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의 Lean Life] 1. 연재를 시작하며…
창업도 인생도 린하게 하기 위한 프로젝트
‘이희우의 린 라이프’
나의 첫 책 ‘쫄지 말고 창업’이 나오는 시점에 다시 연재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 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첫번째 책을 냈으니 두번째도 준비해야 겠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그런데 이번 연재는 ‘쫄지마! 인생’처럼 끝을 써놓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열려 있다. 연재 편수도, 결론도. 다시 말하면 내 스스로도 아직 정리가 안되어 있다고 해야할 듯. 그래도 내가 이런 주제로 다시 글을 쓰려고 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창업도 인생도 린하게 해야 한다. 그럼 뭐가 린(Lean) 인가? 사전적 의미는 동사로는 ‘기대다’라는 뜻도 있지만 주로 형용사로 ‘Lean’은 ‘군살을 뺀’, ‘날렵한’, ‘기름기 뺀’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걸 스타트업에 접목 시킨 것이 린 스타트업(Lean Start-up)이고 그걸 인생에 한번 접목해 보는 것이 린 라이프(Lean Life)인 것이다. 지금 여기서 다 까발리면 재미 없겠지. 이런 얘기는 차차 풀어가도록 하겠다. 그 전에 먼저 내 삶을 한번 되돌아 본다.
머리사고 후유증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초입, 그때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그리고 한달 뒤에 있었던 모의고사, 난 전교 석차가 40등이상 떨어졌다. 특히 다른 과목은 몰라도 한달 동안 덧셈, 뺄셈을 안해서 그런지 수학이 형편없었다. 그 충격은 상당했다. 그래서 요즘도 수학문제 못 풀어서 땀 삐질삐질 흘리는 악몽을 꾸는지 모르지.
비단 성적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머리를 다치니 매사가 무기력하고 의욕상실이 되었다. 그래도 대학을 가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하는데 야간자율학습 시간만 되면 머리가 아파오는 거다. 그래서 난 자전거를 타고 야자를 땡땡이 치고 학교 주위를 배회했다. 근처 슈퍼에서 맥주라도 한 캔 사서 먹고 야자 다시 들어가다 선생한테 걸려 얻어 맞기 일쑤. 그런 애였다.
그러다 접한 까뮈의 ‘이방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특히 마지막 대사는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그래서 내가 전에 플래텀에 연재했던 ‘쫄지마! 인생’에서도 그 첫 시작은 그 글귀를 실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다시 실어본다.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이제 내게 남은 소망은 다만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까뮈의 ‘이방인’ 중에서
뭔가 당당함이 느껴진다. 내 식으로 풀어쓰면 누가 뭐라든 난 인생을 ‘쫄지않고’ 살아왔다는 그런 당당함. 사형집행시 그 증오까지 난 두렵지 않다는. 여기서 까뮈의 ‘이방인’을 분석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 고2의 눈에 왜 그렇게 강렬하게 다가왔던지. 그때 난 알았다. 앞으로 이 글귀는 내 평생 좌우명과 같은 것이라고. 어쩌면 그때 쯤이 자기 주도적으로 살기 시작한 시점인 것 같다.
방황의 시작 그리고 극복
‘이방인’은 나에게 방황의 시작이었다. 고2부터 군대 제대시점까지 6년가까운 방황의 시간을 덤으로 주었거든. 책을 골라도 염세적인 책들만 골라 읽었다. 물론 고2 때 읽은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살아남은 자의 슬픔’, ‘마음의 감옥’, ‘숲속의 방’ 같은 어두운 책으로 일관되었다. 그러면서 친구와 어울리지도 못하고 혼자 방안에서 책 속에 빠져 있거나 아님 남는 시간에 ‘통계학’, ‘수리경제’ 같은 남들 실어하는 과목만 공부하곤 했다.
바닥을 경험하려면 그 끝까지 가봐야 그 바닥을 찍고 팅겨 올라올 수 있다. 내 경우에도 그런 것 같다. 이문열도 ‘젊은 날의 초상’에서 ‘바다에 가 보았더니 그곳은 이미 바다가 아니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고통이라 방황이라 생각되는 것도 그 바닥에 가보면 사실 별게 없다. 단지 작은 깨달음만 있을 뿐이다. 작지만 그런 깨달음이 있으면 바로 위로 팅겨 올라갈 수 있다. 그래서 그 작은게 작은게 결코 아니게 된다.
그리고 떠난 중국 배낭여행
94년도 7월, 그러니까 내가 대학교 3학년 1학기 마쳤을 무렵 난 배낭여행을 떠났다. 중국으로. 92년에 한중수교가 있었으니 수교된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다. 실은 나도 친구들처럼 유럽으로 가고 싶었다. 그런데 돈이 없었다. 돈이 없으면 배낭여행 못가는 것인가? 갈 나라를 바꾸면 되지. 그래서 용돈 아껴 놓은 것이랑 할머니께 받은 돈 오십만원으로 중국 배낭여행을 떠났다. 물론 같은 하숙집 선배 동렬이형을 꼬셔서 함께. 지금 그 형은 현대자동차 중국 주재원이지만.
중국말 한마디도 못하고 배타고 떠난 여행. 두려움도 있었지만 다 사람사는 세상이라 무턱대고 떠난 것이다. 그런데 칭다오(Qingdao)에 도착한 첫날부터 일이 터졌다. 그 당시 중국에선 외국인들은 안전상 호텔에서만 숙박을 할 수 있었다. 싼 여인숙이나 여관은 외국인들이 묵을 수 없었는데 나 같은 배낭여행족이 어찌 호텔에서 잘 수 있겠는가. 어렵사리 허름한 여관을 하나 구해서 들어갔는데 새벽 두시쯤 중국 손님 들어왔으니 나가라로 내쫒김을 당했다. 비도 오고 졸리고. 칭다오 해안가 처마 밑에서 보낸 첫날밤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한달을 돌아다녔다. 무시무시한 조선족 조폭과도 며칠 지내보았고, 대련 역 앞에서 술먹고 자다 쓰레기 더미 위로 던저짐을 당하기도 했고, 나중엔 선배와 따로 떨어져 홀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난 거의 중국사람처럼 융화되어 있었다. 두려움은 더이상 없었다. 그래, 뭘 두려워해. 해보면 다 되던데.
그래, 창업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인생이다. 인생이 잃을 게 없어야 단출해지고 판단도 빨라진다. 즉, 린 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창업도 인생도 린하게 할수 있을까?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하나씩 풀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