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이 배경음악처럼 흐르는 요즘, 우리는 모두 소비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다. 내가 가진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사람들은 예전과 다른 태도를 보인다. 모든 지출을 줄이는 대신, 의미 있고 실용적인 곳에는 지갑을 열어주는 ‘선택적 소비’ 시대가 도래했다.
딜로이트가 발간한 ‘2025년 1분기 소비자 신호(Consumer Signals)’ 보고서는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세계 17개국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 따르면, 한국 소비자들은 재정 웰빙 지수(FWBI)가 7개월 연속 최하위권을 기록하며 경제 상황에 대한 비관적 인식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들이 단순히 모든 소비를 줄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생존과 욕망 사이에서
매달 결정해야 하는 지출 목록 앞에서 현대인들은 생존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생필품 가격은 계속 오르고, 월급은 제자리에 있다. 2월 생활물가지수는 전달 대비 2.6% 상승하며 지난해 7월 이후 7개월 만에 최대 폭으로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들은 무조건 지갑을 닫는 대신, 지출에 우선순위를 두기 시작했다.
“한국 소비자들은 여전히 소비 절감 계획을 유지하며 절제된 소비 기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가·의류·식자재 등 일부 품목에서는 다른 품목에 비해 지출을 지속하는 경향이 확인됩니다.”
딜로이트 소비자 부문 리더 김태환 파트너는 이제 소비자들이 “무턱대고 소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만족과 실용적 타당성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소비를 추구한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소비 선택 기준이 까다로워졌다는 것이다.
필수와 선택의 경계에서
지금 소비자들은 정말 필요한 것과 단순히 원하는 것을 구분하는 데 능숙해졌다. 그렇다고 모든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아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소비자들은 식료품(15%)과 저축 및 투자(14%), 여가활동(12%), 주택/거주비용(10%) 순으로 지출하고 있다.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우선시하되, 일상에 활력을 주는 여가 활동에도 상당한 비중을 할애하는 균형감이 엿보인다. 특히 과시성 구매 금액은 3개월 연속 8만 원 수준을 유지하며, 글로벌 순위가 9위에서 5위로 상승했다. 고환율과 고물가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택적 소비가 유지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이런 소비 패턴은 연령대별로 다소 차이를 보인다. 18~34세 젊은 층은 여가와 의류 구매에 상대적으로 많은 돈을 쓰며, 35~54세 중장년층은 교육비와 주거비에, 55세 이상 세대는 필수재와 건강 관련 지출에 중점을 둔다. 세대별로 소비 우선순위가 다른 것이다.
의미를 찾는 소비자들
우리는 왜 그토록 이불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가? 왜 모든 것이 불안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어떤 소비는 포기하지 않는가? 그것은 단순한 욕망 충족 이상의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 소비자들의 과시성 소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식자재(33%)와 의류·액세서리(33%)다. 이는 단순한 과시가 아니라 외형과 실용이 결합된 ‘보이는 실용소비’ 경향을 반영한다. 구매 동기를 살펴보면 정서적 위안(16%), 실용성(14%), 내구성(13%) 순으로, 감정적 만족과 기능적 가치가 조화를 이루는 소비를 지향한다.
이런 소비 패턴은 역설적으로 보인다.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면서도, 단순히 가격만으로 구매를 결정하지 않는다. 불확실성이 큰 환경에서 오히려 소비자들은 ‘의미 있고 오래 남는 소비’에 가치를 둔다. 그것이 일종의 심리적 방어막이자 작은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여행과 경험의 가치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여가 활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다. 전체 소비가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여가 지출은 12%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18-34세 젊은 층의 경우, 여가 여행 의향이 다른 세대보다 뚜렷하게 높다.
이들은 국제선 항공편 이용 계획(35%), 국내선 항공편 이용 계획(37%), 호텔 숙박 계획(47%)에서 다른 연령대보다 더 적극적이다. 소비의 만족도를 단순히 물건 소유가 아닌 경험에서 찾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55세 이상 고령층은 피로가 적은 교통수단인 기차 이용 비율(32%)이 다른 연령대보다 상대적으로 높아, 편안함과 안정성을 중시하는 여행 성향을 보인다. 각 세대가 추구하는 가치가 여행 방식에도 반영되는 것이다.
불안 속에서도 선택하는 용기
딜로이트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소비 의향 지수는 -9%로, 소비 절감 계획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글로벌 소비자들은 평균 2%로 지출 확대 흐름을 보인다. 이런 차이는 한국 소비자들이 처한 특수한 경제 환경과 심리적 불안감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점은 한국 소비자들이 모든 소비를 일괄적으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비 축소 속에서도 자신만의 기준과 우선순위에 따라 선택적 소비를 이어간다. 그것은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작은 저항이자 자기 보존 방식이다.
재정적 웰빙 지수가 낮더라도, 내구성 있는 의류 하나, 품질 좋은 식재료 한 봉지, 기억에 남을 여행 한 번은 포기하지 않는 소비자들. 이들은 무분별한 소비도, 극단적인 절약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서 균형을 찾고 있다.
기업의 새로운 과제
이런 변화는 기업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이제 소비재와 유통 기업은 전방위적으로 소비를 자극하는 데에서 벗어나, 까다로워진 소비자의 선택 기준을 충족할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세대별로는 차별화된 접근이 필요하다. MZ세대에게는 경험과 자기표현을 중시하는 가치와 브랜드 정체성을, 중장년층에게는 가성비와 기능성 중심의 실용적 소비를, 시니어층에게는 건강과 안정감, 신뢰를 강조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특히 프리미엄 제품군은 단순한 과시가 아닌, 실용성과 내구성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필요하다. “고가의 제품 구매는 소비 후회가 아닌, 오래 쓰는 이유 있는 소비”라는 정당화 논리가 소비자들에게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다.
불확실함 속의 확실한 선택
우리 시대의 소비는 더 이상 단순한 욕망 충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이자 자기 정체성의 표현이 되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소비자들은 자신만의 확실한 기준을 세워가고 있다.
딜로이트 보고서의 결론은 명확하다. “불확실성으로 인한 소비자의 재정적 불안감이 확대로 소비는 감소하고 있으나, 소비자들이 의미 있고 실용적이라고 인식하는 선택적 소비는 유지되고 있다.”
소비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다만 그 방식과 의미가 변화하고 있을 뿐이다. 불필요한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정말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소비자들. 이들의 선택이 만들어갈 새로운 소비 패러다임은 어떤 모습일까.
결국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생존을 위한 필수재와 삶의 질을 위한 선택재 사이에서, 현명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2025년 한국 소비자들이 마주한 과제이자, 불안한 시대를 헤쳐나가는 지혜일 것이다.
소비는 결국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단순한 물건 구매를 넘어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세상과 관계 맺는다. 그런 의미에서 ‘절제에서 선택으로’ 변화한 소비 기준은 단순한 경제 현상이 아닌, 시대 정신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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