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스 101」 시즌2로 보는 개미지옥 콘텐츠의 다섯 가지 공식
대통령에게는 열혈 팬클럽이 생기고, 아이돌은 선거 제도를 통해 데뷔한다. 세상이 뒤죽박죽 뒤엉킨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그냥 이 두 사건이 하나의 같은 공식을 통과해서 나온 결과물이라서 그렇다. 전혀 달라 보이는 두 세계가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돌아간다. 바로 ‘호감의 경제학’이다.
2013년 출간된 <호감이 전략을 이긴다>의 작가인 로히트 바르가바는 성공과 실패의 핵심 원인을 ‘호감’에서 찾았다. 아무리 사양적으로 완벽함을 갖추거나, 치밀한 전략을 세워도 대중의 호감을 얻지 못한 비즈니스와 사람은 성공하기가 힘들다는 주장이다. 그는 이 ‘당최 이유를 모르겠는 기이한 성공들’을 만들어내는 호감 경제학의 다섯 가지 원칙을 관련성, 이타성, 진실성, 단순성, 타이밍으로 꼽았다.
수많은 팬을 프로듀서로 취직시킨 <프로듀스101> 시즌 2의 인기를 이 다섯 가지 원칙에 근거해 이해해보았다.
1. 관련성 : 낯선 소년들을 ‘당신의 소년’이라고 호명한 순간, 나는 국프가 되었다.
로히트 바르가바가 말하는 관련성은 ‘사람이 무엇인가에 지금 당장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을 뜻한다. 나 혹은 나의 세계, 우리의 서비스로 무관심했던 타인을 초대하고, 쉽게 발 빼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유대 관계를 만드는 작업이다.
사실 <프로듀스 101>의 두 번째 시즌은 방영 전과 초기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여자 편보다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 ‘맨날 울기만 한다’ 등이 그 이유였다. (근거 없는 비난도 아니었다.) 의도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안준영 PD 마저 ‘여성 참가자에 비해 남성 참가자들은 독하질 못하다’는 발언을 해 한 차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총체적인 비호감 프로그램이 ‘욕하면서도 보는’ 길티 플레저 오락 거리가 된 시점은 첫 순위 발표식 이후다.
첫 순발식 마지막에 피라미드 모양으로 늘어선 소년들이 1등의 선창을 따라 ‘국민 프로듀서님들께 90도로 인사!’ 를 하는 순간,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너네 프로듀서야’와 ‘뭐지?, 이 뭔가를 얼떨결에 떠안은 기분은?’. 그리고 그 다음 주부터 금요일 밤이면 티비를 켜게 됐다. 투표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이 시즌 1 때부터 꾸준히 밀고 있는 ‘당신의 소년(소녀)에게 투표하세요’ 라는 구호는 의무감을 안겨준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순위 변동의 과정을 지켜보면서는, 한 표의 중요성을 대선 때만큼이나 생생하게 실감했다. 프로그램에 대한 호감이 개인 참가자에 대한 열렬한 지지에 앞서, 하나의 시스템 혹은 세계관 안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자각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일단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해놨으면, 그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간지럽고 사소한 재미들을 이것저것 쥐여주어야 한다. 이 ‘굳히기 과정’은 연습생 개개인에 대한 성장 서사를 만들어줌으로써 완성됐다. 국민 프로듀서들은 그들의 최애가 선사하는 잔재미에, 서울 도심 지하철 곳곳마다 ‘우리 애’를 알리는 광고판을 설치하며 화답했다. 관계가 깊어지는 과정에서 ‘입양(지지)’, ‘파양(지지 철회)’와 같은 기괴한 팬덤 문화도 생겼다. 호감 경제학의 나머지 네 요소는 대부분 이 ‘인물별 서사 만들기’와 관련이 있다.
2. 이타성 : 김종현과 김세정, ‘보살형 캐릭터’는 결국 이긴다
이기적인 세상에 살면서 ‘이타적인 대상에게 더 많은 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로히트 바르가바는 탐스슈즈, 파타고니아 등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있는 기업의 성장 사례를 들어 ‘이타적, 동정적 행동이 세상을 지배하는 방식’이라고 소개했다. 이타성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장기적인 경쟁(호감) 우위’를 점하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프로듀스 101> 제작진은 시즌 1부터 이 이타성을 활용해 눈에 띄는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 정확히는 연습생 몇에게서 그런 자질을 발견하고, 편집을 통해 그것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번에는 이미 한 차례 데뷔했던 아이돌 그룹 뉴이스트의 리더인 김종현이 그 주인공이 됐다. 초반엔 존재감이 강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그는 4화를 기점으로 순위가 급상승했다. 모델 출신이기에 음악, 댄스 자질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권현빈 연습생을 묵묵하게 도와준 모습이 꽤 길게 방송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눈에 띄게만 만들어 놓으면, 자잘한 세부 설정이나 홍보는 연륜 있는 국민 프로듀서들이 자발적으로 해주게 되어 있다. 그다음 주부터 김종현의 순위는 상승세를 탔고, 결국 두 번째 순위 발표식에서는 1등을 차지했다(1차 순발식에서는 8위). 같은 줄거리로 다른 팀의 리더를 맡았던 임영민 역시 27등에서 5등으로 깜짝 등장했다. 물론 본 인물이 가지고 있던 이타적 소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 두 캐릭터를 보면 시즌 1의 김세정 전 연습생(현 구구단 멤버)을 떠올리게 된다. 같은 작법 안에서 탄생한 보살형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시즌 1에서는 연기 지망생 출신인 김소혜 연습생을 챙기는 과정에서 ‘속 깊은 아재미 요정’ 이라는 김세정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 인기는 방송 막바지까지 이어져 김세정 연습생은 최종 순위 2위로 프로그램을 졸업했다. 아무리 끼 많은 경쟁자들이 치고 올라와도, 보살형 인물의 인기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1등은 아니어도 데뷔권 안에 이름을 올린다. 이타성으로 쌓아 올린 호감은 아주 오래,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3. 진실성 : 불편한 논란에 대처하는 태도
아직 어리고 활동 경험도 없는 소년들인만큼 논란도 잦았다. 프로그램은 논란을 먹고 승승장구했지만, 한 연습생의 장래를 위해 꼭 진압하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이때 활용된 원칙이 ‘진실성’이다.
로히트 바르가바가 정의한 진실성에서 중요한 건 ‘진실 그 자체’보다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수용하는 태도’다. 예상 밖의 솔직함을 보이는 순간, 호감은 급상승한다. 60년대 미국의 자동차 대여업체 이비스는 13년 동안이나 적자에 허덕였다. 경쟁사인 허츠는 2위인 아비스를 한참이나 따돌리고 렌터카 시장을 장악했다.이 때 아비스가 꺼낸 광고 카피가 ‘아비스는 2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열심히 노력합니다’다. 이들은 심지어 ‘우리가 허츠보다 손님이 적어서 기다리는 줄이 더 짧다’는 것을 내세우기도 했다. 경영진은 단점을 드러내는 구호에 거부감을 보였지만, 결국 4년 만에 아비스는 시장 점유율을 11%에서 35%로 높일 수 있었다. 그 어느 요소보다 효과적으로 호감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로히트는 이 진실성을 호감 경제학의 제 1 원칙으로 꼽는다.
<프로듀스101>은 논란을 일으킨 해당 연습생의 입을 통해 실수를 인정하고, 수습하게 했다. 가장 유명한 강다니엘 연습생의 SNS 사건 역시 프로그램 MC인 보아가 짧게 사건을 언급한 후, 강다니엘 본인이 실수를 인정하고 팬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담백하게 마무리했다. 시끌벅적한 쇼 속에서, 연습생들이 진실의 입을 열 기회는 고작해야 잠깐의 소감 발표 시간이다. 그 단상 위에서 수많은 연습생이 크고 작은 논란에 대해 사과하고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연습생들은 한결같이 ‘무덤덤’하고 ‘조숙한’ 수용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울거나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은 도리어 표를 깎아 먹는 짓이라는 걸 몇 번의 경험을 통해 학습한 듯했다.
가끔 스케치 장면에서 보여주는 연습생 개개인의 진실성이 호감을 자극하기도 했다. 3위라는 높은 순위를 기록해 논란이 있었던 윤지성은 ‘나 못생기고 나이 많은 거 안다. 나 때문에 보기 싫다는 사람도 있고 난리 났다. 상상 이상으로 욕을 먹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잘해야 한다’면서, 불편한 세간의 평을 다 받아들이면서도 씩씩한 태도를 보였다.
4. 단순성 : A반과 F반, 센터, 11명 데뷔, 한정된 활동 기간이라는 ‘틀’
미국의 테드(TED)의 모든 강연은 단순함을 바탕으로 한다. 누가 강단에 서든, 어떤 내용이든 최대 18분 까지만 말할 수 있다. 이 가이드라인은 몇 년이 지나도 고수되고 있다. 단순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신뢰감을 높인다. ‘축소’와 ‘단순함’은 애플의 오래된 디자인 원칙 중 하나이기도 하다.
<프로듀스101>에도 전 시즌에 이어 고수하고 있는 몇 가지 견고한 룰이 있다. 첫 순발식 전에는 실력에 따라 A-F 등급을 나누고, 그 이후부터는 전적으로 투표에 따라 순위가 갈린다. ‘센터’는 프로그램 내내 가장 중요한 자리다. 센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한 축이 된다. 데뷔는 11명으로 정해져 있으니, 무조건 내가 응원하는 연습생이 11위 안에 들 수 있도록 열심히 투표해야 한다. 데뷔조의 활동 기간은 6개월에서 1년으로 한정되어 있다. 시청자들은 이미 작년에 이 시스템을 한 번 경험했기 때문에 더 쉽고 자연스럽게 규칙 안에서 행동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단순성의 법칙을 흔드는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최종 데뷔자 11명 이외에 콘서트조를 추가로 선발할 수 있다는 소문, 최종회에서도 1인당 2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소문이 논란이 됐다. 경연 공정성의 근간을 흔드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원성이 빗발쳤고, 결국 엠넷 측은 입장을 철회했다.
이 단순성을 제일 지혜롭게 활용하는 인물은 박지훈이다. 처음부터 아이돌 만렙을 찍은 박지훈에게는 누가 나서서 별도의 서사를 만들어 줄 필요가 없었다. 그 자신이 시청자가 아이돌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귀신같이 알고, 부끄럼 없이 보여줄 줄 아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첫 음악 방송 무대를 마치고 박지훈은 ‘윙크’라고 불리며 인지도를 쌓아갔다. 그렇게 무대 위 눈짓 하나로 1위로 올라선 윙크는 ‘국민 프로듀서님들, 내 마음속에 저장!’이라는 유행어를 혼자 만들어왔다.
로히트는 호감이 가는 단순성의 원칙 세 가지를 ‘핵심 개념(사족 없이 명확한 개념만을 넣었는가)’, ‘높은 공유 가능성(쉽게 이해가 돼서 남에게 전하기도 쉬운 메시지인가)’, 자연 언어(어려운 학술적 어휘 말고, 쉬운 언어로 말하고 있는가)’로 꼽았다. 단순하지만 강렬한 카피를 뽑고 싶다면 이 세 가지 요소를 고려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내 마음속에 저장’은 이런 면에서 가히 천재적인 구호다.
5. 타이밍 : 최고의 타이밍은 메시지를 대중의 습관과 연결시킬 때 만들어진다
사실 <프로듀스101>과 같은 아이돌 멤버 선발 시스템은 일본에서 약 7, 8년 전에 먼저 시작됐다. 국내에서도 유명한 ‘에이케이비포티에이트(AKB48)’ 싱글 선발 총선거가 그 시초다. AKB48는 2009년부터 매년 한 번씩 팬들이 싱글 앨범에 참여하는 멤버를 투표로 선발한다. 선거 운동 기간에는 멤버 전원의 포스터가 지정된 장소에 부착되고 정견 방송 또한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니 한층 더 본격적이다.
몇 년 전 저 선거 방송에서 멤버와 팬이 함께 울고 웃는 것을 시청하며 ‘일본은 정말 희한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 아이돌 총선거 제도를 한국에서 흉내냈다면, 아마 지금처럼 존중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2009년엔 한국에서도 아이돌이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여전히 실력파 아티스트 – 꽃미남 아이돌 그룹 간 위계가 대중의 사고 안에 존재했다. 그러나 2017년엔 그런 걸 따지는 게 무의미해졌다. 음원 차트에서도 더 이상 아이돌과 아티스트를 따로 구분 짓지 않는다. 정치인과 기업인은 물론 평범한 개인도 팬덤을 거느리게 됐다. 모든 대상을 아이돌화해서 소비하는 시대. 이 흐름 속에서 <프로듀스101>의 등장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스마트폰을 통해 2~5분의 스낵 영상을 소비하고, 랭킹 시스템을 통해 최선의 것을 선택한다. 실시간으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며, 어떤 사람이나 제품의 팬이 되어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이 모든 것은 이제 대중에겐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인 행위가 됐다. 이 습관 위에 아기자기한 컨텐츠를 슬쩍 얹는다. 그런 방식으로 <프로듀스101>은 매 회 최적의 타이밍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오늘은 이 시끌벅적했던 프로그램의 마지막 화가 방영되는 날이다. 본인의 원픽도 꼭 데뷔조에 들길 바라며, 수고했던 모든 소년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모든 이미지 출처 = 엠넷 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