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12. 창업자의 지적 정직함(Intellectual Honesty)
대한민국 스타트업을 위한 어느 벤처투자자의 수줍은 고백
“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2003년 8월, 리얼미디어코리아는 2002년 4월에 이어 다시 한번 코스닥 예비심사에서 보류 판정을 받았다. 투자사 KTB를 비롯한 대주주 및 임직원들의 실망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사실 한 달 전인 7월에 경영진 세명은 코스닥 보류 판정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강남 고속터미널 부근에 있는 메리어트 호텔에서 나(당시 CFO) 포함 3명의 경영진이 모였다. 시가 바 룸 안,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먼저 정대표가 한마디 한다.
“우리 이번에도 분위기가 좋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데 이쯤에서 코스닥 심사 자진 철회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게 어때요?”
“다른 방법이라뇨?”
“아, 그게.. 사실 미국 본사에서 인수 제안이 들어와서요. 코스닥 떨어지고 인수 네고하면 아무래도 밀릴 것 같아서요.”
“그래도 지금까지 고생한 임직원들 생각을 해서 담달이면 심사 결과가 나오는데 그때 까지 최선을 다해 보시죠?”
“근데 이번에도 안될 것 같아서요. 그러다 M&A 까지 무산되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사장님, 코스닥은 한번 가보셔야죠. 옥션 사례도 있잖아요. 코스닥 상장한 후에도 M&A가 되거든요”
“우리가 뭐 옥션도 아니고…”
담배 연기는 안개처럼 방을 메우고 있다. 난 담배도 안 피는데 완전 여우굴에 갇혀 연기에 취해 몽롱한 상태의 한마리 여우가 된 것 같았다. 그 여우굴을 탈출한 건 다섯 시간이 넘는 열띤 토론 후였다. 결론은 코스닥 심사 최종 결정까지 기다려 보는 동시에 M&A도 함께 추진하자는 거였다.
다시 한 달 후 8월, 리얼미디어코리아는 코스닥 보류 판정을 받았다. 그 심사과정 중에도 본사에 실사자료가 건너가고 M&A는 일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한가지 더 추진된 일이 있었다. 그건 투자사 KTB와 맺은 신주인수계약서를 무효화(?) 하는 것이었다. 불과 1년 전까지 내가 근무했었던 KTB에 내가 리얼미디어코리아 입장으로 이런 얘기를 하게 되다니, 참으로 난감했다.
정대표는 주도면밀한 사람이었다. KTB와 신주인수계약서 체결시 의무 IPO 조항에 제3시장(장외시장) 등록도 포함시켜 놓았다. 내가 KTB 담당자로 있을 때도 주의 깊게 보지 못한 부분인데 리얼미디어코리아로 와서 보니 그 조항이 떡 하니 적혀 있었다. 통상 주식시장 상장은 KOSPI와 코스닥 또는 그와 상응하는 해외시장이라고 되어 있는데 거기에 제3시장도 된다는 조항을 삽입해 둔 것이다. 그 당시엔 투자 후 5년 이내 상장(IPO) 또는 M&A 조항이 의무조항으로 들어가 있었고 그 기간안에 회수(Exit)이 되지 않으면 이해관계인(대주주 혹은 그 특수관계인)이 연대보증 책임을 지도록 되어있었다. 대주주 입장에선 상당히 부담스러운 조항이 아닐 수 없다.
정대표는 일단 KTB에 사전 공지 없이 제3시장(장외시장)에 등록하라고 했다. 장외시장 등록은 의외로 간단했다. 코스닥 상장 준비를 해왔던 터라 관련 서류는 이미 다 준비되어 있었다. 신청 직후 바로 장외시장에 등록되었고, 등록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달에 한번 아주 미량의 주식만 거래를 해 두면 되었다. 상장이 완료되자 난 KTB 담당자 조종수 팀장을 찾았다.
“형님, 죄송합니다”
“왜? 무슨 일 있어?”
“그게 아니고, 이번에 우리회사가 제3시장에 등록했어요.”
“근데, 그게 왜?”
“투자 계약서에 보면 제3시장 등록도 IPO로 인정된다고 되어 있어서, 이제 더 이상 우리가 KTB에 투자 계약서 상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무슨 소리야? 계약서 좀 갖고 와봐”
“사실 저도 리얼미디어 와서 이 조항이 있는 줄 알았어요. 제 입장도 엄청 난감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한다구?”
“뭐 연대보증 의무도 없고 계약 의무사항도 없으니 정대표 하고 싶은 대로 하겠죠”
“쩝!”
최근 들어 벤처캐피탈 투자계약서의 불합리한 부분은 많이 개선되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대주주의 책임이 막중하도록 많은 의무조항이 달려있었다. 특히 기한 내 의무 IPO에 따른 대주주 환매(Buy-Back) 조항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정대표의 기지(?)로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는 지는 모른다. 결과론 적으로 정대표는 본사와의 M&A를 멋지게 성사시켜 KTB에 Exit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서로 Win-Win은 되었지만 과정 상의 껄끄러움이 면해 진 것은 아니다.
LinkedIn에 투자한 Bessemer Venture Partners의 David Cowan은 창업자와의 소통을 중요시하며 투자 시 꼭 보는 창업자의 덕목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지적 정직함(Intellectual Honesty)이라고 말한다. ‘지적 정직함’ 이라는 해석이 맞는 지는 모르지만, 창업자는 최소한 회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을 꾸밈 없이 솔직하게 투자자에게 말해야 한다. 그래야 그 둘의 관계가 진정한 의미에서 파트너 관계가 된다. 창업자가 작은 것부터 속이기 시작하면 설사 그 사업이 잘 안되어 다른 사업으로 전환(Pivot) 하려고 하더라도 투자자는 도와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 특히 고객과 시장 관련 Data를 속이기 시작하면 더욱 그럴 것이다. 나중에 투자자에게 솔직히 고백하고 도움을 청해본 들 무너진 신뢰관계를 회복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지적인 솔직함을 바탕으로 한 소통이 투자자와 창업자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투자를 유치하고 난 후 사업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 사업실패에 따른 그 부담을 고스란히 창업자가 지게 되는 우리나라 계약 풍토상 상기 사례가 이해가 못 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그때의 소통방식은 내 기억 속에 여전히 께름칙하게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