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경제 주역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혁신벤처단체협의회(혁단협)가 제21대 대선을 앞두고 ‘벤처정책 제안서’를 발표했다.
우선 현실을 직시하자. 2024년 기준 벤처기업 숫자는 38,216개사. 이들의 총 매출액은 242조원으로 재계 3위 수준이다. 총 고용 규모는 93.5만 명으로 삼성, 현대차, LG, SK 등 4대 대기업그룹의 74.6만 명을 넘어섰다. 더 놀라운 것은 R&D 투자 비율이다. 벤처기업은 매출액 대비 4.6%를 연구개발에 투자한다. 대기업(1.8%), 중견기업(1.1%), 중소기업(0.8%)과 비교해 보라. 우리 경제의 미래는 이미 벤처기업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2021년 이후 3년 연속 기술창업이 감소하고 있다. 벤처투자도 위축되었다. GDP 대비 벤처투자 규모 비율은 0.26%에 불과하다. 이스라엘(1.72%), 미국(1.09%)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게다가 글로벌 100대 유니콘 기업 중 17개는 국내 법규제로 사업이 불가하다고 한다. 과도한 규제가 혁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혁신벤처단체협의회는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3대 중점 과제를 제안했다. 첫째, 68개 법정기금의 벤처·스타트업 투자 의무화. 둘째, 주52시간 제도 등 근로시간 제도 개편. 셋째, 규제혁신기준국가 목표제 시행 및 산업규제 권한의 지방 이양. 이 외에도 4대 분야 82개 과제를 담았는데, 이 숫자만으로도 벤처계의 절실함이 느껴진다.
이 제안들을 읽으며 특히 눈길이 가는 것들이 있었다. 예컨대 법정기금 1,023조원의 5%인 51조원을 벤처·스타트업에 투자하자는 제안이다. 또한 벤처기업 핵심 인력에게 주52시간제 예외를 인정하자는 주장도 실용적이라 생각한다. 혁신은 시간표대로 찾아오지 않으니 말이다.
이 제안서의 가장 큰 의미는 IMF 외환위기 이후 28년 만에 벤처생태계가 다시 한번 경제위기 극복의 핵심 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1997년 IMF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2019년 코로나 팬데믹 등 대한민국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벤처기업은 구원투수 역할을 해왔다.
놀라운 건 그동안의 성장이다. 벤처기업 수는 28년 전 2,042개에서 40,081개로 20배 증가했다. 벤처펀드 신규결성액은 825억원에서 12조 7,627억원으로 무려 155배 늘었다. 그러나 2020년 이후 3高(물가, 금리, 환율)와 글로벌 경기침체로 벤처생태계는 조정기에 접어들었다.
제안서는 잠재성장률 3% 달성을 위해 벤처기업의 고용 및 생산 비중을 현재 10% 미만에서 30%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벤처투자 시장 규모를 현재 10조 원에서 50조 원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벤처투자는 거시경제적 승수효과가 2.6배에 달한다고 하니, 1조 원을 투자하면 GDP가 2.6조 원 증가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우리 사회는 ‘대기업 성장 = 국가 성장’이라는 공식에 너무 오래 매몰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 벤처기업은 이미 대기업을 넘어서는 고용과 혁신을 창출하고 있다.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보여주듯, 벤처생태계는 국가 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제도는 항상 현실보다 뒤처진다. 혁신벤처단체협의회가 82개나 되는 과제를 제안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벤처기업 범위 확대, CVC 규제 완화, 퇴직연금의 벤처투자 허용, 수도권 대학의 학과 정원 규제 개선, 비대면진료 규제혁신 등 현장의 목소리가 담긴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차기 정부는 이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벤처정책을 국가 경제정책의 최우선 아젠다로 삼을까? 정치권이 경제 전문가들의 조언보다 여론과 정치적 계산에 더 민감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제안서는 13개 혁신벤처·스타트업 단체가 뜻을 모아 만든 것이니, 무게가 있다.
결국 우리 경제의 미래는 패러다임의 전환에 달려있다. 대기업 중심에서 벤처기업 중심으로, 규제 중심에서 혁신 중심으로, 과거 성공모델에서 미래 성장동력으로. 혁신벤처단체협의회의 제안서는 이런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민간이 참여하는 정책목표의 수립과 범정부적 로드맵의 도출, 그리고 과감하고 신속한 혁신정책의 이행이 필요하다”는 그들의 주장에 귀 기울일 때다.
한편 혁신벤처단체협의회는 2017년 9월 출범한 단체로 정책 아젠다 개발 및 對정부 제언 활동을 하고 있다. 벤처기업협회를 비롯해 코리아스타트업포럼, 한국바이오협회, 한국인공지능협회, 한국핀테크산업협회 등 13개 혁신벤처·스타트업 단체가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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