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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 속 마지막 만원짜리의 의미

언젠가부터 지갑이 가벼워졌다. 카드 몇 장과 신분증 정도. 현금은 거의 들고 다니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카드마저 사라질 모양이다. 디지털 화폐라는 것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돈의 무게와 정치의 속도

어렸을 때 아버지 지갑은 무거웠다. 지폐뿐만 아니라 동전들이 바닥에 깔려 있었고, 각종 카드와 영수증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지갑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가죽과 잉크, 그리고 무언가 삶의 흔적 같은 것들이 뒤섞인.

요즘 내 지갑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카드 서너 장, 신분증,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만원짜리 지폐 두어 장. 그게 전부다. 커피를 사든, 책을 사든, 심지어 택시비를 내든 모든 것이 스마트폰으로 해결된다.

12일 웹3 컨설팅 기업 디스프레드에서 흥미로운 보고서를 발간했다. ‘디지털 통화 3축의 공존 전략’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였는데,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지금 돈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지난 10일, 더불어민주당 민병덕 의원이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안’을 발의하면서 이 변화가 단순한 기술적 진화가 아님이 분명해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디지털 화폐를 둘러싼 세 개의 세력이 있다고 한다. 중앙은행, 시중은행, 그리고 테크 기업들. 각자 자신만의 디지털 화폐를 만들려고 한다. CBDC, 은행 스테이블코인, 비은행 스테이블코인이라는 그럴듯한 이름들을 붙여가면서. 그런데 이번 법안을 보면서 네 번째 세력이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정치권이다. 그들은 규칙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게임의 판을 짜는 사람들. 어쩌면 가장 강력한 플레이어일지도 모른다.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가 올해 5월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화폐의 대체재라 비은행 기관이 마음대로 발행하면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상당히 저해할 수 있다.” 번역하면 이렇다. ‘민간이 마음대로 돈을 만드는 건 절대 안 된다.’ 하지만 정치권은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디지털 경제의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우리나라가 선도국가로 서기 위한 제도적 초석”이라고 했으니까.

5억원의 함정과 권력의 재편

법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대통령 직속 디지털자산 위원회’ 신설이다. 여기에 민간 위원 비중을 3분의 2 이상으로 한다고 했다. 시장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언뜻 보면 합리적이다.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니까 민간 전문가들의 의견을 많이 들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규제 포획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규제를 받는 업계가 규제를 만드는 과정에 과도하게 개입하게 되는 상황 말이다.

더욱이 한국디지털자산협회라는 민간 단체에 가상자산 거래지원 적격성 심사 등 자율규제를 맡긴다고 했다. 자율규제. 듣기에는 좋지만, 결국 업계가 스스로를 규제한다는 뜻이다. 과연 그게 제대로 작동할까?

자기자본 5억원. 절대 적은 돈은 아니지만, 화폐 발행권을 얻기 위한 비용치고는 그리 비싸지 않다. 웬만한 핀테크 스타트업이라면 마련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다. 법안에는 발행 준비금 100% 유지와 발행 기업 자산과 고객 준비금을 분리하는 ‘도산절연’ 장치 등 투자자 보호 조치들이 담겨 있다. 좋은 취지다. 하지만 이런 조건들을 실제로 충족하려면 5억원보다 훨씬 많은 자본과 시스템이 필요하다.

결국 진짜 승자는 토스, 카카오페이 같은 이미 규모를 갖춘 핀테크 대기업들이 될 가능성이 높다. “금융 민주화”를 외치지만, 실상은 “핀테크 과점화”로 귀결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카카오페이로 커피를 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 카카오라는 사기업이 만든 결제 시스템을 통해 돈을 쓰고 있다. 물론 그 뒤에는 은행과 카드사가 있지만, 실질적인 경험은 카카오의 것이다. 그렇다면 카카오가 자체 화폐를 발행한다면? 카카오코인이나 카카오머니 같은 것을? 기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5억원이라는 진입장벽도 카카오에게는 우스운 수준이다.

편의성은 분명하다. 해외 송금이 쉬워지고, 환전 수수료가 없어지고, 소상공인들의 카드 수수료 부담도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가 잃는 것은 무엇일까? 최근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그런 우려가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디지털 위안화를 통해 모든 거래를 추적하고, 개인의 소비 패턴을 분석하고, 심지어 사회신용점수까지 연결하는 시스템.

사라지는 것들과 남겨야 할 것들

생각해보면 돈의 역사는 곧 권력의 역사였다. 조개껍데기에서 시작해서 금과 은을 거쳐, 지폐가 등장하고, 이제는 디지털 숫자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돈을 만들고 통제할 권리는 늘 권력자들의 몫이었다. 흥미로운 건 이번엔 테크 기업들도 이 게임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서클이나 페이팔 같은 회사들이 자체적으로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고 있다. 국가도 은행도 아닌 사기업이 화폐를 만드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정치권이 이 흐름을 주도하려 한다. 규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법을 만들어서.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방향일까? 물론 이런 고민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지니어스 액트가 상원 사전 표결을 통과했다. 비은행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조건부로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절대강자 서클이 EU의 미카 인가 절차를 밟고 있다. 규제를 피하려던 암호화폐 기업들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규제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규제받는 스테이블코인”이 되는 게 오히려 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중국은 아예 다른 길을 택했다. e-CNY로 민간을 우회해서 직접 디지털 화폐를 밀어붙이고 있다. 각자 다른 방식이지만, 결국 “디지털 화폐 패권”을 잡으려는 목표는 같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민 의원의 “속도가 중요한 시기”라는 말도 이해가 된다.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런 식의 속도전이 바람직할까?

보고서에서 제시하는 해법 중 하나가 ‘아발란체 서브넷’이라는 기술이다. 설명을 들어보니 흥미로웠다. 블록체인의 투명성과 효율성은 유지하되, 참여자는 미리 검증된 기관으로 제한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반쯤 열린 시스템’이다. 완전히 개방하지도, 완전히 닫지도 않는. 한국적인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늘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왔다. 극단으로 가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하지만 이런 기술적 해법도 결국은 정치적 결정에 달려 있다. 법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논의를 지켜보면서 든 의문이 하나 있다. 과연 이 혁신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결제가 불편해서? 이미 카카오페이, 토스, 네이버페이가 있다. 해외 송금이 비싸서? 그것도 나름 해결책들이 있다. 금융 포용성을 위해서? 한국에서 은행 계좌 개설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결국 진짜 수혜자는 이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하는 기업들이 아닐까 싶다. 토스나 카카오 같은 기존 핀테크 대기업들, 그리고 새롭게 진입하려는 기업들. ‘금융 민주화’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기존 과점 구조가 디지털 버전으로 재편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치권은 규제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지갑이 가벼워진 것처럼, 앞으로는 더 많은 것들이 사라질 것이다. 카드도, 현금도, 어쩌면 은행 지점도. 모든 것이 스마트폰 안의 앱으로 수렴해갈 것이다. 편리함의 대가로 우리가 잃는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익명성, 프라이버시, 그리고 무엇보다 선택권. 미래에는 정말로 현금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는 디지털 화폐 시스템을 통제하는 자가 사실상 모든 경제 활동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무서운 일이다.

어쨌든 변화는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문제는 어떤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변화할 것인가이다. 이번 디지털자산기본법이 통과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금융당국의 반대도 있고, 한국은행의 우려도 있다. 하지만 정치적 동력은 이미 만들어졌다. 중요한 건 이런 변화가 정말로 국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특정 이해집단을 위한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리고 편의성만으로는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디지털 화폐든 아니든, 결국 중요한 건 그것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문제다. “속도가 중요한 시기”라고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방향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곳이 정말로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인지. 그것을 잃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기자 / 제 눈에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연예인입니다. 그들의 오늘을 기록합니다. 가끔 해외 취재도 가고 서비스 리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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