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고가 있는 집
애플, 구글, 아마존. “차고에서 시작한.” 이 회사들 앞에 으레 붙는 수식어다. 작고 초라한 곳에서 시작해 세계를 바꿨다는, 우리가 반복해서 듣는 이야기.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애플 I을 만들던 1976년, 그 차고의 주소는 캘리포니아 로스앨토스 크리스트 드라이브 2066번지였다. 지금 그 집의 시세는? 대략 40억 원대다. 실리콘밸리 한복판, 좋은 학군, 안전한 동네. 잡스의 양아버지 폴 잡스는 해안경비대 출신 정비공이었고, 어머니 클라라는 회계사였다. 중산층 가정이었다.
재미있는 건 이거다. 워즈니악은 2014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차고에서 설계도 하지 않았고, 프로토타입도 만들지 않았고, 제품 기획도 하지 않았어요.” 실제 작업은 대부분 워즈니악의 HP 사무실 책상과 잡스의 침실에서 이루어졌다. 첫 50대 애플 I은 부모님 집 여유 침실에서 조립됐다. 차고는? 주로 완성된 제품을 포장하고 보관하는 공간이었을 뿐.
차고에서 만들지도 않았는데, ‘차고에서 시작한 애플’이 되었다. 왜? 그게 더 좋은 이야기니까.
차고 신화가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 차고가 아니라 차고가 있는 집. 잔디가 깔린 마당. 조용한 교외 동네. 그리고 그 안에서 “실패해도 괜찮아”라고 말해줄 수 있었던 사람들.
제프 베이조스가 아마존을 시작한 시애틀의 차고도 마찬가지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구글을 키운 멘로파크의 차고 역시. 이들은 ‘차고’에서 시작했지만, 그 차고는 누군가의 집이었고, 그 집은 실패해도 노숙자가 되지 않을 만큼 든든한 기반 위에 있었다.
한국의 20대가 창업한다고 하자. 사무실이 필요하다. 선택지는? 월세 50만 원짜리 고시원, 보증금 500만 원 원룸, 아니면 코워킹 스페이스 월 30만 원. 부모님 집 방 한 칸? 그나마 있으면 다행이다. 차고? 그런 건 애초에 선택지에 없다.
실리콘밸리의 차고는 공짜였다. 임대료 제로. 전기세와 인터넷만 내면 됐다. 실패해도 잘 곳은 있었다. 식사는? 부모가 챙겨줬다. 이들이 실패해도 굶지 않았던 이유다.
2025년, 차고는 더 이상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차고가 중요했던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1976년에는 그게 차고였다. 부품을 놓을 책상, 납땜 인두를 꽂을 콘센트, 그리고 방해받지 않을 시간.
지금은 다르다. 2010년, 케빈 시스트롬은 iPhone 앱 하나로 인스타그램을 만들었다. 13명의 팀. 2년 만에 페이스북에 10억 달러에 매각됐다. 물리적 차고는 필요 없었다. 맥북 하나, 클라우드 서버, 그리고 앱스토어면 충분했다.
하지만 여전히 필요한 것이 있다. 시간. 6개월, 1년, 때로는 2년. 수익이 없어도 버틸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을 확보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생활비, 최소한의 안전망. 결국 차고가 아니라 ‘차고가 있는 집’이 핵심이었던 것처럼, 지금도 핵심은 ‘버틸 수 있는 조건’이다.
1인 개발자가 앱을 만든다. 크리에이터가 영상을 올린다. 디자이너가 프리랜서로 산다. 이들에게 차고는 부모님 집 작은 방일 수도 있고, 월세 40만 원짜리 원룸일 수도 있다. 어떤 이는 낮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 코딩을 한다. 어떤 이는 회사를 다니면서 퇴근 후 3시간씩 자기 프로젝트를 만든다.
이들은 차고 없이 시작한다. 시작은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가.
우리는 성공한 차고만 기억한다. 애플의 차고, 구글의 차고, 아마존의 차고. 하지만 그 옆집 차고에서도, 그 다음 블록의 차고에서도, 누군가는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모른다. 실패했으니까.
“차고에서 시작하면 성공한다”가 아니다. “성공한 회사들 중 일부가 차고에서 시작했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수천, 수만 개의 차고 창업 중에서 우리가 아는 건 여섯 개뿐이다.
차고는 시작일 뿐이다. 그 다음은? 자본이 필요하고, 사람이 필요하고,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운이 필요하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시작한다. 왜? 아마도 시작하지 않으면 확률은 0%지만, 시작하면 0.1%라도 되니까.
요즘 스타트업들은 ‘차고 스토리’를 만드는 데 열심이다. 실제로 차고에서 시작하지 않았어도, 마치 그랬던 것처럼 포장한다. “우리는 초라한 사무실에서 시작했습니다.” 웹사이트에 흑백 사진 한 장. 좁은 책상, 낡은 의자, 벽에 붙인 포스트잇.
초라함은 하나의 미학이 되었다. 스타트업 문화 속에서 ‘초라한 시작’은 일종의 훈장이다. 정말 초라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초라했다고 말하는 것, 그 서사가 중요하다.
한국에는 차고가 없다. 아니, 있긴 하지만 미국처럼 모든 집에 있는 건 아니다. 그럼 한국의 창업자들은 어디서 시작했을까?
배달의민족은 2010년 답십리 카페베네에서 시작했다. 사무실이 없었다. 저녁마다 카페에 모여 앉거나, 스카이프로 회의를 했다. 새벽에는 창업자 김봉진이 직접 전단지를 수거하며 데이터를 모았다. 첫 정식 사무실은 2013년, 창업 2년 만에 얻었다.
네이버는 1999년 역삼동 서울벤처타운에서 시작했다. 차고는 없었지만 테헤란로의 작은 사무실 한 칸이 있었다. 4차례 이사를 거쳐 2010년에야 자체 사옥을 지었다.
박현호는 11번째 창업으로 크몽을 만들었다. 10번 실패했다. 빚을 지고 지리산에 은둔했다. 거기서 ‘이걸 내가 안 하면 후회하겠다.’싶은 서비스를 시작했다. 차고? 없었다. 서울 사무실? 없었다. 신용등급 10등급. 하지만 시작했다.
4년 뒤, 월 거래액 20억. 신용등급 1등급. 누적 투자 300억. 그제야 서울로 올라왔다. 차고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 빚과 실패에서 시작했다. 그게 한국의 창업이다.
차고는커녕 책상 하나 없이 시작한 곳들. 그들에게 카페 테이블이, 오피스텔 한 칸이, 지리산 은둔 생활이, 그게 차고였다.
애플의 차고는 지금 관광 명소가 됐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여기서 모든 게 시작됐어.” 맞다. 여기서 시작됐다. 하지만 여기서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가 단순한 차고가 아니라 ‘집’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차고가 없을지도 모른다. 괜찮다. 차고는 비유일 뿐이다. 중요한 건 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그게 원룸이든, 카페 한 자리든, 부모님 집 작은 방이든.
도구는 좋아졌다. 사무실 없이도, 직원 없이도, 시작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버텨야 한다. 6개월, 1년, 2년. 수익 없이 만들고, 테스트하고, 고치는 시간. 그 시간을 견뎌줄 건 도구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다.
성공 확률은 낮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시작한다.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작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시작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애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기 위해서. 차고 신화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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