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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은 회장, “빚을 갚는 마음으로 청년 창업 돕는다.”

손주은 회장 ⓒ플래텀

실리콘밸리는 엔젤투자자가 풍족한 환경이다. 스타트업 창업자 뿐만 아니라 팀원으로 참여해서 돈을 번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후배 창업자를 위해 투자를 한다. 그 결과 선순환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국내는 엔젤투자자 숫자가 적기도 하지만 투자도 잘 안 이루어 진다. 우선 성공한 창업가 자체가 적다. 엑싯규모도 개인으로는 크겠지만, 기업차원에서 크다고 할 수 있는 사례가 많지 않다. 기업으로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기업은 게임이나 이커머스 외에는 없다시피 한 상황이다.

손주은 메가스터디그룹 회장은 수능세대에게 가장 유명한 학원 강사이자 성공한 사업가라 평가받는다. 그가 지난해 사재 300억을 출자해 설립한 윤민창의투자재단은 청년 인재 발굴을 통해 창업을 이끌고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재단은 올해 4월 9개 청년 스타트업에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향후에도 적극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나는 성공적이고 좋은 비즈니스를 한 것이 아니다. 청년세대들이 힘든일을 겪는 사이에 돈을 많이 벌었을 뿐, 깨끗하게 벌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해 재단을 설립했다.”

6월 마지막 날에 열린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프라이머 11기 데모데이에 손주은 회장이 키노트 연사로 등장해 자신의 창업 과정과 재단을 통한 스타트업 지원 배경을 이야기했다.

손회장은 “다들 성공을 꿈꾸며 창업을 시작하겠지만, 반드시 성공적일 필요는 없다. 창업 자체가 인생이 달라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내가 사업을 하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고, 어설픈 선택이었다. 하지만 순수했고, 그 열정이 지금을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공무원 시험에 청년들이 몰리는 세태를 아쉽다 말하며 “1.8%의 합격률 밖에 안 되는 말도 안되는 시험에 엄청난 수의 청년들이 몰리고 있다. 이를 대변하는 지역 노량진을 바꿔 청년들이 새로운 꿈을 꾸는 곳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손 회장은 PT자료가 아닌 본인에게 익숙한 화이트보드에 필기를 하며 강연을 진행했다. 이하 손 회장의 강연 전문.

죽기전에 내가 진 빚을 갚고 싶었다.

사실 나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지도 못 했고, 좋은 비즈니스를 한 것도 아니다. 청년세대들이 힘든일을 겪는 사이에 돈을 많이 벌었을 뿐이다. 깨끗한 돈도 아니라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인생이 점점더 부끄러워진다는 생각을 많이한다. 그래서 죽기전에 내가 진 빚이라도 갚고 싶었다. 그래서 설립한 것이 윤민재단(*윤민은 1991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손 회장의 딸 이름)이다.

다들 인생을 살며 고민이 있을거다. 나 역시 10대 후반에 가졌던 고민이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내 인생을 통틀어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부조리’라는 것이다.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사람이 없을거고, 죽고 싶어 죽는 사람도 없을거다. 그저 세계에 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불합리하고 부조리의 연속이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늘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는 것이 삶이다. 나는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사회의 부조리라 불리우는 근본적인 문제를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 했고, 어릴때 품었던 고민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어설픈 삶을 살고 있다.

세간에선 나를 대단한 인물로 평가하지만, 스스로 되돌아보면 부끄럽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부끄러움의 크기가 더 커져간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이 모든 문제에 있어 가장 우선된 출발점이 아닌가 싶다.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순탄치 않았던 학창시절, 그리고 결혼

어릴때 내가 창업을 할 거라 생각해 본적이 없다. 제대로 답을 찾지 못 하던 시절 성급한 결정을 한 어떤 과정의 단면이 창업 계기가 되었다. 우연이었고, 어설픈 선택이었지만, 순수했고 그 열정이 근본 에너지가 되었다.

10대 후반 방황을 많이했다. 대학(서울대)도 삼수를 해서 21살에 들어갔다. 입학하자마자 424일 간 매일 만나던 연인과 실연의 아픔도 겪었다. 절망하고, 극복하고, 무너지고를 반복하다 3학년 때에는 밑바닥으로 떨어져 형편없는 삶에 빠졌다. 그래서 도망치듯이 군복무를 했다. 제대한 다음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방위 복무하다가 중학교 교사였던 아내를 만났다. 어떻게 보면 군생활도 제대로 안 한 거다. 그리고 별 생각없이 두 학기를 남겨놓은 상황에서 결혼을 했다. 아내는 결혼과 함께 교사일을 그만뒀다.

가정을 꾸렸으니 먹고 살아야 했는데, 단순하게 봤다. 어머니에게 ‘결혼을 하나 안 하나 어차피 지원할 돈이었으니 하숙비랑 학비를 대달라’ 했다. 그리고 아내가 모아놓은 돈 400만 원이 있었다. 그걸 합쳐서 신림2동에 방 2개짜리 12평 다세대 주택을 얻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평생 제일 좋은집이었다.

그런데 한 두달 살다보니 돈이 좀 모자르더라. 그래서 주변에서 하숙을 하던 여동생과 재수생이었던 남동생을 우리집으로 불러 들여 하숙비를 받았다. 나름 풍족했다. 하지만 이듬해 남동생이 대학에 합격하고 여동생과 아내 사이에 시누올케 문제가 발생해 하숙생 둘 다 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경제 위기가 왔다. 87년 2월 24일 아내가 돈이 3만원 밖에 안 남았다고 하더라. 아내가 알뜰하게 관리했지만 버는 것 없이 쓰기만 하니 잔고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가 기죽을 순 없고해서 ‘돈 벌어올께’ 큰 소리 쳤다.

서울대생이 왜 커피장사를 해?

고민하다 보니 문뜩 떠오른 것이 서울대 졸업식이었다. 서울대는 매년 2월 26일 졸업식이 열리는데, 그 추운날 실내도 아닌 대운동장에서 진행했다. 당시는 졸업정원 세대라 학부생 6천 명, 석박사까지하면 만 명이 한 꺼번에 졸업했다. 가족까지 합치면 졸업식장에 2~3만 명이 모이는 날인 것이다. 그래서 졸업식장에서 커피장사를 하면 된다고 봤다. 어떻게 보면 내 인생 첫 창업이었다. 만약 그때 커피장사를 안 했으면 내 인생은 지금과 달라졌을수 있다. 다들 성공을 꿈꾸며 창업을 시작하겠지만, 반드시 성공적일 필요는 없다. 창업 자체가 인생이 달라지는 원인이나 기회, 계기가 될 수 있다. 당시 내가 그랬다.

아내한테 커피장사를 해서 15만원 벌어오겠다 했다. 그정도면 부모님의 향토장학금이 오기 전에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재산의 1/3이었던 자본금 만 원으로 봉지커피와 종이컵을 샀다. 그리고 동네 이집저집 다니며 보온병 10개를 빌리고, 남동생한테 친구 한 명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러 오라고 했다. 26일 아침 8시에 밥먹고 물 끊여서 졸업식장에 갔다.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2~3만 명 와 있더라.

그런데 우리가 간과한 것이, 학교 앞에 2~30군데의 가판점이 들어서 있었던 거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가스로 물을 끊이고 토스트도 팔더라. 그들이 준비된 프로였다면 우리는 아마추어였던 셈이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동생이 게임 끝났으니 돌아가자 하더라.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그 가판점에 비해 딱 하나, 경쟁력이 있었다. 가판부스는 고정된 장소에 있는 반면에 우리는 돌아다니면서 팔 수 있었던 거다. 그 부스는 커피를 마시고 싶은 사람만 찾아오는 것이었던 것에 반해 우리는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서 식이 열리는 운동장에 들어가서 헤집고 다니며 장사하기로 결정했다.

졸업식장에서 커피를 팔며 대학동기, 선배, 후배를 많이 만났다.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왜 서울대생이 커피장사를 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고정관념이었다. 그래서 ‘생활비가 떨어져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하니 당황하더라.

커피 1잔에 500원씩 받았고, 2시간이 안 되서 완판을 했다. 15만 원의 목표 달성을 한 상태에서 마무리 된거다. 장사를 마치고 신림동 289번 버스 종점 앞 동태찌개집에서 다 같이 회식도 했다. 동생들에게 알바비도 주고.

커피장사를 성공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9시쯤 집에 와보니 전화기가 불이 나고 있었라. 내가 많이 귀찮게 했던 하숙집 아주머니가 걱정이 되서 전화를 한 것이다. 동문들 중 몇몇이 아주머니에게 내가 커피장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한 것이 원인이었다. 아주머니가 화가 많이 났더라. 대화 시작은 야단맞는 것으로 시작했다. 전화 첫 마디가 ‘맨날 속 썩이더만, 꼴좋다. 너 오늘 커피장사 했다며?’였다. ‘사정이 어려우면 자신한테 이야기하지 왜 그랬냐’고 하더라. 그리고 아주머니가 과외자리를 소개시켜 준다고 했다. 당장 오라는 걸 하루 미뤄서 다음날인 2월 27일에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렇게 첫 과외를 소개받았고 그게 3월 2일이다.

그리고 첫 과외에서 운명의 인물을 만난다. 커피 장사를 안 했으면 이 친구 못 만났을거다.

운명적으로 만난 첫 과외학생에게 한 말 “너 그렇게 살면 몸파는 사람만 못 해!”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었다. 이 친구 부모의 지위를 빼면 뭐하나 뛰어난 것이 보이지 않았다. 고민도 많아 보였고 반항기도 넘쳤다. 과외 첫 날에 얼굴도 안 들고 덤비더라. 돈을 받기 전이기도 해서 독설을 퍼부었다. “네 인생은 공부 아니면 그 어떤것도 구원할 수 없어. 이렇게 엉망인 상황을 이어가면 너는 너를 팔아먹을거야. 부모가 모아놓은 재산을 싸들고 가서 남의집에 팔려가게 되는거지. 몸파는 사람은 화대라도 받지만, 너는 돈을 싸들고 가야해.” 악담이었는데, 이 친구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 그 여학생도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과외가 시작됐다. 학력평가를 해보니 영어는 자기 학년 수준인데 반해 수학은 초등학생 수준이었다. 그래서 70% 시간은 수학, 나머지는 영어를 하기로 했다. 중학교 과정부터 했고, 숙제를 많이 냈다. 숙제를 다 못 하면 체벌을 하기로 했다. 당시이기에 가능한 방식이었다. 이 친구가 반에서 20등 하던 친구였는데, 5개월 만에 전교 15등이 되었다. 나중에는 행정고시를 차석으로 합격해 고위공직자가 되었다. 이후 과외가 많이 잡혔다. 이 여학생이 살던 잠원동 아파트 층층마다 다니면서 과외를 할 정도였다. 이 친구때문에 이 길로 들어섰고, 내가 강사의 자질이 있음을 알았다.

만약에 내가 졸업식장에서 동생말대로 커피장사를 시작도 안 하고 철수했으면 오늘은 없었을 거다. 당시 우리는 믹스커피에 종이컵, 보온병 10개 밖에 없던 열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도했고, 유치한 접근이었지만 강력한 순수함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거 아니지만, 서울대 졸업식 날을 기억한 것 자체가 내게는 유레카였다. 27살의 나에겐 놀라운 발견이었지만, 객관적으로보면 어이없는 결정이었을 수도 있다. 아마 그때 주변에 그 아이디어를 상의했다면 그 누구도 권하지 않았을거다. 그리고 졸업식장에서 망했다는 느낌을 가진 순간에도 답을 찾으려고 했다. 그래서 헤집고 다니며 커피를 팔았고, 지인들이 이상한 시선을 보냈을 때 도망치지 않았다. 그랬기에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과외를 소개 받을 수 있었고 첫 과외학생을 만난거다. 난 그때까지 내가 강의를 잘 하는줄 몰랐었다. 본인의 가장 뛰어난 점을 찾지 못 하고 넘어가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난 그때 찾았다.

1억만 벌고 유학가자.

과외교사로 나름 잘 나갔지만, 과외를 인생의 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87년 8월에 졸업한 뒤 무엇을 할까 고민했는데, 답이 없더라. 그래서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스스로와 타협을 했다. 89년까지 2년만 과외를 열심히 해서 1억 원을 모은뒤 독일로 유학을 가자고 마음 먹었다.

1억을 벌려면 학원에 들어가면 안 됐다. 당시 학원 강사가 평균 100만 원, 많아봐야 500만 원 정도 벌던 시절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혼자서 전 과목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공부를 못 하는 학생은 선생이 많으면 헷갈린다’고 학부모들을 설득했다.

당시 일반적인 방식에서 벗어난 시도를 많이 했다. 일단 한 사람이 전과목을 가르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것이었고 여름에 인간의 엄청난 잠재력이 나온다 보고 ‘9박 10일 지옥훈련’이라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하기도 했다. 나중에 교육사업을 할때 응용해 쓰기도 한 방식이다. 고속터미널 옆에 큰 집이 있었던 학생 집에서 학생들과 함께 합숙을 했다. 그집 어머니한테 여행을 가라하고 다른집 어머니가 와서 식사를 책임지게 했다. 단결하자는 의미의 세리모니도 하면서 하루에 한 과목씩 암기과목을 했다. 자기 전에 일정점수를 통과하지 못 하면 다시했다. 학생들이 스스로를 믿기 시작하면서 성적도 크게 올랐다.

결론적으로 2년간 목표를 초과해 2억을 벌었다. 그리고 쉽게 돈벌 수 있겠다 여겨 독서실 두 개도 인수했다. 그런데 돈은 벌었지만 아버지에게 인정받지는 못 했다. 아버지가 ‘내 아들 아니다’라고 했다. ‘서울대 나와서 뭐하냐’ 하시더라. 명절에도 오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10년간 고향에도 제대로 못 갔다. 가게되도 밤 11시 이후에 가서 새벽 5시에 나와야 했다. 아버지의 반대가 있어 과외수업은 2년만 하고 말았다.

교통사고로 아들과 딸을 잃다. 할 수 있는 건 학원수업 뿐.

과외를 그만둔 90년 3월 2일, 앞으로 뭘 할까 고민했다. 역시나 답이 안 보이더라. 그래서 아버지의 꿈인 판검사를 해보자 싶었다. 그래서 사법고시 관련 책을 사서 도서관에서 보는데 나랑은 안 맞더라. 1주일 간 공부하다 말고 두세 달 간 당구장에서 놀았다. 그래도 90년 5월 8일에 있었던 1차 시험은 봤다. 그런데 시험본 다음날 과외를 요청하러 학부모들이 와 있더라. 뭘할지 답을 찾지 못 해서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90년 11월 학원(경인학원)을 열었다.

91년 9월 15일 내 인생에서 큰 일이 발생했다. 아내와 아들, 딸이 교회 예배를 마치고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인생이 부조리하다 싶었고, 신에게 살려달라 빌었다. 하지만 아들이 일주일만에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아내와 딸은 의식불명이다가 한 달만에 깨어났다. 그 과정에서 딸의 뇌에 문제가 생겼다. 그나마도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92년 6월 11일 새벽 4시 30분에 증세가 재발한 딸도 잃게 되었다. 헛웃음이 났다.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보다 더 망할 수는 없다고 봤다. 오후 3시에 공원묘지에 딸을 뭍고, 1시간 자고 그날 저녁 6시에 나가서 수업을 했다. 당시에는 수업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날이후 본격적으로 학원강사 일을 했다. 일주일에 60시간에서 72시간 정도 강의를 했다. 엄청나게 많이 한거다.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을 만든 주역이 되다. 

나는 30대 중반까지 그냥저냥 살아왔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돈은 벌었지만 늘 가졌던 윤리적 고민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개인 윤리적으로 나는 목숨걸고 학생들을 가르쳐서 성적을 올렸고, 그에 걸맞는 대가를 얻었다. 이는 개인에게는 ‘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윤리적으로 보면 강남 부자집 아이들의 성적을 끄집어 올리는 역할을 했다. 내가 그 역할을 함으로써 다른 아이들이 이유없이 떨어지는 결과를 낸거다. 사교육이 가진 가장 큰 문제이고, 나의 행위가 사회의 발전이 아닌 사회에 불평등과 모순을 만든 것이었다. 이대로 사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그래서 36살이었던 96년 인생을 되돌아 보고 어떻게 살 것인지 또 고민했다. 우선 학원을 접기로 했다. 쉽지는 않은 결정이었다. 포기할 것이 많았다. 당시 운영하던 학원에서 월 소득이 4~5천만 원이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으로치면 2억 원 정도 되는 돈이다. 하지만 불합리를 만드는 그 일을 계속하는 것은 아닌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학원을 닫고보니 당장 할게 없더라. 어머니가 성직자가 되길 권했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불쑥 든 생각이 벌어놓은 돈으로 학교를 세우면 잘 할것 같았다. 모아놓은 자금이 3~40억 정도 있었고, 펀딩도 하면 학교 하나는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교육으로 더럽게 번 돈, 공교육으로 깨끗하게 쓴다는 그림도 나쁘지 않았고. 하지만 생각을 하면 할 수록 학교를 세우는 것이 교육에 대한 헌신인지, 그럴싸한 지위를 얻기위한 얇팍한 자기 위안인지 잘 모르겠더라. 당시 엄청 울었다.

30대 중반 비즈니스를 결정하다. 

그러다 내 의식 안쪽에 낡은 사농공상 인식이 있음을 인지했다. 그 주변에서만 뭔가를 찾고 있었다. 예나지금이나 ‘사자’를 높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나도 그랬다. 이와 반대로 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성숙한 자본주의가 되려면 ‘상농공상’이 되어야 한다고 봤다. ‘상’은 기업이다. 농자천하지대본이 아니라 상자가 천하지대본이 되어야 하는 시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업이 존경받고 사회 중심이 되어야 하는 사회, 기업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을 키우는 등 사회를 주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36살에 비즈니스를, 기업을 하겠다 마음 먹었다. 분야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강의 분야였고, 이전과 같은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96년 12월 21일에서 97년 1월 1일, 1박 2일 간 경기도 이천에 가서 사업 구상을 했다. 34시간 동안 고민했고 그것을 ‘R.O.O.T 97 신화창조의 원년’이라 이름붙였다. R.O.O.T는 내가 운영할 기업의 운영 원리이자 가치이자 뿌리로, 합당한 성과와 지향성(Reasonable)을 가지고, 합리적인 조직의 운영능력(Organ)을 통해, 혁신을 지향하는 구성원의 열린마음(Open mind)으로, 함께(Together)해서 신화창조를 하겠다는 의미다.

이 원리를 바탕으로 97년부터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대중강의를 하려고 했다. 그래서 노량진, 강남에 있는 종합학원에 찾아갔는데, 처음에는 원장들이 안 받아줬다. 그래서 ‘나를 선택 안 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실수라는 걸 알려주겠다’고 큰 소리치고 왔다. 터무니없다 여겼을거다. 여담이지만, 그때 원장들이 지금 만나면 후회한다 하더라.

들어간 학원에서 전과목을 가르치고 싶었는데, 전공수업만 해야한다는 학원가 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게 역사밖에 없었다. 그것만 해서는 바꿀게 없었다. 그래서 사회전체를 하나로 묶는 ‘통합사회’라는 패러다임을 만들어 냈다. 시작할 때 폐강도 많았고, 첫 수업에는 학생이 8명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5000명이 듣는 수업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강사 인지도가 올라갔다. 강사료만 월 4~5억이 들어왔다.

그런데 99년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된다. 당시 대치동 학원가에 전국 곳곳에서 학부모와 학생이 입시 유학을 오던 시절이었는데, 어느날 학부모 한 명이 새벽 1시에 케익을 사들고 왔다. 학생 성적도 오르고 이사온 대치동 아파트 집값이 3개월만에 3억이나 올라서 감사하다고 전하더라. 또 내가 이 사회에 나쁜짓을 했다고 여겼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대치동 사교육 현상을 만들어 사교육의 지역 불평등을 만든 장본인이 되었던 거였다. 이것의 해결방안을 찾다가 시작한 것이 메가스터디다.

메가스터디의 시작… 그리고 후회

그해 홈쇼핑을 보다가 ‘백화점이 사람에게 오는 시대’를 체감했다. 그러면 학생이 학교를 가는게 아니라 ‘학교와 학원이 집으로 오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전국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학원수업을 생각했다. 그러면 교육의 지역 불평등이 해소될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2000년에 자본금 3억 원 투자해 인터넷 강의 전문 기업 메가스터디를 창업했다. 그리고 익히 알려졌다시피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사실 사업을 시작할 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시작했다. 세계최초 온라인 강의의 상용화를 이루었지만, 단지 오프라인 강의를 온라인으로 옮겨놓았을 뿐 그 뒤에 일어날 수 있는 많은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 했다. 근본적인 오프라인 시스템을 못 바꿨고, 강사들의 몸값만 올리는 치킨게임이 벌어지게 했다. 그것이 나중에 큰 독이 되서 올거란 것도 예측하지 못 했다. 만약에 당시 우리에게 뛰어난 인재가 있었다면 메가스터디가 정점을 찍었을 때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끊임없는 고민 ‘어떻게 살것인가?’ 

내가 늘 놓치지 않았던 것은 ‘어떻게 살것인가’다. 그것에 대한 답을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찾으려고 노력했다. 스타강사가 되서 나는 돈은 많이 벌었지만, 사회적 범죄자가 된 기분을 가지고 살았다. 온라인 교육을 미래지향적으로 못 바꾼 것은 늘 부끄럽다.

그래서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 내가 실패라 생각한 것을 개선하고, 새로운 교육 비즈니스를 만들려고 고민중이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었고, 우선 급한불부터 끄자고 생각해서 빚을 갚는 마음으로 설립한 것이 재단이다. 재단을 통해 스타트업, 예비창업자들을 최대한 돕겠다. 많이 지원해 달라.

“노량진을 바꾸겠다.” 57세에 새로운 도전

기업을 하면서 느낀 것 중 가장 중요하다 여기는 것은 좋은 인재를 잘 찾아내고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스펙이나 능력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최고의 인재는 착한 사람이다. 자신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할 줄 아는 착한사람, 혁신을 고민하며 미래비전을 가진 안목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업은 다시 힘을 받는다.

최근 노량진을 바꾸는 새로운 시도를 준비하고 있다. 젊은 창업자들이 스타트업 생태계를 만드는 이 시간 같은 연령대의 젊은이 상당수는 노량진에서 공무원을 준비중이다. 합격률 1.8%의 이 말도 안되는 시험에 엄청난 수의 청년들이 몰리고 있는거다. 이는 대한민국이 썪고있고 망하는 길이다. 공무원 수를 늘리는 것으로 뭔가를 찾으려는 것은 위험한 시도다. 그래서 노량진을 바꿔 청년들이 새로운 꿈을 꾸는 곳으로 만들 생각이다. 노량진이 공무원 시험을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청년들이 새로운 꿈을 꾸는 곳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청년들이 고민을 하며 공부할 수 있는 곳, 공무원이 안 되더라도 플랜B를 꿈꿀 수 있는 곳, 이를 같이 고민할 수 있는 교육과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사업을 비전을 가지고 추진하고 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새로운 영역의 교육분야로 진출하려 한다. 메가스터디는 그간 교육이라는 바운더리 안에서 지극히 일부분인 입시시험 분야에서만 사업을 해왔다. 그외 교육 영역을 찾아 새로운 도전을 할 계획이다. 내 마지막 바람이다.

기자 / 제 눈에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연예인입니다. 그들의 오늘을 기록합니다. 가끔 해외 취재도 가고 서비스 리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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