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미디어 : 프리젠테이션 #3] 프리젠테이션 그 결정적 순간
필자는 홍보일에 종사하면서, 스스로 프리젠테이션할 일도 많고 클라이언트가 프리젠테이션하는 모습을 지켜 볼 기회도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장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날이 갈수록 가장 매력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늘 자신보다는 클라이언트를 앞에 내세우는 그림자 같은 홍보인의 삶에서 유일하게 본인의 기량을 맘껏 드러내는 기회가 바로 기획한 내용을 프리젠테이션하는 자리이고, 그래서 필자는 늘 동료들에게 ‘제안서가 우리의 작품이고 프리젠테이션은 우리의 쇼’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곤 한다. 한편, 그간 수많은 클라이언트와 일을 하고 고객사 임직원의 프리젠테이션을 지켜 보며 깨달은 것은, 기자간담회나 행사에서 발표할 기회에 CEO나 임직원 본인이 프리젠테이션을 직접 준비하고 효과적으로 해 내는 회사의 경우, 전반적으로 대내외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고 각종 홍보마케팅 업무에 있어서도 협력이 잘 되며 결과가 만족스러울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이는 전혀 우연이거나 놀라운 일이 아니며, 특히 스타트업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청중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실제로 ‘눈이 열리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프리젠테이션은 어떤 것이겠는가? 말솜씨가 좋고 프리젠테이션의 기술적인 면이 뛰어난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발표자가 자기가 말하는 내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때,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 역으로 말하면, 발표할 내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그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 직접 기획하고 슬라이드도 스스로 만들며 발표자로 나서는 프리젠테이션이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는 CEO가 운영하는 회사 전체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것은, 다른 일로도 바쁜 대표나 임원이 슬라이드 제작 스킬 연마에 정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슬라이드는 프리젠테이션의 일부일 뿐이며, 어차피 분량이 많거나 고도의 기교를 쓸 필요도 없다.) 부분적으로 동료나 부하 직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전문가의 조언을 구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할 이야기는 내가 기획하고 준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남에게 전적으로 맡겨 버려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당신이 간담회를 열든, 어떤 다른 행사에 초대되어 발표할 기회를 가지든, 주어진 시간 동안 온전히 ‘내 스스로 내 회사, 내 제품, 서비스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하는 장’이 바로 프리젠테이션이기 때문이다.
이제 드디어 준비한 프리젠테이션을 무대에 올릴 시간이 왔다. 그럼 오늘은 프리젠테이션의 시나리오 짜기 및 실제 발표하는 순간의 기술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자.
프리젠테이션 시나리오: 오프닝에서 클로징까지 완벽한 흐름이 되도록 하라
본 연재 2편에서도 말했듯이, 슬라이드는 당신의 대본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청중의 이해를 돕고 프리젠테이션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시각적 도구이다. 당신의 스크립트는 따로 슬라이드 노트에 준비해 놓아야 한다. 그런데, 각 슬라이드마다 그 내용에 해당하는 스피치 스크립트를 쓰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실제 리허설을 해 보며 전체 프리젠테이션의 흐름이 적절한지 보고, 아니라면 바로 잡는 것이다.
기획 및 슬라이드 제작 때 전체 프리젠테이션의 흐름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어야 하고, 따라서 이 단계들을 거치며 흐름이 어느 정도 정해졌겠지만, 대단한 고수가 아니고서는 실제 프리젠테이션을 해 봤을 때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라 당혹스러울 것이다. 프리젠테이션 리허설은 횟수를 정할 것도 없이 완벽해질 때까지 수없이 반복하는 것이지만, 처음 한 두번의 리허설은 아직 프리젠테이션 시나리오를 짜는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
일단 도입부를 흡인력있게 처리하는 것이 전체 프리젠테이션에 대한 청중의 몰입도를 좌우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흔히 재미있는 농담으로 시작하기도 하는데, 잘 되면 효과가 큰 것도 사실이나, 생각처럼 호응이 없을 경우 청중을 얼어붙게 만들고 발표자 본인에게도 정신적 타격을 초래하여 이후의 프리젠테이션을 매끄럽게 이끌어 나가기 힘들 수 있으므로, 평소 재담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면 시도하지 않는 것이 낫다. 대신, 도입부를 길게 끌지 말고, 다소 저돌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면서 시작하자. 그 문제란 물론 당신의 회사가 영웅처럼 등장해서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며, 이 문제해결이 그대로 도입부 다음 내용이 된다. 그 이후에 당신의 회사와 소개해야 할 제품, 서비스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혹은 어떤 비즈니스 모델로 수익을 내는지) 여유를 가지고 설명하자. 다음에는 이를 통해서 사용자의 삶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영웅이 인도하는 이상향’을 그려주고, 이를 가속화하기 위한 회사의 향후 계획과 비전을 소개한다. 당장 투자를 유치해야 한다든가 파트너를 설득해야 할 목적이 없는 경우 여기에서 끝맺을 수도 있으나, 이런 실질적인 목적으로 비즈니스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는 마지막에 반드시 청중의 다음 행동을 촉발하는 강력한 ‘call to action’ 으로 클로징해야 한다. 이를테면, ‘왜 우리 회사를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소제목으로 앞에서 말한 포인트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주면서 긍정적 검토를 호소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있다.
그럼 여기서, 실용적 비즈니스 프리젠테이션은 아니지만 스타트업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영상을 하나 보도록 하자.
Devices, Platforms and a New Way of Life: Evernote CEO Phil Libin의 SDF 2012 프리젠테이션
전설적인 명 프리젠테이션들은 수없이 많지만, 지금 본 예는 필자가 지난 수년간 실제로 현장에서 볼 기회가 있었던 프리젠테이션들 중 최고로 손꼽는 것들 중 하나이다. 서울디지털포럼에서의 발표라는 특수한 상황상 자사 비즈니스 홍보를 하기 위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포럼의 주제와 관련있는 범위내에서 본인이 왜 이런 비즈니스를 시작했으며 이것이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자신이 그리는 기술의 미래상과 여기에 자신의 회사가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담담하면서도 충분히 흥미롭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회사를 이끌고 제품을 개발하는 바탕이 되는 CEO 자신의 비전을 진정성있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 부분을 자사에 대한 설명으로 할애하면서도 상업적인 인상을 주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몇 장 안되는 단순한 슬라이드 (필 리빈 CEO 또한 본인의 프리젠테이션 슬라이드를 직접 만든다.), 아주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적 vs. 영웅’ 구도를 통해 자사 제품을 소개하고 이것이 우리 삶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보여주는 스토리텔링 기법, 본인의 생활 속 에피소드를 통해 설득력을 높인 점 등 테크닉적인 면에서도 탁월하다. 특별히 작정하고 한 농담이나 강렬한 비주얼은 없지만, 전체적으로 ‘무기교의 기교’를 보여주는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프리젠테이션의 훌륭한 예라고 하겠다.
프리젠테이션의 실제: 무리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무리수를 둔 농담으로 청중을 웃기려고 애쓰기보다는 잔잔한 흥미를 유발하도록 전체 프리젠테이션을 매끄럽게 진행하는데 역점을 두는 것이 좋다. 다만, 계속 비슷한 톤으로 가면 지루해질 수 있으므로, 청중이 다른 것은 다 잊어 버려도 이것만은 기억했으면 하는 부분을 미리 염두에 두고 강조해야 할 대목엔 확실하게 힘을 실어야 한다. 즉, 강약과 완급 조절을 하면서 리듬감있게 진행하는 것이 관건이다.
내용에만 강약을 줄 것이 아니라, 호흡과 목소리 조절도 강약을 두어서 해야 프리젠테이션 내내 지치지 않고 청중에게도 편안한 느낌을 유지할 수 있다. 프리젠테이션하는 동안의 자세는 손을 자연스럽게 움직이되 기본적으로 양팔을 약간 벌린 자세가 좋다. 발표자의 자신감을 표현하면서 청중을 포용하는 느낌도 주기 때문에, 프리젠테이션과 발표자에 대한 인상을 좋게 만들어 준다. 팔을 벌린 자세는 본능적으로 의기양양할 때의 제스처인데, 역으로 일부러 이 자세를 취해도 자신감을 높이는데 효과가 있음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하니, 연습때부터 습관화하도록 하자.
영어로 프리젠테이션을 해야 할 경우 기본 원칙은 다를 것이 없으나, native speaker가 아닌 처지에 영어로 발표를 해야 한다면 몇 배의 연습이 필요하다. 슬라이드 텍스트와 스크립트를 쓸 때부터, 국문으로 써 놓고 영문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지 않음에 대해서는 전편에서 이미 말한 바 있는데, 실제 스피치를 하다 보면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Plain English로 짤막하게 끊어 가며 스크립트를 구성하는 것이 좋다. 원어민의 스피치도 잘 하는 사람일수록 한 문장이 길지 않고 사용하는 단어도 쉬운 것들이다. 하지만, 역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내내 한 사람이 발표해야 하는 것은 부담이 아닐 수 없는데, 비단 영어 프리젠테이션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미리 만들어 놓은 동영상을 적절한 타이밍에 활용하는 것도 청중의 집중력을 환기시키면서 발표자는 한숨 돌릴 수 있는 영리한 방법이다. 두 사람 이상이 발표를 하는 것 또한 연결만 자연스럽다면 시도해 볼 만하다.
실전을 치르기 전, 완벽해질 때까지 리허설을 반복해야 함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반드시 다른 사람의 피드백을 받도록 하고, 자신의 프리젠테이션을 비디오 촬영했다가 보면서 점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오늘 이야기를 마치기 전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은, Steve Jobs의 키노트를 참고하되 따라 하려고 너무 애쓰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의 프리젠테이션에는 분명 배울 점이 많지만, 잡스의 카리스마와 극적인 프리젠테이션 연출력은 함부로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죽하면, 찬사와 비아냥이 뒤섞인 표현으로 Reality Distortion Field 라는 말까지 하겠는가?) 피상적인 테크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확신과, 처음에는 자신만 가지고 있던 그 확신에 청중을 동참시키고자 하는 열의이다. 잡스는 가장 잡스다운 화법으로 그것을 실현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우선은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가운데 가장 자신다운 화법을 찾게 되기 바란다.
이상으로 프리젠테이션 기획에서부터, 내용 개발, 실제 발표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정이 끝났다. 다음주에는 부록으로, 다양한 프리젠테이션 소프트웨어에 대해서 살펴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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