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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를 위한 현명한 페이스, 42.195km의 창업을 위하여”

창업을 마라톤과 연관시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식상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마라톤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좋아서 붙인 이름이려니 했다. 실제로 마라톤과 스타트업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나는 42.195km를 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사를 키워가는 일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 두 가지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마라톤을 뛰어본 적이 있어서일 것이다. 나는 마라톤을 그리 잘 뛰지는 못한다. 그저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뛰는, 그런 달리기를 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스타트업과 비슷한 지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출발선에 선 순간부터 그렇다. 마라톤 출발선에 서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앞으로 3시간 넘게 달려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지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스타트업도 마찬가지다. 첫 사업계획서를 쓸 때부터 앞으로 최소 3년은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숨이 막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출발 직후다. 마라톤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 바로 출발 직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처음에는 몰랐다. 첫 마라톤에서 나는 출발과 동시에 신나게 달렸다. 컨디션도 좋았고, 다른 사람들도 다들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함정이었다. 10km 지점에서 벌써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결국 30km에서 완벽하게 탈진했다.

스타트업도 이와 똑같다. 초기에는 열정이 넘친다. 투자도 받았고, 팀원들의 사기도 높다.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밤을 새워가며 일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번아웃이 찾아온다. 자금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고, 시장의 반응도 생각만큼 좋지 않다. 이때 많은 스타트업이 쓰러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해커톤’이라는 개념이 참 재미있다. 해킹(Hacking)과 마라톤(Marathon)의 합성어인 해커톤은, 24시간이나 48시간 동안 쉬지 않고 코딩을 하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사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서비스들도 초기 버전은 이런 해커톤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단거리 마라톤인 셈이다.

해커톤은 처음 등장했을 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원래는 말 그대로 ‘해커들의 마라톤’이었다. 프로그래머들이 모여서 밤을 새워가며 코드를 작성하고, 버그를 찾아내고, 새로운 기능을 만들어내는 자발적인 모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해커톤은 좀 더 조직화되고 구조화된 이벤트가 됐다. 기업들이 주최하고, 상금이 걸려있고, 심사위원이 있다. 마치 스타트업 경진대회처럼 변했다.

이런 변화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진짜 마라톤도 원래는 전쟁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린 병사의 이야기에서 시작됐는데, 지금은 전 세계인의 축제가 됐다. 해커톤도 비슷한 변화를 겪은 것이다.

하지만 마라톤의 본질은 여전히 남아있다. 긴 시간 동안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극복하는 것. 해커톤도, 스타트업도 마찬가지다. 다만 해커톤은 이틀짜리 단거리 마라톤이고, 스타트업은 몇 년이 걸리는 울트라 마라톤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스타트업 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페이스 조절이다. 내 몸 상태와 코스의 특성을 고려해서, 끝까지 달릴 수 있는 속도를 찾아야 한다. 남들보다 조금 늦더라도, 내가 완주할 수 있는 속도면 된다. 스타트업도 마찬가지다. 다른 회사의 성장 속도에 현혹되지 말고, 우리 회사가 지속가능한 속도를 찾아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보급소다. 마라톤에서는 5km마다 보급소가 있다. 물을 마시고, 에너지젤을 섭취하고, 잠깐 걷기도 한다. 처음에는 이런 보급소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시간도 아깝고, 멈추면 다시 뛰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재충전 없이는 완주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타트업 창업자들에게도 이런 ‘보급소’가 필요하다. 잠시 일에서 벗어나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한다.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혹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이런 시간 없이는 장기전을 버틸 수 없다. 해커톤이 48시간의 강행군이 가능한 것도, 그것이 일회성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실제 스타트업은 그런 방식으로는 지속될 수 없다.

마라톤의 또 다른 특징은 코스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출발점과 도착점이 명확하고, 그 사이의 코스도 분명하다. 하지만 스타트업은 다르다. 출발점은 있지만, 도착점은 모호하다. 코스도 계속 바뀐다. 시장 환경이 변하고, 고객의 니즈가 바뀌고,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한다. 그래서 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트업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둘 다 결국 인내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단거리 달리기처럼 순간적인 폭발력으로 승부가 나지 않는다. 꾸준히, 끈기 있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이 승리한다.

최근에는 ‘스타트업 마라톤’이라는 이름의 행사들도 생겼다. 해커톤과 비슷한 형식이다. 하지만 이런 행사들은 실제 스타트업의 여정과는 거리가 있다. 진짜 스타트업 마라톤은 수년에 걸친 긴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대부분의 경우 실패로 끝난다. 통계에 따르면 스타트업의 90% 이상이 3년을 넘기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해커톤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단순히 48시간 동안 코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과정까지 고려하기 시작했다. 지속가능성, 확장성, 비즈니스 모델 등을 함께 평가한다. 마치 스타트업 마라톤의 축소판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끔 마라톤을 뛸 때마다 스타트업을 하는 친구들을 떠올린다. 완주 지점이 보이지 않는 코스를 달리고 있는 그들을. 그리고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조급해하지 마세요. 당신의 페이스대로 가면 됩니다. 중간중간 물도 마시고, 걷기도 하세요. 그게 결국 가장 빠른 길입니다.”

이것이 스타트업 마라톤과 해커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완주할 수 있는 페이스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적절한 휴식과 재충전을 하는 것이다. 마라톤이든, 해커톤이든, 스타트업이든, 결국은 지속가능성이 가장 중요한 승리의 조건이다.

한국과 중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현장 중심으로 취재하며, 최신 창업 트렌드와 기술 혁신의 흐름을 분석해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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