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7. 닷컴 그 늪에 빠지다.
대한민국 스타트업을 위한 어느 벤처투자자의 수줍은 고백
“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요즘 아침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아파트 뒷산을 올랐다. 간밤에 비가 조금 내렸는지 흙길이 축축하다. 날씨는 그리 춥진 않으나 유독 손 만은 추위를 탄다. 그래도 계속 올라갔다. 정상 부근에는 운동기구가 몇개 구비되어 있다. 그 중에서 45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 윗몸일으키기 기구에 누웠다. 아직은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시야에 들어온다. 싹을 틔우기 바로 직전 상태인 듯, 뭔가 움추리고 아직 속살을 드러내기엔 부끄러워 하는 듯. 그렇게 나뭇가지 너머 바라본 하늘은 해가 이미 떴음에도 불구, 회색빛으로 우중충하다. 꼭 2002년 닷컴버블이 꺼져가기 시작하던 그때 처럼.
1999년 권성문 대표에 의해 인수된 KTB는 그 해에 6,000억원 가까운 돈을 번다. 이미 KTB가 보유하고 있던 한국통신프리텔(현 KT 모바일 부문), GS홈쇼핑 등이 상장하여 주가가 급상승 했기 때문이다. 권성문 대표의 선견지명, 즉 물건을 제대로 알아보는 안목을 높게 살 수 밖에 없지만 KTB의 보유 주식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빠른 민영화에 매달린 정부의 정책적 판단도 아쉽긴 마친가지다. 한해에 6천억원의 자본증가는 닷컴버블을 믿게 만든 원동력이고, 모두들 그게 계속 지속될 것으로 믿었다.
수천억을 번 다음해 2000년 초쯤으로 기억난다. 신년을 맞아 경영진이 경영계획을 간단하게 발표하고 직원들과 함께 만찬을 즐기는 자리이다. 강남역에 있는 KTB 빌딩 카페테리아에서 만찬이 진행되었다. 권성문 대표는 모두발언을 통해, 올핸 매출 10조에 순이익 1조 회사로 만들어 가자고 역설한다. 순이익 1조 나면 모두 BMW, 벤츠 한대씩 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어진 만찬행사, 난 영화투자팀에 있었다는 이유(실상은 잘 나댄다는 이유로)로 사회자로 부름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전 영화투자팀 이희우 입니다. 아까 권대표님이 BMW, 벤츠 얘기 하셨는데 여기서 넌센스 퀴즈 하나 내겠습니다. 맞추신 분은 권대표님이 아마 큰 선물을 주실 겁니다”
“와~”
“KTB 직원이 제일 좋아하는 자동차는 뭘까요?”
“저요, 저요”
서로 서로 대답하려고 난리다. 몇명을 시켰더니, “페라리요, 람보르기니요” 다른 사람은 “재규어요” 등등 계속 차 이름이 터져 나온다. 내가 답을 알려주었다.
“바로 SM5 입니다”
“……”
“아 그게 권성문대표님 이름 Sung Moon의 이니셜 SM을 따서…”
일순간 고요. 쩝, 그것으로 그날 사회는 망쳐버렸다.
2011년 1월, 인터넷 2팀으로 던져진 나. 한때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영화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화평이나 긁적거리고 있다. 그래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그 당시 KTB는 인터넷 투자를 강화하기 위하여 3개의 인터넷팀을 신설했다. 그리고, 인터넷 분야 전략적 투자(오너의 취향에 맞는 것을 통상적으로 전략적이라고 함)를 위하여 인터넷기획팀도 추가하였다. 내가 배속된 팀은 인터넷2팀, 당시 팀원으로는 고병철(현 KTB네트워크 상무), 조종수, 황승택(현 하나대투증권 애널리스트) 그리고 나.
인터넷은 새로운 신기루를 만든 것 같다. 기업가치 평가를 위한 적당한 방법이 없어 PSR(매출액주가비율), 유저획득비용(User Acquisition Cost) 등의 기법이 등장한 것도 그 무렵으로 기억된다. 뭐 매출도, 이익도 날 구석도 안보이는데 회사가치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고. 국내시장에서도 신규로 상장한 새롬기술,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른다.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인터넷으로 모두가 연결된 세상, 이것은 정말로 신기루였다.
사람들이 미친듯이 모이고 열광하고, 또 하루아침에 거부가 되는 것을 주식시장에서 보다 보면 다들 판단 기준이 흐려질 수 있다. 거품이 이미 낀 것이지만 거품을 즐기려고 모인 사람들에겐 그건 더 이상 거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거품이 터지면 본인이 흠뻑 졎는 줄도 모르고.
거의 모든 벤처캐피탈들이 인터넷 투자에 매달렸던 것 같다. 나도 그랬으니깐. 술집 이름도 야후, 닷컴이 다 붙었던 시기였으니. 인터넷 관련 초기기업이 다수 만들어지는데 기존 투자심의위원회(투심위) 구조로는 그 투자 물량과 속도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회사에선 5억이하 투자건은 담당 부문별 상무 전결로 투자규정을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투자담당 상무들은 투심위라는 엄격한 잣대에 기를 피지 못하고 있다가 뜻하지 않은 투자규정 변경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가려서 투자를 했겠지만 그래도 5억 이하 투자건이 이내 남발되기 시작했다.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 대부분의 투자는 잘게 쪼개 투심위를 피한 5억이하 투자건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런 남발 투자건들은 버블이 꺼진 2002년 하반기 선후배 동료들을 무더기 내보내는 쓰라린 구조조정으로 되돌아 왔다.
버블이 끼었다 하더라도 그 버블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치고 빠지던가, 아님 아마존이나 옥션처럼 시장을 장악한 다음 마켓플레이스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 그 버블 와중에서도 돈을 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옥션 투자자겸 대주주 였던 권성문대표의 투자안목과 IPO 타이밍은 참으로 절묘했다.
2000년 초, 코스닥 상장을 위해 예비심사를 청구한 옥션(상장 당시 매출 14억원, 손실 39억원), 이미 옥션은 부채비율이 높다는 이유로 ‘보류’ 판정을 받았던 바 있다. 그리고 3월말 두번째 옥션 코스닥 상장 심사를 받기 전, 대주주 권성문 대표가 옥션 경영진들을 불렀다.
“이번엔 반드시 코스닥 통과시켜야 합니다”
“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본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정말로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모든 것이라뇨? 어떻게요?”
“우세요”
“넵?”
“코스닥 상장심사 위원회 위원들과 회사 경영진간 마지막 미팅 자리가 있을 겁니다. 왜 꼭 상장을 해야 되느냐 묻거든 절박한 심정으로 이제 막 시작하는 대한민국 인터넷 산업 발전과 후배 인터넷 기업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도 옥션이 꼭 코스닥에 상장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십시오. 그럼 다 해결될 겁니다”
“……”
나중에 옥션 관계자 중 한명에게서 전해 들은 얘기지만 참으로 대단한 시츄에이션. 실제로 그때 경영진들은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옥션은 2000년 6월 코스닥 시장에 당당히 입성했다. 이 또한 닷컴 버블 시절의 재밌는 에피소드 중 하나임엔 틀림없다. (권대표님도 옥션 관계자 분들도 이 에피소드에 허허 웃어 줄 것으로 믿는다)
요즘 스마트폰 관련 기업에 투자가 몰리고 있다. 모바일 인터넷이 유선 인터넷을 다 갈아치울 태세이다. 과도한 쏠림은 항상 거품을 만들어 왔다. 거품이 항상 나쁜 것 만은 아니다. 닷컴버블 시절에도 야후, 이베이, 아마존이 탄생하였고 우리나라에선 NHN, 다음, 옥션 등이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영업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주류(Main Stream 또는 플랫폼)가 될 수 있는 비즈니스를 하는 것과 제대로된 제품/서비스를 가지고 적절한 시장 타이밍(Time to Market)에 고객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런 기업들은 항상 시장상황에 좌우되지 않고 성장을 구가해왔다. 창업자들은 항상 여기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때론 아주 절묘한 Exit 타이밍에도. 마치 닷컴버블이 빠지기 전 옥션의 상장처럼, 작년 모바일 메신저가 주춤할 즈음의 틱톡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