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둥성 잔장시 밀릴링 마을.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 이 시골 마을에서 중국의 새로운 신화가 시작됐다. ‘고향의 자부심’, ‘중국이 낳은 천재’라는 문구가 적힌 깃발 아래로 매일 수백 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이들이 찾는 것은 중국의 새로운 AI 스타트업 ‘딥시크’의 창업자 량원펑의 흔적이다.
한때 이름 없는 시골 마을이었던 이곳이 관광지가 된 건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량원펑이 이끄는 딥시크가 OpenAI의 GPT-4와 맞먹는 성능의 AI 모델을 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다. 그것도 GPT-4의 10분의 1 비용으로 말이다.
“청소부든 운전기사든 어떤 직무라도 맡을 수 있다면 딥시크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베이징의 한 대학생이 SNS에 올린 이 글은 현재 중국 청년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는 ‘AI 열풍’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딥시크의 일일 활성 사용자 수는 출시 18일 만에 1500만 명을 돌파했다. 이는 ChatGPT보다 13배나 빠른 성장 속도다.
하지만 딥시크는 시작에 불과했다. 중국의 AI 산업은 마치 봄날의 죽순처럼 솟아나고 있다. 2022년 2329억 위안(약 43조 6943억 원)이었던 중국의 AI 산업 시장 규모는 2024년 3,566억 위안(약 66조 9017억 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AI 호랑이’로 불리는 스타트업들의 약진이다. 문샷, 바이촨, 지푸AI, 01.AI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설립 1~2년 만에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했다. 문샷은 33억 달러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았고, 바이촨은 알리바바, 텐센트, 샤오미로부터 6억 9100만 달러를 투자받아 기업 가치 28억 달러를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지푸AI다. 2024년 12월 기준 기업 가치 200억 위안을 돌파한 지푸AI는 GLM-4-Plus라는 대형 언어 모델을 보유하고 있다. 이 모델은 GPT-4와 대등한 성능을 보이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지푸AI의 챗봇 앱인 ChatGLM은 이미 2,500만 명의 사용자를 확보했다.
중국의 거대 IT 기업들도 이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바이두는 ‘Ernie Bot(文心一言)’, 알리바바는 ‘통이첸원(通义千问)’, 텐센트는 ‘훈위안(混元)’ 등 각자의 AI 모델을 개발했다. 심지어 바이트댄스의 챗봇 ‘더우바오’는 월간 활성 이용자 수가 6천만 명에 달한다.
이러한 성과의 배경에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 중국은행은 향후 5년간 ‘인공지능산업체인발전’을 위해 1조 위안(약 199조 원)의 특별금융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특히 스마트 시티 건설에 주력하고 있는 중국 정부의 정책은 AI 기업들에게 실험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AI 기업들은 주로 컴퓨터 비전(52.5%), 대화형 AI(24.9%), 일반 AI 기술(22.54%)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이 미국의 기술 제재 속에서도 독자적인 기술력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푸AI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GLM-4V-Plus라는 비전 모델을 개발해 웹페이지와 비디오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이 기술력은 미국 정부가 수출 통제 대상에 포함시킬 정도로 인정받았다. 2024년에는 매출이 전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했고, 조만간 기업공개(IPO)도 계획하고 있다.
“마치 알리바바의 성공에 수많은 EC업체들이 등장한 것처럼, 딥시크의 성공에 자극받아 너도나도 AI에 뛰어들어 제2의 딥시크, 제3… 제1000의 딥시크가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 중국 IT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 중국에서 제2의 딥시크가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평가한다. 정부의 지원, 풍부한 인재풀, 거대한 내수시장이라는 삼박자가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신중론도 제기된다. 딥시크의 성과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실제 성능과 투자 상황에 대해 더 면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AI 산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 기업들의 기술 혁신, 그리고 무엇보다 젊은 인재들의 열정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밀릴링 마을의 붉은 깃발은 이제 중국의 새로운 도약을 상징하는 깃발이 되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이러한 AI 굴기가 단순한 기술적 성과를 넘어 중국인들의 자부심으로 승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광둥성의 한 작은 마을이 관광지가 된 것처럼, AI 기술은 이제 중국의 새로운 문화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밀릴링 마을의 붉은 깃발에 쓰인 문구처럼, 중국의 AI 산업은 자신감에 차 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하나둘씩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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