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의 차가운 형광등 아래에서 버거를 씹으며 울던 그날 밤, 안재만 베슬에이아이 대표는 자신의 부족한 영어 실력을 원망했다. 2022년 6월의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첫발을 디딘 순간부터 시작된 여정은 그렇게 눈물로 시작되었다.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하는 모든 한국 스타트업의 통과의례였다.
베슬에이아이(Vessl AI)는 기업을 위한 AI 인프라 MLOps 플랫폼을 제공하는 B2B SaaS 기업이다. 회사가 그리는 미래는 단순하지 않다. 하나의 거대한 AI 모델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수백 개의 특화된 모델들이 서로 협력하며 만들어가는 세상. 세일즈를 잘하는 AI, 마케팅을 잘하는 AI, 개발을 잘하는 AI가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미래를 그들은 꿈꾸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말 막막했습니다.” 안 대표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그때의 당혹감이 묻어있다. “친구들도 있고, 선배들도 있지만… 다 만나봤자 3주면 끝나요. 그 다음엔 뭘 해야 할지…”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고객을 만나는 것. 하지만 그 단순한 답을 실행하는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네트워킹 이벤트에 가서는 음식만 주워 먹고 나오기 일쑤였고, 링크드인으로 보낸 수많은 메시지들은 대부분 반응이 없었다. 15분만 시간을 달라는 간절한 요청도, 대부분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왔다.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보자.” 그들은 과감하게 바(bar)를 하나 빌려 네트워킹 이벤트를 주최하기 시작했다. 무제한 맥주와 음식을 제공하며,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의 직원들을 초대했다. 500명, 600명이 모이는 행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영어 실력은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비즈니스였다. “사람들은 내 영어 실력에 관심이 없어요. 그들이 관심 있는 건 우리의 비즈니스죠.”
도전은 계속되었다. 구글 포 스타트업 프로그램에 선정되었고, 40여 개의 VC로부터 투자 제안을 받았다. 실리콘밸리의 선배 창업가들을 만나면서, 그들도 처음에는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블라인드도, 링글도, 모두가 처음에는 같은 고민을 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미국에서 뭐라도 한다더라…” 이 말의 무게는 생각보다 컸다. 한국에서는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미국에서도 “베슬에이아이? 아, 그 파티 한 번 가봤어.”라는 인식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결국 베슬에이아이는 158억 원 규모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미국의 투자자들은 이런 반응이었다. “너무 큰 것 같아요(시드 단계)” 또는 “미국에서의 트랙션이 좀 더 필요해요(시리즈 A).”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거치며 투자 라운드를 마무리 했다.
현재 베슬에이아이는 샌프란시스코에 오피스를 열었다. 아파트 한 채의 방 두 개에 침대 세 개씩을 밀어 넣고, 팀원들과 함께 생활하며 제품을 만들어가고 있다. 스노우플레이크, 오라클, 라마 인덱스 등 실리콘밸리의 주요 기업들과 파트너십을 맺으며 성장하고 있다.
안 대표는 미국 진출을 고민하는 한국 스타트업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왜 미국에 가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시장이 커 보인다거나, 투자를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정도로는 부족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시장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국내 대기업에서 10억을 준다고 해도 거절할 수 있어야 해요. 미국 시장만 바라볼 수 있는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제품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조언을 던진다. “한국에서 만든 제품은 미국에서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시장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접근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모든 것을 다 해주어야 하지만, 미국에서는 하나를 뾰족하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우리만의 독특한 성장 전략입니다.” 안 대표는 강조한다. “미국 VC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도 바로 이거예요. 당신만의 유니크한 성장 전략이 뭐냐고 물어봅니다.”
실리콘밸리에서의 1년은 베슬AI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영어 실력보다 중요한 것은 네트워킹이었고, 완벽한 제품보다 중요한 것은 시장 이해였다. 맥도날드에서 울던 그날 밤부터, 158억 원의 투자 유치까지. 그들의 여정은 실리콘밸리에 도전하는 모든 한국 스타트업들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영어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안 대표는 강연을 마무리하며 말했다. “그들은 우리의 영어가 아닌 비즈니스에 관심이 있었죠. 결국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트워킹의 마스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맥도날드의 그 밤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입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