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철하고 건조한 숫자로만 보자면 이렇다. 아산나눔재단이 선발한 정주영 창업경진대회 – 다양성 트랙(아산 상회) 9개 팀. 그중 탈북민과 이주민 대표 5팀, 외국인 창업가 4팀. 총상금 5천9백만 원. 초기 사업화 자금 7백만 원. 매칭그랜트 지원금 최대 5천만 원.
숫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숫자 뒤에 숨겨진 인간이다. 미국, 일본, 대만, 러시아, 스페인. 그리고 북한. 서로 다른 곳에서 태어나 자라왔으나 한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창업이라는 모험을 시작하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는 통계 속에 매몰되기에는 너무나 생생하다.
정주영 창업경진대회-다양성 트랙(아산 상회)’ 선발 결과는 단순한 명단 발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이 한국 창업 생태계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는 종종 창업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다. 자본? 기술? 인맥? 전문성?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을 시도할 수 있는 ‘자격’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창업의 기회가 차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 아산 상회는 그 믿음을 실천으로 옮긴 프로그램이다.
이들이 선보이는 사업 영역도 다양하다. 식물성 식품을 개발하는 ‘김미사보르’, 한강에서 수상스포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돌핀서프’, 기업의 잉여 자원을 ESG 자산으로 바꾸는 ‘모나’, 남북한 맞춤형 이미지 컨설팅을 제공하는 ‘미소컬러틱’, 가슴 탄력 유지 솔루션을 개발하는 ‘시크릿’. 각각의 아이디어 속에는 창업가 자신의 경험과 문화가 녹아있다. 문화적 다양성이 창의성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사업의 영역만큼이나 그들이 품은 꿈의 크기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욕망을 넘어선다. 자신의 이야기를 사회에 들려주고, 그 이야기가 가치를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 그것이 이들이 창업이라는 고된 길을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이주민이나 외국인 창업가들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일까. 기회의 땅인 동시에 장벽의 땅이 아닐까. 언어의 벽, 문화의 벽, 사회적 네트워크의 부재라는 벽. 그들은 매일 그 벽과 마주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음식을 주문하는 일, 계약서를 읽는 일, 사업 파트너를 찾는 일—조차 그들에게는 작지 않은 도전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금전적 지원이 아니라 체계적인 인큐베이팅, 맞춤형 컨설팅,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과의 네트워킹이다. 아산 상회가 언어·문화적 배경을 고려한 맞춤형 1:1 인큐베이팅을 제공하고, 창업가 간 네트워킹을 위한 정기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코딩, 디자인, AI 교육을 제공하는 ‘에스초이스합시다”, ‘AI기반 마케팅 자동화 솔루션을 제공하는 ‘여명거리”, ‘탈북민 인플루언서 플랫폼 ‘원코리아커넥트”, ‘K-뷰티 의료 산업에서 관광객 유치 및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하이퍼커넥티드”까지. 이들의 사업 모델은 각자의 배경과 경험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것은 단순한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넘어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에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아산 상회는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통합의 실험이자, 다양성이 창의성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탐색하는 여정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목소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다.
선발된 9개 팀 중 일부는 결선 심사를 통해 정창경 다양성 트랙의 데모데이에 진출할 자격을 얻게 된다. 총 5개의 결선팀은 하반기에 열리는 통합 데모데이 무대에 올라 투자자 및 창업 생태계 관계자들에게 사업을 알릴 수 있다. 대상, 최우수상을 포함해 총상금 5천 9백만원이 수여된다.
이 숫자들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금액의 크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이들의 도전에 부여하는 가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아산나눔재단은 프로그램 이수 후 투자를 유치하거나 정부가 지원하는 창업패키지에 선정되어 사업화 자금을 유치한 창업팀에는 매칭그랜트 방식의 지원금 최대 5천만원을 수여한다. 이는 이들의 성공이 단순히 개인의 성취를 넘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다는 인식의 반영이다.
2024년에는 아산 상회 5기 알럼나이이자 AI 기반 스타트업-글로벌 투자자 매칭 플랫폼 운영사인 ‘박스레더’가 매칭그랜트 지원금을 받은 바 있다. 이런 성공 사례는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더 많은 이주민과 외국인들이 창업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는다.
박성종 아산나눔재단 사회혁신팀 팀장의 말처럼, “올해 정창경 다양성 트랙을 통해 아산나눔재단은 기존 탈북민 외에도 이주민, 외국인 등 다양한 배경의 창업가들이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했다.” 이 확대의 의미는 단순히 지원 대상의 확대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바라보는 다양성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는 데 있다.
이 프로그램의 진정한 성공은 몇 개의 팀이 생존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배경에 상관없이 창업을 꿈꾸게 되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얼마나 단단하게 구축되느냐에.
한편, 아산나눔재단은 ‘2025 정주영 창업경진대회’에 글로벌 트랙, 다양성 트랙, 기후테크 트랙, 예비창업 트랙 등 총 4개 전형을 신설하고 트랙별 맞춤 지원을 제공한다. 각 트랙은 아산나눔재단이 기존에 운영해온 청년 창업 지원 프로그램과 연계되며, 창업팀 단계에 맞는 성장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하반기에는 총 상금 4억원의 통합 데모데이를 개최하고, 멘토링, 해외진출 지원, 네트워킹, 마루 사무공간 입주 기회, 투자 연계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한다.
숫자로 끝나는 이 기사는, 숫자로 시작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의 이야기가 있다. 서로 다른 문화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땅에서 자신만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이야기. 그들의 도전이 우리 사회를 더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는 희망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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