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질은 침묵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만의 언어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 원자와 분자의 숨겨진 문법 속에 인간 문명의 잠재된 가능성이 고요히 숨 쉬고 있다. 우리는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실험실에서 반복되는 수천 번의 시행착오는 어쩌면 언어의 장벽 앞에 선 인간의 어설픈 번역 시도인지도 모른다. 쿠날 산딥은 이 번역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물질정보학이라는 새로운 렌즈를 통해 원자의 속삭임을 듣고, 분자의 침묵을 깨우는 일. 그것은 화학이라는 우연의 영역을 필연의 언어로 다시 쓰는 작업이다.
“저는 쿠날 산딥(Kunal Sandeep)입니다. 폴리머라이즈(Polymerize)의 공동 설립자이자 CEO입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쿠날은 담담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은행, 의료, 금융권에서 커리어를 쌓다 2020년 싱가포르에서 폴리머라이즈를 설립한 그는 2024년 한국 법인까지 만들었다.
폴리머라이즈는 클라우드 기반 물질 정보학 플랫폼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이다. 이 회사는 제조업체와 연구자들이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는 과정을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AI와 머신러닝을 활용해 소재 개발 과정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이 플랫폼의 주요 강점은 35개의 독자적인 AI 모델을 통해 최소한의 실험으로 높은 예측 정확도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기술은 적은 수의 실험만으로도 95%의 예측 정확도를 달성했다. 회사측은 이러한 예측 기술을 통해 기업이 소재 개발에 드는 연구개발(R&D) 비용을 최대 50%까지 절감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폴리머라이즈의 접근 방식은 기존의 소재 개발 방법론과 비교해 더 체계적이고 데이터 중심적이다. 이 기술은 특히 많은 시간과 자원이 소요되는 실험 단계를 줄이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가능성 높은 후보 물질을 먼저 식별함으로써 개발 프로세스를 간소화한다.
“폴리머라이즈는 물질정보학 소프트웨어 회사입니다. 화학 및 재료회사들의 제품 개발을 가속화하고, 새로운 분자를 찾고, 새로운 재료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클라우드 플랫폼을 제공합니다.”
물질정보학. 낯선 단어다. 어쩌면 우리는 낯선 단어를 통해서만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쿠날은 물질의 언어를 배우고 해독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분자와 원자가 만들어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문법을 이해하려는 사람.
우연의 화학을 필연의 과학으로
“화학회사들은 전반적으로 많은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하게 보는 유리나 주변의 모든 것들은 물질입니다. 이러한 물질들의 최적의 특성을 찾기 위해 회사들은 많은 실험들을 해야 합니다.”
쿠날의 말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 문명의 숨겨진 노동이 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유리, 플라스틱, 섬유, 그리고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디스플레이의 물질들까지. 모든 것은 누군가의 끝없는 실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만들어졌다. 화학자들은 물질의 작은 변화를 관찰하며 수백, 수천 번의 실험을 반복한다. 마치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처럼 무한에 가까운 조합의 가능성 속에서 의미 있는 문장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아침에 요리를 할 때 사용하는 붙지 않는 조리도구들은 테프론으로 만들어졌습니다. 1965년 우연히 발견된 테프론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사용되어 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화학 산업에서 혁신이라는 것은 우연에 의하여 주도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연. 그 무작위성의 아름다움과 비효율성. 인간의 역사를 바꾼 많은 발견들이 우연의 산물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질서와 법칙을 추구하지만, 가장 위대한 발견들은 종종 혼돈의 영역에서 찾아온다. 쿠날은 그 혼돈을 질서로 바꾸고 싶어했다.
“그래서 우리는 AI와 소프트웨어 기술을 사용하여 이러한 연구자들의 시행착오 방식을 줄이고, 전체 개발 주기를 단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술은 언제나 필연과 우연 사이의 긴장 관계를 다시 쓰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쿠날과 폴리머라이즈는 인공지능이라는 도구를 통해 화학의 무한한 가능성을 더 효율적으로 탐색하려 한다. 100번의 실험을 10번으로 줄이는 일. 물질이 말하는 언어를 더 빨리, 더 정확하게 해독하는 일.
화학 산업의 전방위적 혁신
“우리의 목표고객은 오늘날 화학 소재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회사와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폴리머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고분자, 패키징, 반도체, 화장품 등 다른 소재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물질은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한다. 화장품의 성분이 피부에 닿아 이야기하는 방식과 반도체 내부에서 전자들이 춤추는 방식은 다르다. 그러나 물질정보학의 렌즈를 통해 보면, 그들은 모두 해독 가능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쿠날은 그 다양한 언어들을 번역하는 보편적인 통역사를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폴리머라이즈는 35개 이상의 자체 개발 AI 머신 러닝 모델을 운영하고 있다. 연구자가 배합물·원료, 공정 방법 등에 대한 정보만 입력하면 예상 실험 결과를 95%에 육박하는 정확도로 도출해준다. 이를 통해 고객사는 최적의 소재를 찾기 위한 개발 기간을 최대 50%가량 단축할 수 있다.
그 숫자들 너머에는 인간의 시간과 노력이 있다. 실험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연구원들, 새로운 물질을 찾기 위해 수천 번의 실패를 견디는 과학자들. 폴리머라이즈의 기술은 그들에게 시간을 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유한한 시간과 무한한 호기심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국, 기회의 땅
“스타트업의 여정에는 항상 세 가지 그림자가 따라다닙니다. 제한된 자본이라는 무게,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조급함, 그리고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끊임없이 떨어지는 시간의 압박. 이 세 가지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우린 한국이라는 땅에서 기회를 발견했습니다. 특히 한국의 산업 지형은 기름진 토양과 같았습니다. 자동차가 달리는 길에서, 로봇의 움직임 속에서, 하드웨어의 회로 안에서 그걸 찾을 수 있었죠. 이 땅은 이미 혁신의 씨앗을 품고 있었고, 우리는 그 토양에 우리의 아이디어를 심기로 결심했습니다.”
쿠날이 싱가포르에서 한국으로 시선을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한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양면성 때문일 것이다. 전통과 첨단, 보수와 혁신이 공존하는 이 역설적인 공간에서, 쿠날은 기회를 보았다. 현재 폴리머라이즈는 싱가포르 본사를 중심으로 한국, 일본, 중국, 인도, 카타르 등 5개국에서 운영 중이다. 작은 회사. 그러나 그 안에는 물질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담겨 있다.
문화적 융합의 언어
“저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것이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볼 때, 다른 시선의 각도가 세상을 입체적으로 만듭니다. 회사와 구성원에게 공유된 가치라는 굵은 뿌리가 있다면, 다양성은 위협이 아닌 선물이 됩니다.”
다양성이 주는 창의적 긴장. 그것은 단일한 시각으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통찰을 가져온다. 쿠날은 회사의 핵심 가치가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는 공통의 언어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치 물질의 세계에서 원자들이 서로 다르지만 일정한 법칙으로 결합하듯이.
“저희는 매년 오프라인 회의, 직접 만나는 모임 등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화나 서로 다른 국가적인 배경으로 일어날 수 있는 마찰을 줄이고, 사람들이 서로를 더 잘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다양한 문화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어쩌면 폴리머라이즈가 추구하는 물질세계의 질서와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원자들이 결합하여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듯,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낸다.
한국에서의 첫 걸음
“대한민국 정부의 KSGC(K-스타트업 그랜드 챌린지) 프로그램이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스파크랩은 저희의 액셀러레이터이자 멘토로 많은 도움을 줬어요. 다수의 네트워킹 세션에 초대해 업계 관계자들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습니다.”
폴리머라이즈는 최근 스파크랩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스파크랩 김유진 대표는 “전통적인 연구개발 방식은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는 구조적인 한계를 가진만큼 폴리머라이즈의 AI 기술력을 통해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투자 배경을 설명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연과 필연,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이 어떻게 성공의 요소가 되는지 보인다. 마치 화학 반응에서 적절한 촉매와 온도, 압력이 만나 새로운 물질이 형성되듯이,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도 여러 요소들이 적절한 시점에 만나야 새로운 가치가 창출된다. 쿠날과 폴리머라이즈는 그 화학 방정식을 풀어가는 중이다.
한국의 속도와 품질
“꽤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미 고객을 확보한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고요. 그리고 팀 규모도 커졌어요.”
실제로 폴리머라이즈는 현재 글로벌 80여 개 기업에 독자적인 물질정보학 기술력을 검증받았다. 또한 배터리, 반도체, 3D 프린팅, 섬유, 플라스틱, 화장품 등 다양한 산업 분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다.
숫자와 전망 너머에서, 나는 폴리머라이즈가 가져올 변화의 본질에 더 관심이 갔다. 물질정보학이라는 새로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 우연을 필연으로, 혼돈을 질서로 바꾸려는 시도. 그것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물질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를 요구한다.
“한국 비즈니스 문화는 더 직접적인 문화였습니다. 예를 들어 맥락에 따라 움직여지는 일본은 모든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동의를 해야 합니다. 이와 다르게 한국은 빠르게 결정 내고 다소 직접적인 비즈니스 문화죠. 그런 환경이었기에 시장에 더 빨리 진출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직설적인 의사소통 방식에 쿠날은 오히려 매력을 느꼈다. 빠른 결정, 명확한 의사표현. 그것은 스타트업이 추구하는 속도와 효율이라는 가치와 일치했다.
“제품이 시장에서 꽤 빨리 선택되고 있기 때문에 기업도 빠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한국 고객들은 매우 까다롭고, 고품질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속도와 품질. 현대 한국사회의 두 가지 키워드. 쿠날은 한국의 까다로운 고객들이 요구하는 고품질을 맞추기 위해 팀을 빠르게 구축해야 한다는 도전에 직면했다. 그것은 마치 정확도를 유지하면서도 더 빠른 실험 결과를 내야 하는 그들의 기술과도 닮아 있었다.

미래를 향한 비전과 조언
“한국시장에 대한 강한 목표가 있습니다. 앞으로 3-4년 안에서 시장에서 목표로한 수익을 창출한다면 플립(flip, 본사 이전)할 예정입니다. 만약 우리가 60% 정도 시장점유율을 차지한다면, 한국에서 상장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숫자가 말해주는 냉정한 전략 너머에는 한국이라는 땅에 뿌리내리고 싶은 바람이 담겨 있었다.
한국 마켓에 진입하고 싶은 다른 외국 스타트업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하드웨어 분야나 빠르게 변화하는 소비재 분야의 외국 스타트업이라면 KSGC(K-스타트업 그랜드 챌린지) 프로그램을 활용하세요. 이 프로그램은 한국 시장을 탐색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한국 정부와 다양한 스타트업 인큐베이터로부터 체계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단순히 자체 시장으로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스타트업 커뮤니티에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한국에 와서…”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눈빛에는 이국땅에서 맞이한 낯선 순간들, 이해와 오해의 경계를 오가며 배운 것들에 대한 사색이 깃들어 있었다. “한국인의 문화와 기업 윤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매우 감사하고 기쁩니다.”
단순한 의례적 인사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계를 확장하는 일이다. 쿠날이라는 개인과 폴리머라이즈라는 기업이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또 한국의 산업 지형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 만남 자체가 이미 새로운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다.
쿠날과의 대화를 마치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 침묵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 폴리머라이즈는 어쩌면 물질의 언어를 배우고,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통역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테프론이 우연히 발견된 시대에서, AI가 물질의 속삭임을 듣는 시대로. 우리의 세계는 또 한 번 변화하고 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