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그 찰나가 아니라, 결정에 따른 실천을 지속하는 긴 시간일지도 모른다. 아산나눔재단의 2024년 연차보고서를 펼쳐보면 이런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화려한 구호가 아닌 꾸준한 실천의 힘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2011년, 정주영 창업자 서거 10주기를 맞아 출범한 이 재단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룰 수 있는 세상”이라는 비전을 13년째 실천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선언 대신,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일관된 걸음으로 걷고 있는 그들의 행보는 어쩐지 묵직한 울림을 준다.
재단의 심장 격인 ‘MARU(마루)’는 특별한 주목을 받을 만하다. 2014년 개관한 MARU180과 2021년 선보인 MARU360. 이름 그대로 세상을 180도, 360도 변화시키겠다는 포부를 담은 이곳은 스타트업, 벤처캐피털, 액셀러레이터가 한데 어우러진 작은 생태계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56개 팀이 마루성장존에, 73개 팀이 마루시드존에 입주했다. 숫자만 보면 단순하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는 아이디어와 관계의 생태계는 훨씬 복잡하고 풍요롭다. 공간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공간을 채우는 순환의 법칙이 여기서도 작동하는 것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 중 하나는 경계를 넘나드는 능력이다. 기업과 사회의 경계, 영리와 비영리의 경계, 국내와 해외의 경계. 이런 경계들은 종종 우리의 사고를 제한하고 가능성을 축소시킨다. 아산나눔재단의 프로그램들은 이런 경계를 지우는 데 집중한다. ‘아산 유스프러너’와 ‘아산 티처프러너’는 청소년과 교사들에게 기업가정신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소개한다. 2024년 4,641명의 학생과 71명의 전문 강사가 참여한 이 프로그램은 경계를 넘는 첫 걸음을 내딛게 한다.
‘정주영 창업경진대회’와 ‘아산 보이저’는 창업을 꿈꾸는 이들의 실질적인 도전을 지원한다. 특히 창업경진대회는 47:1이라는 높은 경쟁률 속에서 30개 팀을 선발해 집중 육성했다. 모빌리티, 헬스케어, 콘텐츠, 부동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도전하는 이들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과정이다.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에서는 사회혁신가들이 경영 마인드를 배우며 또 다른 경계를 넘는다.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 사이의 균형,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2024년은 ‘사람과 환경을 생각하는 기업가정신’이라는 목표가 돋보였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대학과 손잡고 ‘아산 유니버시티’를 통해 기후테크 청년 창업팀을 육성했으며, MARU 내부에서도 LED 조명 교체 등을 통해 약 4%의 에너지를 절감했다. 52개의 기후테크 창업팀이 발굴되었고, 360회의 멘토링이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조직이 ESG를 말로만 외칠 때, 이들은 조용히 실천하고 그 결과를 숫자로 증명하고 있었다.
글로벌 확장이라는 더 큰 도전도 시작했다. 실리콘밸리에 ‘MARU SF’라는 해외 거점을 마련해 국내 스타트업의 미국 진출을 돕겠다는 계획이다. ‘아산 보이저’와 ‘아산 두어스’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초기 및 예비 창업팀이 글로벌 시장에서 가능성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종종 가장 뛰어난 인재와 아이디어가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두뇌 유출’이라 부르며 한탄하는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아산나눔재단은 다른 접근을 취한다. 인재가 세계로 나가는 것을 막기보다, 인재가 더 넓은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부분은 ‘아산 상회’를 통한 포용적 창업 지원이다. 북한이탈청년 창업가들의 성장을 돕는 이 프로그램은 배경, 국적, 정체성의 차이를 넘어 모두가 기회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한국 사회가 점점 다양해지는 가운데, 이런 포용적 접근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2025년, 아산나눔재단은 ‘프론티어 기업가정신’을 키워드로 삼았다. 정주영 창업자의 말처럼 “길이 없으면 찾고, 찾아도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철학을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특히 ‘정주영 창업경진대회’를 ‘개척(Frontier)’이라는 주제로 새롭게 개편하고, 글로벌 트랙, 다양성 트랙, 기후테크 트랙, 예비창업 트랙 등 네 개의 전형으로 세분화한 점이 눈에 띈다. 이는 단순한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창업생태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는 실질적인 변화다.
정몽준 아산나눔재단 명예이사장은 연차보고서 인사말을 통해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아산 정주영 현대 창업자의 ‘프론티어 기업가정신’은 국내를 넘어 세계 무대에 도전하는 청년들에게도 귀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아산나눔재단은 앞으로도 청년들이 새로운 영역에 과감히 도전하고 마음껏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을 만들어 가겠다”고 약속했다.
숫자로 보면 2024년 아산나눔재단은 약 271억 원의 사업 수익과 203억 원의 사업 비용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 건조한 숫자들 속에는 수많은 도전과 실패와 성공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청년창업 지원에 60%, 기업가정신 교육에 16%, 사회혁신 지원에 9%, 혁신생태계 조성에 10%의 자원이 투입되었다. 이런 분배는 그들의 우선순위와 철학을 보여준다.
재단은 또한 투명 경영을 위해 재무상태와 사업성과를 상세히 공개하고 있으며,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 공익법인으로서 관련 법과 의무사항을 준수하고 있다. 2024년 한국가이드스타 평가에서 5년 연속 별 3개 만점을 받은 것도 이런 노력의 결과다.
경계를 넘는 자들의 이야기. 그것이 아산나눔재단이 써나가는 서사다. 단순한 자선단체가 아니라, 사회변화의 촉매제로 기능하고자 하는 그들의 행보는 우리 사회에 깊은 울림을 준다.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꾸준한 실천, 화려한 수사가 아닌 구체적인 행동, 그것이 진정한 변화를 만드는 힘이다. 우리 사회에 더 많은 경계의 파괴자가 필요한 이때, 아산나눔재단의 2024년은 의미 있는 이정표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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