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이영과 창업자 장서정이 말하는 ‘도전’ 이야기
“스스로 도전이라고 결심하고 시작한 건 학문 외에는 없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남들이 도전이라고 말해 준 것뿐이다. 그저 하고 싶은 걸 했고 그게 나중에 도전이라 평가됐다.“- 이영 국회의원
“내가 선택한 것을 거창하게 도전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선택을 했던 건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나에게 용기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양보하지 않고 선택하는 것이다. ” 장서정 자란다 대표
6일 스타트업 입주 공간 프론트원에서 열린 ‘셀럽 콜라보 토크쇼’는 국내 최대 규모 스타트업 거리축제 ‘아이에프2021(IF2021)‘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였다.
이날 토크 세션 강연자로 기업인 출신 정치인 이영 국민의힘 의원과 국내 교육∙돌봄 매칭 플랫폼 ‘자란다’의 창업자인 장서정 대표가 ‘도전’을 주제로 대화를 이어갔다. 모더레이터는 김도현 국민대학교 경영학과 교수가 맡았다.
국회에 흔치않은 이공계(암호학) 전공자인 이영 의원은 2000년 ‘디지털콘텐츠 보안솔루션’이라는 아이템으로 벤처기업 ‘테르텐’을 창업한 기업인이다. 소프트웨어산업협회, 소프트웨어전문기업협회, 정보통신산업진흥원, 지식정보보안산업협회 등에서 이사 등을 역임했고, 2015년~2017년에는 제9대 한국여성벤처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2020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정계에 입문했다.
장서정 대표는 모토로라에서 모바일 UX · UI 디자이너로 10년, 제일기획에서 디지털사업전략 담당으로 2년간 근무한 뒤 2016년 6월 자란다를 창업했다. 자란다는 올해 6월 97억 원의 시리즈 A 라운드를 포함해 누적 140억 원 규모의 투자 유치를 한 유망 스타트업으로 성장했다.
이하 이영 의원과 장서정 대표의 셀럽 콜라보 토크쇼 일문일답.
모든 세대가 시대의 도전 과제를 각각 떠안고 있다. 이영 의원과 장서정 대표는 도전을 현재 진행형으로 하는 당사자들이다. 우선 이영 의원의 이력은 독특하다. 암호학이란 전공을 가장 먼저 한 사람이고, 창업자로 성공해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전에 정계에 입문하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한 분야에서 성취를 이룬 뒤 다른 분야로 뛰어들어 도전하고 있다. 왜 그런 건가.
이영 의원 : 스스로 도전이라고 결심하고 시작한 건 거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남들이 도전이라고 말해준 것뿐이다. 그저 하고 싶은 걸 했고 그게 나중에 도전이라 평가됐다.
어떤 도전을 했냐고 물어보면 먼저 기억나는 건 고등학교 때다. 8학군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이과 전공자는 무조건 화학과 생물을 공부해야만 했다. 여학생은 암기과목에 유리하니 그 과목을 해야 한다고 하더다. 나는 물리랑 지구과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고3 내내 혼자 물리와 지구과학을 공부했다. 드라마틱한 성적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 과목이 좋아서 했다.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한 게 아니라 그냥 하고 싶었을 뿐이다.
대학원 때도 그랬다. 대학원 면접에서 무엇을 전공하고 싶냐고 물어보길래 암호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학교에서 그 전공이 없던 시절인데 한 교수님이 날 받아줬고 학교에 처음으로 랩이 생겼다. 순수학문 안 하면 곱지 않은 시선이 있던 시절인데, 나 빼고 우리 랩 동료 모두 다 교수나 보안연구소에 취업했다. 왜냐면 그 뒤에 정보보안 학과가 생기면서 TO가 다 나왔기 때문이다. 농담으로 나 때문에 다들 취업했다고 하곤 한다.
그런데 정작 나는 창업했다. 석박사 과정 때 1년간 벤처에 갈 일이 있었다. 벤처에 간 배경은 대기업에서 보안 관련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최초의 전자화폐 ‘e캐시’를 ‘데이비드 차움’이란 사람이 만들었다. 그 사람이 미국의 법률 규제 때문에 네덜란드에 ‘디지캐시’라는 회사를 설립했을 때다. 내가 갔던 그 작은 벤처가 디지캐시 본사랑 일을 했다. 일은 재미있었는데 업무시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게 내가 선택할 일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기던 때 종로에 외근을 나가 보니 사람이 너무나 많더라. 콘크리트 벽 안에만 있다가 거리를 활보하는 많은 사람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 시간에 자유롭게 사람이 활보하고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된 거다. 그래서 내 인생 경로에서 취업은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근데 콘퍼런스에 가보니 영어가 안 들리더라. 세션이 끝나면 외국 친구들은 바닥에 앉아서 교수들이랑 토론을 하는데 우린 안 들리는 영어를 듣다보니 머리가 아파서 바람쐬러 밖으로 나가야 했다. 똑같은 출발선상에서 시작하더라도 이런 게 장기화되면 지는 게임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 DNA는 페이퍼 안의 진리를 추구하는 삶보다는 워킹하는 뭔가를 만드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대학교수는 못 할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런 고민을 하던 차에 아버지에게 병마가 찾아와서 1년 간 내가 간병을 하게 됐다. 학교를 떠나 1년 정도 간병하면서 스스로에게 더 솔직하게 됐다. 그리고 5학기 마치자마자 자퇴서를 냈다. 그리고 창업했다.
돌이켜보면 도전을 했다기 보다 스스로에게 정직했던 것 같다. 다른말로 하면 무척 단순했다. 세상이 얼마나 복잡하고 이해관계가 있는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어떤 책임에 져야하는 지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하지 못 했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많았다. 그저 단순하게 자신에게 정직한 선택을 하다보니 남들이 안가는 길을 가서 고생했고 불이익도 많았다. 그걸 제삼자가 보고 도전이라 여겨준 것 같다.
창업하고도 20년 간 많은 일을 겪었다. 20년 전 데이터 보안 회사를 설립했는데 쉽지 않았다. 지금도 소프트웨어가 제값을 못 받는다고 하는데 당시는 더 심했다. 우리 회사 제품은 보여줄 수 있는 UI가 하나도 없었다. 제품 모두가 눈으로 보여줄 수 없는 엔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3천만 원 정도 하는 제품인데 깔아놓더라도 아무것도 볼 수 없다. 해킹이나 보안문제가 나와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걸 인지시키려면 고객이 제대로 제품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처음에 5~6년 간은 고객을 교육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제품을 가져가서 이런 제품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이런 세상이 올거라 설득하고 다녔다. 2000년 대 초에 MS와 우리밖에 관련 상품이 없을 때였기 때문이다. 제품 레퍼런스를 잡기 위해 영등포 고시학원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영업을 했다. 그렇게 제품의 개념과 왜 써야하는지 설명하며 팔았다. 그러면서 EBS 수능, 강남구청 인강 등을 우리회사가 하게 됐다. 2000년 대 초반에는 국내에 원천 콘텐츠는 교육 밖에 없을 때다. 음악이나 영화, 게임, 만화 등은 해외 콘텐츠가 강세였다. 그 상황에서 이러닝 선진국을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자평한다. 대기업에 소프트웨어를 팔아도 힘들 때인데 영등포 고시학원에 팔았으니 무모한 도전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사실 20년 간 도전했지만 아직 큰 마침표를 못 찍은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인디언 기우제처럼 일했을 뿐이다.
사실 과거에 정치에 뜻을 가진 적도 정당활동을 한 적도 없다. 4년 전 당적을 가지긴 했는데, 19대 총선에서 벤처업계 선배들의 설득으로 비례대표 원서를 넣은 적이 있었는데 안 됐다. 노력해서 도전한 것이 아니었기에 미련이 없었다. 당적을 정리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잊고 있었다. 이후 본업에 충실했는데 모 선배에게서 연락이 와서 다시 정치입문을 설득당했고 원서를 냈는데 비례대표가 됐다. 이후 미련 없이 회사를 정리했다. 살면서 공짜로 뭔가에 당첨이 되어본 적이 없다. 반면에 노력을 하면 잘 되거나 못 되거나 해도 기본은 하는 삶을 살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치에 뜻을 두고 있나. 그런데 내가 비례로 손쉽게 국회의원이 됐다. 누군가 간절히 원하는 것인데 내가 노력 없이 길거리 캐스팅이 됐다면 그 길을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스스로가 논리적인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이렇게 이상한 곳에서 삼천포로 빠져서 고생하곤 한다. 그저 운명이라 여기고 회사를 정리했고 지금은 신경을 전혀 못 쓰고 있다. 얼마 전 국정감사에서 네이버와 구글에 강한 압박을 했다. 우리 회사의 고객사였고 고객 사일 수도 있는 곳들이다. 국감 끝나고 지금 회사 대표에게 전화해서 “내가 여기 있는 동안 회사에 도움이 안 될것 같다.”고 전화했다. 그저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국회에 가서 보니 의원 이공계열 비율이 14%, 기술계통이 7% 정도더라. 그나마도 2~30년에 졸업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과가 문과보다 높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건 아니다. 어느 사회나 균형이 필요하고 국회도 마찬가지라 볼 뿐이다. 이공계열 의원이 더 많아져야 기술에 대한 이야기, 산업, 벤처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전달될 수 있을 거다. 더 많은 벤처인과 이공계열, IT인이 반드시 국회에 가야한다고 확신한다.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뚜렷한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사명감을 갖고있다. 국회에 있어보니 ‘WHY’와 ‘HOW’가 대화에 없더라. ‘좋다’와 ‘싫다’는 있는데 ‘얼마나 좋은지’는 없다. ‘할지 말지’는 있는데 ‘왜 해야하는지’는 결여되어 있다. 이런 논의가 안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균형점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지금껏 살아온 대로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려고 한다.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벤처를 안 하려고 했는데 지금 정치 벤처를 하고 있다. 9명의 보좌관을 팀원으로 국회서 창업한 셈이고 간판은 ‘올리브영(all live young)’이고 (국회의원회관) 337호에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치, 우리가 바라는 정치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장서정 대표는 이력이 특이하다. 모토로라와 제일기획에서 근무한 뒤 스타트업이 안 하던 영역에서 창업했다.
장서정 대표 : 나는 전력적이거나 계산적이지 못하다. 그간 했던 내 선택은 궁여지책으로 했던 것이 많았다. 자란다는 2016년 설립했다. 회사를 설립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친구랑 통화하다 IOS에 앱 등록을 하려면 법인 아니면 개발자 이름으로 등록을 해야 한다길래 바로 역삼 세무소에 가서 법인을 등록했다.
고등학생 때 첫 도전은 전공 선택이었다. 미래에 뭐가 돼야 겠다고 생각을 하고 성장한 건 아니다. 부모님은 나를 ‘2+1’처럼 키웠다. 내 위로 언니와 오빠가 있는데 의대와 약대를 간 수재들이다. 그런데 나는 방관되어 사랑만 받고 컸다. 부모님이 내 성적표를 잘 보지도 않을 정도였다. 후일 내가 대학간 것도 아버지가 놀라워했다. 공부 잘하는 언니, 오빠 사이에서 재능을 찾는 노력을 했고 그게 미술이었다. 다소 늦게 시작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미대 진학을 해서 대학 내내 그림을 그렸다. 이론보다는 실기에 중점을 뒀다. 한 학기 18학점이면 16학점을 실기로만 했을 정도다. 성적과 부모님의 방치 때문에 선택한 미대였지만 운좋게도 나한테 잘 맞았다. 순수미술과 디자인을 모두 겪어봤는데 나한테는 디자인이 어울렸다. 내가 하는 일이 영향력이 생기고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걸 즐거워하고 재미있어하는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입사한 첫 회사는 모토로라였다. 모바일 유저인터페이스 디자인이 낮설던 시절이고 웹디자인만 할 때다. 많은 사람이 모바일의 작은 스크린에 디자인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UI 디자인을 한다고 하면 ‘그게 뭐냐’고 했다. 대학 동기들은 졸업하고 대부분 광고 회사, 브랜드 회사에 갔고 그게 당시 유력한 커리어 패스였다.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앞으로 모든 사람이 모바일을 들고 다니는 세상이 올 것이라 예상했고, 내가 디자인을 한 화면이 모바일에서 펼쳐진다는 것이 무척 매력적이라 판단했다. 내가 하는 일의 임팩트를 많이 고민한 거다.
그때 내가 주로 하던 것이 ‘레이저’ 모델을 전담하고 화면 디자인을 한 것이다. 무척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오너십을 가지고 할 수 있는 UI 디자이너라는 직군에 만족감이 높았다. 당시 모토로라는 미국에 본사가 있고 디자인센터를 6개국에 뒀다. 중요한 것만 빼고 나머지는 로걸에 맡겨줬기에 신입임에도 폰 한 대를 맡아서 경험치를 쌓을 수 있었다. 매년 폼팩터가 바뀌던 시절이었는데 9년간 회사를 다니며 매년 바뀌는 폰을 가지고 어떤 UX, UI를 보여줘야 할지 고민했다. 직장생활이었지만 폰 하나를 새롭게 바꾸는 크리에이터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는 디자인 영역을 넘어서 설계 영역으로 갔다. 그러다 시니어급이 되었다.
사람에게는 변곡점이 있기 마련이다. 모토로라가 구글에 인수되면서 진로를 고민했다. 동료들은 대부분 삼성전자, 구글 등 IT회사에 안정적인 처우를 보장받고, 직급이 좋은 곳으로 옮겨갔다. 그게 당시에는 보편적인 방향이었을 거다. 그런데 나는 난데없이 제일기획에 갔다. 내게 있어 사회적 영향력은 중요한 선택 기준이었다. 디자인 업무를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상품을 디자인 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걸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광고회사에 가니 일하는 방식도 이전 회사와는 달랐고 클라이언트 캠페인 메시지도 달랐다. 그런 챌린지를 받으며 사업팀에서 일을 했다.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 촉촉한 초코칩 아이콘을 인벤토리로 하는 광고상품을 만들었다. 내가 가장 잘하는 모바일 스크린 안에서 회사 브랜딩과 광고를 하는 플랫폼을 만들어서 사업화까지 한 거다.
자란다를 창업한건 회사에서의 시도가 나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를 위한 서비스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것이 창업이다. 당시 뉴스에 초등학생을 돌보려 직장을 떠난 엄마가 3만명이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나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한참 일할 나이인 30대 후반 여성의 경력단절이 유난히 높았다. 아이수는 줄었지만 키즈 시장은 성장 중이었다. 가장 큰 페인포인트는 보육과 교육이 분리되어 있다는 거였다. 이걸 함께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봤다. 내가 행복하게 일하려면 아이의 시간도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행복하려고 만든 서비스가 자란다인 셈이다. 우리 회사는 아이가 자는 시간과 등교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1/3을 책임지는 서비스를 만들고 있다. 자란다의 차별점은 데이터와 시스템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임팩트를 주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고 정기방문의 경우 코로나 상황에서도 전년 대비 2.5배 성장하는 성과를 냈다.
자란다와 나 자신이 동일한 건 성장, 변화, 성과, 선한 영향력이다. 나는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고 고정된 것 보다는 변화를 재미있어 한다. 지난주보다 이번주에 조금이라도 더 잘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익숙한 길이 아니라 새로운 곳을 가는 걸 좋아한다. 스스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포기하지 않은 건 용기일 거다. 나한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양보하지 않고 내가 선택해 내가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것을 거창하게 도전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다른 사람이라면 선택하지 않는걸 선택했던 건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두 사람은 ‘이방인 체험’을 한 듯 싶다. 연구에 따르면 이민자이거나 전혀 다른 맥락 속으로 던져지는 경험을 한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문제 해결능력이 올라간다고 한다. 장 대표는 방임되어 자란 사람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를 챙기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장서정 대표 : 우리 서비스의 차별점은 선생님이 가서 아이들에 맞춰주는 것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확장해주고 관찰해주고 아이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아이를 지켜봐주는 것이다. 아이가 힘들어할 때 도와주는 어른이 필요하다. 자란다 선생님은 아이가 도움닫기를 하게 돕는 역할을 한다.
이영 의원은 도전을 하면서 갈등을 느낀적은 없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진하는 용기의 원천은 뭔가.
이영 의원 : 갈등은 엄청나게 많았다. 종종 고생 안 해본 얼굴이라는 이야기 듣곤 하는데, 고생담 풀어놓으면 남들보다 못지 않을 거다. 그리고 이공계같지 않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어릴때 고생을 많이해서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말하곤 한다.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괴로워는 해도 후회는 안 하려고 했다. 선택은 늘 힘들었지만 후회는 많지 않은 배경이다. 또다시 그상황이 오더라도 선택은 같을 거다.
젊을 때는 성공에 대한 열망이 크고, 나이가 들면 의미를 생각하는 것 같다. 국회의원이 되어 배지를 달았다고 해서 성공한 건 아니다. 국민에게 신뢰받는 정치가가 되는 것이 성공한 거다. 회사 사장이 되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한 건 아니다. 선한 영향력을 사회에 미치는 것이 진정한 기업가의 성공일 거다. 성공을 위한 선택이라도 후회와 번뇌가 따라온다. 모든걸 담보할 수 없다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는 게 바람직하다 생각한다. 스마트하게 전략적으로 단계를 밟아가는 것도 좋겠지만, 그런 것이 불확실하다면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면 어떨까 싶다. 그게 많은 점을 찍어 나중에 큰 도형을 만들어가는 과정일 수 있다. 역사적으로 큰 일을 이룬사람 상당수가 사생아였다고 한다. 제도권 밖에서 결핍된 상황이 원동력이 된 것이다. 결핍은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일을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가지고 있지 못 한 것, 아픈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포기만 안 한다면 결핍이 큰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이공계 여성 인력은 통계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특정 분야에 편중되어 있다. 여성 창업도 상당히 부족하고 VC업계에 여성 비율도 낫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영 : 이전에는 이공계 여성이 창업해서 성장하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고 봤다. 그런데 정치권에 와서 국가의 개념으로 보니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현재 대기업조차도 기술 베이스의 인재가 부사장이 된 지 얼마 안 됐다. 그전까지 기술 분과는 사업부를 서포트하는 조직이란 개념이 관행처럼 있었다. 2000년대는 의사결정권자가 균형점이 없어서 소모적인 일이 자주 발생했다. 현재 서비스 기업이 유니콘이 될 확률이 높다. 반면에 기술집적 제품을 만드는 회사는 시장을 여는 것이 여전히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해외에선 기술과 제품의 가능성만 보여줘도 M&A가 되는 사례가 있다. 그런데 국내는 기술하는 사람이 개발도하고 직접 나가서 팔기까지 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소프트웨어는 제값을 못 받고, 하드웨어는 대기업이 꽉 잡고 있다. 다수의 투자사는 기술로 성공한다는 것에 의문점을 단다. 그걸 평가해줄 사람도 부족하다.
이런 것이 개선되려면 인프라가 올라와야 한다. 정치가 지원에 집중하는 액셀러레이터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근본적인 엔진을 갖춘 강력한 국가가 되려면 정치권이 강하게 드라이브를 해야 한다. 타이밍상 4차 산업혁명 시기이고 이로 인해 국가 패권도 달라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강세를 보일 수 있는 시기라고 본다. 다만 이런 이야기를 해도 받아줄 사람의 수가 국회에 많지 않은건 안타깝다. 예전에는 달리기 전에 여자들이 뛰는 곳에 허들이 있더라도 안 치워주던 시대였지만 지금은 치워주는 단계까지 왔다. 하지만 남자들은 역사적으로 많이 달려봤기에 달릴만한 환경이지만, 여자들은 많이 안 달려본 곳을 가야 하기에 돌과 잡풀 등 걸리는 것이 많다. 불편한 건 아는데 뭐를 바꿔줘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인 거다. 일하고 창업하는 여성들이 많아지면 이런 문제가 해결될 거라 예상한다. 생산적인 결과를 내기 위해 현장과 정치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두 사람의 다음 도전은 뭔가.
장서정 대표 : 지금은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려 한다. 예전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을 하며 위로 올라가려고 하니 내가 유리 천정 근처에도 못 가봤다는 걸 알았다. 여성 창업이 뷰티 등 특정 영역에 머무르는 배경에는 기술자와 함께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창업을 시도할 때 믿을 수 있는 엔지니어 팀이 없다면 신발 없이 달리는 거와 같다. 시작부터 뒤처져서 갈 수밖에 없다. 만약에 다음에 뭔가에 도전한다면 여성 개발자들을 활성화해서 창업 등 전문 영역으로 가게 하고 싶다. 인구의 절반이 여성인데 가능하다고 본다.
이영 의원 :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 일 거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서는 디지털, ICT, 벤처가 너무 중요한데 국회에서 너무 관심이 없다. 정치에 디지털을 붙이면 정치가의 수명이 단축된다고 한다. 정치적인 쟁점을 이야기해야 주목받는 세상이다. 내가 유명해지지 않은 건 상관없는데 정책을 우선순위로 올리는 것이 힘들다. 국회에서 규제개혁 세미나를 2시간이나 했는데 언론에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정치부는 섹션에 실을 수가 없다고 하고 국회에 상주하는 기자들을 패스하고 산업부를 따로 부르는 건 안 된다고 보좌관이 말하더라. 그런 것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서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열심히 설득하고 있다. 정치가 국민에게 비판받는 건 문화, 사회, 외교를 이야기 안 하고 정치만 이야기해서다. 대한민국을 위하는 길은 정당과 정권을 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