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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창업’하는 스타트업들, AI가 바꾼 성장 공식

협업 플랫폼 에어테이블(Airtable)이 지난 6월 ‘재창업(refounding)’을 선언했다. “기존 플랫폼에 AI 기능을 덧붙이는 게 아니라, 회사를 처음부터 다시 만든다는 각오로 접근했습니다.” 공동창업자이자 CEO인 하위 류(Howie Liu)는 이를 피벗(pivot)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잘못된 방향을 수정하는 게 아니라, 원래의 야망을 새로운 방식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는 재출시(relaunch) 같은 표현도 고려했지만, 결국 ‘창업’이라는 단어를 택했다. 창업 때만큼 중요한 순간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에어테이블만이 아니다. 채용 플랫폼 핸드셰이크(Handshake)는 기존 비즈니스에 스타트업 문화를 다시 불어넣겠다며 주 5일 사무실 출근을 의무화했다. “의미 있는 속도와 근무 시간으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는 게 CMO 캐서린 캘리(Katherine Kelly)의 설명이다. 부동산 플랫폼 오픈도어(Opendoor)도 비슷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모두 최근 몇 달 사이 ‘재창업’을 선언했고, 대부분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나 AI 제품 출시와 맞물려 있다.

피벗이 아닌 재창업

재창업은 사업을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만들 것인지부터 재정의하고, 새로운 워크플로우에 맞춰 제품을 재구축한다. 지금은 그것이 생성형 AI를 시스템 안에 깊숙이 내장하는 것을 뜻한다. 표면에 기능 하나 얹는 수준이 아니라.

비즈니스 측면에서는 패키징과 가격을 새로 짜고, 특정 고객에게 최적화된 영업 경로를 만들고, 성공 지표를 명확히 세운다. 순 달러 유지율(NDR, Net Dollar Retention), 투자 회수 기간, 부착률(attach rate) 같은 것들이다. 운영 방식도 달라진다. 책임 소재가 분명해지고, 제품 출시 속도가 빨라지고, 제품·데이터·시장진출전략(GTM, Go-to-Market)을 누가 책임질지 확실해진다.

문화적으로는 기대치 자체를 다시 맞춘다. 핸드셰이크는 속도를 높이기 위해 전원 사무실 복귀를 밀어붙였다. 에어테이블은 AI 중심 개편을 더 큰 미션으로 팀을 재결집하는 두 번째 창업으로 포장했다.

언제 일어나고 있나

일정한 패턴이 있다. 영업에 쏟는 에너지는 늘었는데 성장은 멈춰 있다. 순 달러 유지율이 100% 밑으로 떨어진다. 영업 사이클은 늘어지는데 평균 계약 가치는 그대로다. 로드맵은 고객 요청에 끌려다니며 방어적이 된다. 시장을 만들기보다 요구사항을 처리하느라 바쁘다.

AI가 이 움직임을 가속화한다. 소프트웨어 구매자들의 기대가 재설정되고 있다. ‘보조 기능’ 정도였던 게 이제는 기본값이 됐다. 가트너와 IDC 조사를 보면 예산이 AI 네이티브 워크플로우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특히 생산성 향상을 측정할 수 있는 제품들로. AI가 학습하고 가치를 만드는 시스템이 되지 못하면, 남의 데이터와 모델 위에 얹힌 얇은 껍데기가 될 수 있다.

돈 문제도 있다. CB인사이트에 따르면 스타트업의 38%는 자금이 떨어져서, 35%는 시장 수요를 못 찾아서 망한다. 재창업은 수요를 분명히 하고 돈 쓰는 속도를 조절해서 활주로를 늘리려는 시도로 보인다.

어떻게 실행하고 있나

이들은 명확한 이야기부터 만들었다. 핵심 문제가 뭔지, 누가 그걸 절실하게 느끼는지, 왜 우리 제품이 필수인지를 정리했다.

제품은 밑바닥부터 다시 짠다. AI 시대 소프트웨어는 데이터가 돌고 모델이 개선되는 루프를 갖춰야 하고, 안전과 거버넌스를 위한 장치도 필요하다. 가치가 빠르게 입증되는 대표 워크플로우 몇 개에 집중한다.

시장진출전략도 새로 짠다. 전담 팀을 꾸려서 목표와 인센티브를 따로 설정한다. 핵심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거래들은 잘라낸다. 가격은 사용자 수가 아니라 성과 기준으로 매기고, 레퍼런스 고객을 통해 빠르게 투자수익률을 증명한다.

회사 돌아가는 방식도 바뀐다. 활성화율, 사용 깊이, 확장, 총이익률 같은 핵심 지표를 주단위로 점검한다. 보상 체계를 바꿔서 새로운 행동을 유도한다. 핸드셰이크처럼 속도가 급하면 피드백 사이클을 압축하기 위해 팀을 물리적으로 다시 모으기도 한다.

돈도 다시 배분한다. 새 제품과 영업 방식에 제대로 투자하고, 과거 베팅에는 손절선을 긋는다. 그리고 기술·시장·매출 가정들을 단계적으로 검증하는 마일스톤을 세워서 이사회에 보고한다.

한국에서는

한국에서 재창업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스타트업은 아직 없다. 다만 2021-2022년 투자 붐 때 시리즈 B-C를 받은 SaaS 기업 중에는 비슷한 상황에 놓인 곳들이 있을 것이다. 성장 둔화, AI의 기본값화, 길어지는 영업 사이클.

다른 경로도 열리고 있다. 68만 구독자를 둔 IT 유튜버 조코딩은 지난 6일 ‘1인 창업가 지원’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개발자에게 기본 연봉 4,000만원을 주고, 프로젝트가 수익을 내면 일정 부분을 나누는 구조다. 2주 만에 200여 명이 지원했다.

이건 재창업과는 다르다. 처음부터 1인 개발자 + AI를 전제로 한 ‘AI 네이티브 창업’이다. 팀을 어떻게 꾸릴지 고민할 필요 없이, AI를 동료로 여기고 시작하는 방식. 조코딩은 이를 “AI로 찾아온 1인 창업 시대”라고 불렀다.

기존 조직을 AI 중심으로 뜯어고치는 것과, 처음부터 AI 기반으로 설계하는 것. 두 경로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어느 쪽이 더 유효할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AI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사업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기자 / 혁신적인 스타트업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전달하며, 다양한 세계와 소통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 I want to get to know and connect with the diverse world of start-ups, as well as discover their stories and tell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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