자 도널드 크누스(Donald Knuth)는 ‘예술로서의 컴퓨터 프로그래밍(Computer Programming as an Art)‘이라는 글을 통해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아름다움을 얘기했다. 컴퓨터과학의 대가이자 <맨먼스 미신(The Mythical Man-Month)>의 저자 프레더릭 브룩스(Frederick Brooks)도 컴퓨터과학자는 도구를 만드는 사람(Toolsmith)이 돼야 한다며 컴퓨터과학의 공학적 특성을 강조했다. ‘컴퓨터과학’이나 ‘사회과학’처럼 ‘과학’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학문은 과학이 아니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그렇다면 의학은 ‘과학’이란 단어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일까?
비노드 코슬라는 자신의 글에서 오늘날의 헬스케어가 “과학에 기반한 의학(Science of Medicine)”이기 보다 “관습에 기반한 의학(Practice of Medicine)”이라 말한다. 그는 2005년 마이애미 대학의 연구가 진행되기 전까지 100여년 간 관례에 따라 해열제가 처방되었다며, 의사는 보다 과학적이고 데이터 주도적(Data-driven)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노드 코슬라를 비판하는 데이비드 셰이위츠도 자신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의학은 ‘과학(Science)’ 보다 ‘과학주의(Scientism)’에 가깝다고 말한다. 의학이 과학과 예술의 조화라는 의견에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처럼 관습에 기반한 의학을 과학에 기반한 의학으로 바꾸려는 움직임도 계속되어 왔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를 통해 인간의 유전자 지도도 완성했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몸과 질병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지만 의학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여기서 비노드 코슬라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한다. 정보를 정리하고 기억하는 일은 인간보다 기계가 낫다는 것이다. 한 명의 환자를 진단하기 위해 의사가 알아야 할 정보의 양은 이미 한 사람이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새로운 연구 결과의 발표는 물론 디지털헬스의 발전으로 환자의 증상(Symptom)과 징후(Sign)에 대해 끊임없는 데이터가 생성된다. 게다가 인간이 갖는 인지 편향(Cognitive Bias)이나 최신 편향(Recency Bias)같은 오류는 과학적인 판단을 방해한다. 그래서 비노드 코슬라는 빅 데이터 기술을 포함한 데이터 과학이 매우 중요해 질 것이라 예측한다. 물론 데이터 과학이 예술보다 과학에 가까운 결과를 만들어 내야겠지만 말이다.
파괴적 의료혁신
의사의 잘못된 진단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한 해에 미국에서만 40,500명이 넘는다는 연구가 있다. 이 수치는 유방암으로 인한 사망률과 비슷하다. 미국의 의학연구소(Institute of Medicine)는 2000년 발표한 ‘인간이기에 실수를 한다(To Err is Human)‘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환자 안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2011년 발표한 보고서 ‘헬스 IT와 환자 안전(Health IT and Patient Safety)‘에서 기술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밝혔다. 하지만 정말 기술이 80%의 의사를 대체할 수 있을까?
<파괴적 의료혁신(The Innovator’s Prescription)>의 저자인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과 제이슨 황(Jason Hwang)은 헬스케어의 비용을 낮추고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파괴적 비즈니스모델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은 비즈니스모델을 솔루션숍(Solution Shops), 가치부가사업(Value-adding Process Business), 촉진네트워크(Facilitated User Networks) 등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고, 효율성을 높이기위해 여러가지 비즈니스모델이 혼재된 오늘날의 의료기관을 비즈니스모델에 따라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클레이튼 크리스텐슨과 제이슨 황의 정의에 따르면 인간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비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의학의 예술적 영역은 솔루션숍에 해당한다. 하지만 독감의 진단이나 혈액 투석처럼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표준화된 진단과 치료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는 것과 유사한 가치부가사업이 된다. 그리고 이 비즈니스모델에서 비노드 코슬라의 주장처럼 80%의 의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는 기술이 발전하면 의사는 물론 약사, 간호사, 보호자 등 의사 면허가 없는 사람들도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될 거라 확신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그의 고향인 인도처럼 의사의 수가 턱없이 부족한 나라에서 더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비노드 코슬라의 주장이 다소 과장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이미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퀀티파이드셀프(Quantified Self) 운동과 함께 중이염 진단을 위한 귓속 촬영은 물론 심전도(ECG) 측정 등 스마트 폰을 이용해 손쉽게 할 수 있는 검사가 늘었고, 인도처럼 의사의 진료를 받기 어려운 나라에서는 모바일 기기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퀴즈쇼 ‘제퍼디(Jeopardy)‘에서 우승을 거둔 IBM의 왓슨(Watson) 컴퓨터는 질병의 진단에 눈을 돌리고 있으며, 스마트 폰을 통해 생성되는 다양한 데이터도 질병의 치료와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미국 국방부 소속의 연방 약사(Federal Pharmacists)는 의사의 진단 이후 환자의 투약 일정을 조정하거나 필요한 검사를 처방하고 해석하는 등 의사의 역할을 일부 대신한다. 워싱턴 D.C.와 미국 18개 주에서는 석사학위 이상을 소지한 전문간호사(Nurse Practitioners)가 의사의 지시 없이 질환의 진단과 치료, 약의 처방을 할 수 있다. 미국의 CVS나 월그린(Walgreens) 같은 약국은 전문간호사를 두고 중이염처럼 일반적인 질환을 다루거나 예방접종, 간단한 검사 등을 할 수 있는 ‘리테일 클리닉(Retail Clinics)‘을 열고 있다. 심지어 스웨덴의 한 병원에서는 신장 투석 환자에게 혈액 투석 방법을 알려주고, 자신이 직접 혈액 투석을 하도록 해 비용을 반으로 줄이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모두 기술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의 몸과 질병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알게 되고, 질병의 진단과 치료가 표준화 될 수록 의사가 기존에 하던 일 중 많은 부분을 다른 의료종사자 또는 기계가 대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비노드 코슬라는 자신의 주장이 당장 현실화 될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 모든 변화가 작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일어날 것이라 얘기한다. 어떤 환자도 기계가 의사를 대신하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자리는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비노드 코슬라도 모든 의사가 사라진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변화를 위해 20%의 유능한 의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20%의 의사는 지금처럼 여전히 솔루션숍에 해당하는 진단과 치료를 할 것이다.
[Image Credits: Luke Fildes and JD Hanc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