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9. 벤처캐피탈과 사주
대한민국 스타트업을 위한 어느 벤처투자자의 수줍은 고백
“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지난 주 미국을 다녀왔다.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탈에 있어 젖과 꿀이 흐르는 성지인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역시나 샌프란시스코는 추웠다. 한류로 인한 해풍은 항상 체감기온을 더 낮춘다. 감기에 심하게 걸렸다. 그것이 시차 및 나약해진 육체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 것 같다. 코도 막히고 머리가 멍멍한 가운데 하루종일 약기운에 헤롱헤롱. 그래서, 핑계아닌 핑계지만 이번 연재가 한주 쉬었다. 이점 우선 사과드린다.
2002년 초로 기억난다. 갑작스런 홍보팀 인사발령은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어느 악조건 속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보려고 노력했던 나였지만 그 충격이 쉽사리 사그러 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차에 같은 팀에 있었던 고병철 형님(현 KTB 네트워크 상무)께 찾아갔다.
“형님, 저 어떻게 해야 하나요? VC에서 커리어를 계속 쌓으려고 하는데 갑작스레 홍보팀이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돌아버리겠습니다”
“희우야! 사주나 한번 보러 갈까?”
“점 보러 가자구요?”
“점이 아니라 사주”
“그게 그거 아니에요?”
“점은 미신이지만 사주는 통계지”
“…”
그렇게 해서 강남역 교보생명 사거리에 위치한 K 역술원을 병철형님과 함께 찾았다. 역술원은 먼저 온 손님이 상담을 받고 있었다. 이윽고 내 차례다. 출생일시를 대니 K 역술인은 자신의 컴퓨터에서 자료를 찾기 시작한다. 우선 그 점에 놀랐다. 역술인이 고서적을 뒤적거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K 역술인은 그것을 이미 컴퓨터에 DB화 해놓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의 운세에 대해 몇가지 얘기한다. 듣고 있으니 그럴듯해 보인다. 본격적인 내 질문이 들어간다.
“제가 직장을 옮겨야 할까요?”
“아녀, 자넨 지금 옮기면 안돼. 앞으로 2년 동안 꾹 참고 회사 다녀. 지금 옮기면 금전적인 손실이 클꺼야.”
“무슨 말씀 이신지? 그리고 왜 하필 2년 동안이죠?”
“2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란 얘기야. 뭐 계속 공부할 것 같은데 아닌가?”
순간 양 팔둑에서 닭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실 역술원을 찾은 그날 아침에 한양대 경영대학원으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야간 대학원 코스웍을 마치기까지 2년 정도 소요되는데, 그걸 딱 맞춰서 K 역술인이 얘기해주니 소름이 끼칠 수 밖에.
“그럼 결혼은 언제 어떤 사람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백날 새로운 사람 만나봤자 소용없어. 기존에 만난 사람중에서 결혼하게 될거야”
난 그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정보회사에도 등록하고 아는 분들에게도 부탁해서 거의 매주에 한명씩 여자를 만났다. 100번이 넘는 소개팅을 했건만 결혼은 그로부터 3년이 흐른 2005년 4월, 예전부터 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을 같이 해왔던 한 여자와 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제가 하지 말아야 될 것이라던지…”
“자넨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걸 취미로 즐기는 건 괜찮어. 그런데 그걸 업으로는 삼지 마”
“왜요?”
“자네 사주와 맞지 않아”
그리고, 난 그 역술인에게 복비 5만원을 주고 나왔다. 첨단 기술과 새로운 서비스에 투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사주나 보러 다닌다고 무시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깐. 나도 내 의지대로 세상을 극복하며 살 수 있다고 너무나 자신하며 믿어왔으니깐. 그렇지만 세상은 내 의지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하여튼, 직장 선후배들의 충고와 K 역술인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난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난 직 후 7월 초 KTB에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미련 없이 홀로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비록 나를 삼고초려할 정도로 필요로 하는 내가 KTB에서 담당했던 포트폴리오 회사 ‘리얼미디어코리아’로 가기로 한 것이지만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고 5년 반을 근무한 첫 직장을 떠나는 결정을 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인터넷 관련 스타트업을 경험해서 향후 나도 창업해 보겠다는 거창한 꿈을 가지고 스타트업으로 옮겼다는 것은 생 거짓말이다. 난 KTB 홍보팀 업무에 싫증났고, 그 당시 한 달간 열렬히 좋아했던 여인에게 차여 상실감도 컸으며, 그냥 무작정 쉬고 싶었을 때 ‘리얼미디어코리아’가 나에게 다가왔을 뿐이었다. 물론 결과론적으로는 그때 스타트업에서의 경험이 현재 벤처캐피탈을 하는 나에겐 큰 자신이 된 것 만은 틀림 없다.
리얼미디어로 옮기고 두달 가까이 되었을 무렵 놀라운 소식이 날아 들었다. 닷컴버블의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큰 적자를 기록한 KTB가 구조조정을 실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 근무기간에 따라 최소 50백만원에서 억대의 명퇴금을 준 것이다. 쩝! 운도 지지리 복도 없는 놈. 두 세달만 더 버티다 리얼미디어로 옮겼으면 명퇴금도 받고 옮기는 것이데. 역시나 K 역술인의 말은 신통해. 내가 좀더 참고 견딜껄.
공부를 계속하고 가르치는 것을 하되 업으로 삼지 말라는 역술인의 말은 아직도 유효한지 모르겠다. 난 올초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모 대학교에서 재무관리 한 과목을 가르치고 있으며 스타트업을 위한 창업교육인 ‘쫄지마! 창업스쿨’도 운영하고 있다. 물론 그걸 업으로 삼지는 않고 있지만, 그리고 지금까진 역술인의 말이 틀린 게 없었지만, 앞으로의 삶은 역술인의 말에 얽메여 살고 싶지는 않다. 다 짜여진 각본대로 사는 것 같으니깐. 그런 인생은 별로 살만한 가치가 없는 거거든.
벤처캐피탈은 불활실성에 대한 투자다. 모든 것이 투자 당시 계획했던 각본대로 되면 얼마나 투자가 쉽고 편하겠는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어렵고 더 신나는 일인 것 같다.
사주는 통계다.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통계는 일정부분 정규분포 곡선을 따른다. 그러니, 다양한 삶의 DB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평균적인 삶의 모습을 예측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규분포곡선에서도 양 끝단(Outlier)이 존재한다. 아웃라이어는 평균적인 삶의 모습에서 보면 미쳤거나 천재이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벤처캐피탈이 평균에 속한 기업에만 투자한다면(벤처투자자의 예상대로 성장할 것 같은 비즈니스에 투자한다면) 그렇고 그런 비즈니스만 양산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혁신(Innovation)은 항상 아웃라이어에서 나왔다. 100개가 넘은 검색엔진 업체들이 난무했을 때 구글이 나왔고, 수 많은 SNS 업체들이 시장을 선점하고 있을 때 페이스북이 나왔다.
나도 그런 평균이 난무하는 통계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벗어나 아웃라이어로 살고 싶다. 사주는 사주일 뿐이다. 2002년 초 첫 출입 이후로 나는 사주나 점집은 일절 출입하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