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년 만에 대통령이 바뀌었다. 이재명 신임 대통령의 취임선서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민생, 경제, 통합, 평화, 민주주의, 문화까지. 다만 내용이 많을수록 지킬 약속도 많아진다.
약속은 쉽게 하는 것이지만 지키기는 어렵다. 특히 정치인의 약속은 더욱 그렇다. 정치인은 선거 때 많은 약속을 한다. 당선되고 나면 그 약속들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약속보다 복잡하다. 예산도 부족하고, 반대도 많고, 시간도 짧다. 결국 약속의 절반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새 대통령의 취임선서에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벼랑 끝에 몰린 민생이라는 표현을 썼다. 벼랑 끝이라는 말은 무겁다. 한 발만 더 나가면 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벼랑 끝에서는 물러설 곳도 없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내란을 여러 번 말했다. 내란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군인이 총을 들고 국회에 들어간 것은 분명 내란이다. 하지만 내란에 대한 분석과 처벌만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과거를 정리하는 것과 미래를 설계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둘 다 필요하지만, 균형이 중요하다.
내란을 겪은 나라들을 많이 보았다. 스페인도 그랬고, 칠레도 그랬고, 아르헨티나도 그랬다. 내란을 겪은 나라는 오래도록 상처를 짊어지고 간다. 상처는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만, 어떤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다. 특히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눈 상처는 그렇다.
새 대통령은 통합을 말했다. 분열을 끝내겠다고 했다. 통합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통합은 행위로 되는 것이다. 원수를 용서하고, 적을 품고, 미운 사람과 손을 잡는 행위로 되는 것이다. 그런 행위는 고통스럽다. 정치인에게는 특히 그렇다. 정치인은 표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 대통령은 북한과 대화하겠다고 했다. 평화를 만들겠다고 했다. 평화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평화는 혼자서는 만들 수 없다. 상대가 있어야 한다. 북한이라는 상대가. 북한은 70년 동안 우리와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논리가 있고, 그들의 생존 방식이 있다.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평화는 공염불이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했다. 성장을 회복하겠다고 했다. 경제는 살아 있는 생물과 같다. 생물은 먹이를 먹어야 산다. 경제의 먹이는 투자와 소비다. 투자는 미래에 대한 믿음이고, 소비는 현재에 대한 여유다. 믿음도 여유도 쉽게 생기지 않는다. 특히 불안한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이 나라의 경제사를 말할 때 사람들은 늘 기적을 말한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지만 기적은 없었다. 기적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 뒤에는 계산이 있었다. 냉정한 계산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계산이. 농업을 포기하고 공업을 선택했다. 시골을 포기하고 도시를 선택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한국이다. 성공도 있고 부작용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 몸으로 하는 일로는 기계를 당할 수 없다.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새 대통령이 말한 인공지능과 반도체가 그런 것이다. 하지만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기술을 다룰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들이 행복해야 한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좋은 기술을 만들 수 없다.
이 나라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제강점기의 어둠에서 왔다.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왔다. 군사독재의 억압에서 왔다. 그런 어둠과 폐허와 억압을 겪고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일본으로부터, 가난으로부터, 독재로부터. 벗어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무엇을 향해 가는지는 잘 모른다. 벗어나는 것과 향해 가는 것은 다르다. 벗어나는 것은 뒤를 보는 것이고, 향해 가는 것은 앞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뒤만 보고 걸어왔다. 이제는 앞을 봐야 할 때다.
새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가 진심인지, 그가 할 수 있는지, 그가 해낼지. 정치인의 말은 늘 의심스럽다. 그들은 표를 얻기 위해 말한다. 하지만 때로는 진심인 정치인도 있다. 그런 정치인은 표를 잃더라도 옳은 일을 한다.
연설이 끝났다. 이제 시작이다. 말의 시간이 끝나고 행동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말은 바람과 같다. 바람은 시원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다. 하지만 바람만으로는 집을 지을 수 없다. 집을 지으려면 나무와 돌이 필요하다. 정치도 그런 것이다.
이 나라는 지금 칼날 위에 서 있다. 칼날 위에서는 균형이 중요하다.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떨어진다. 새 대통령이 그 균형을 잡아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여러 번 해봤다. 폐허에서 일어서고, 가난에서 벗어나고, 독재를 무너뜨렸다. 그때마다 누군가는 균형을 잡았다. 때로는 대통령이었고, 때로는 국민이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새 대통령의 연설에는 의지가 있었다. 의지만으로는 부족하지만, 의지 없이는 시작할 수도 없다. 시작이 있어야 끝도 있다. 끝이 좋으려면 시작이 좋아야 한다. 오늘이 그 시작이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