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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4. 미뤄진 인생계획

대한민국 스타트업을 위한 어느 벤처투자자의 수줍은 고백

“이희우의 쫄지마! 인생”

 

1997년 난 한국종합기술금융(현 KTB네트워크)에 입사했다. 벤처캐피탈 입사의 기쁨도 잠시, 바로 이어진 부서배치는 나를 절망으로 빠뜨렸다. CRDC(Center for R&D Commercialization). 연구개발실용화사업팀. 아찔했다. 첫 상사도 독특한 캐릭터의 소유자 W. W는 후에 큰 사고로 ‘큰 집’ 신세를 지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자취방. 나의 미래를 고민했다. 과연 여기서 내 꿈을 펼칠 수 있을까? 밤마다 고민했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시작한 것이 소설쓰기. 나의 암흑기 고등학교 시절을 무대로 소설을 써내려 갔다. 회사를 관둘까 라는 생각은 매일 매일 머리 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팀이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연구개발한 것들을 상용화 하는데 투자할 돈도 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상용화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전문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대 출신 2명이서 뭘 하라는 건지. 이럴 꺼면 왜 나를 뽑은 거지?

사회 첫 출발은 극도로 미약했다. 그래도, ‘승려와 수수께끼’의 저자 ‘랜디 코미사’의 조언처럼 더 큰 인생목표를 위해서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는 이것을 ‘미뤄진 인생계획’ 이라고 설명한다. 즉,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찾고 하기 위해서는 인내하는 시련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5개월을 견뎠다. 밤마다 소설을 쓰면서. 대학 3학년이 되면서 나의 염세주의는 거의 극복 되었다고 자부했었는데 그게 직장 초년병 시절에 다시 찾아오다니. 밤 10시 이후 맥주 광고만 보면 어김없이 편의점으로 달려가 맥주를 사와서 마셨다. 신경도 예민해 져서 같이 있는 룸메이트가 내가 잘때 들어오면 경기 일으키듯이 일어나서 잠을 못들기 일쑤였다.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 조직개편이 있었고 나는 다른 부서로 배치되었다. 복권부. 당시는 KTB가 과학기술부 산하 공기업이었기 때문에 과기부의 복권사업(더블복권, 기술복권)을 운영하고 있었다. 벤처캐피탈사에 들어와서 두번째 부서도 복권부라니. 그리고, 나의 담당업무는 내가 지긋지긋해 하는 ‘회계’라니. 

복권부에서 만난 두번째 상사 P. P는 나보다 열 세살은 많은 분이셨다. 회계업무만 십년 넘게 하신 P 앞에서 난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애송이 신입사원이었을 뿐.

“이희우씨, 대학에서 회계 배웠지?”

“네, 배우긴 했지만…”

“근데 좋은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차변, 대변도 제대로 모르나!”

“그게…”

난 1학년때 ‘회계원리’를 듣고 D를 맞았다. 그것을 미루고 미루다 군대 복학이후 재수강해서 겨우 B로 올려 놓았다. 그렇지만 난 회계는 ‘차변’ ‘대변’ 용어부터 그냥 싫었다. 재수강 때문에 억지로 한번 더 들은 것이었을 뿐. 한번은 식사 중에 이런 일도 있었다. 

“이희우씨, 내가 이런 얘기는 안하려고 했는데 기본적인 예의라서. 밥 먹을 때 입 벌리고 쩝! 쩝! 소리 내면서 먹지 말라고. 격 떨어지게 그게 뭐야. 입 다물고 소리 내지 말고 먹어야지. 이렇게”

“…”

(물론 P의 그 때 충고 이후 난 쩝쩝 거리면서 먹지 않게 되었다.)

P의 회계에 대한 구박은 갈수록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아래 여직원도 날 무시하는 것 같았다. 밟을수록 더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게 나의 본성이었던가? 난 입사동기 안상준(현 코오롱인베스트먼트 상무)을 꼬셔서 당시 최고의 회계학원인 홍대 부근 ‘웅지회계학원’에 등록했다. 중급회계. 삽질(?) 송상엽 원장님이 직접 강의하는 중급회계를 들으면서 난 감가상각비가 뭔지 대손상각비가 뭔지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세달을 다닌 것 같다. 이제 회계가 뭔지 조금씩 알게 되었고 P의 업무지시에 내 나름대로의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복권부 온지 6개월이 넘어 연말이 다 되어갈 무렵에는 나 혼자 결산까지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그리고, 난 P에게 소심한 보복(?)을 하기 시작했다. 기존 관행처럼 처리되어 오던 복권부 회계를 내가 배운 회계기준에 맞게 다 재조정하였다. 특히 복권회계에서 가장 중요한 비용항목을 차지하는 당첨금 추정 부분에서는 나만의 새로운 논리를 개발해서 적용하였다. 이론에서도 P에 결코 밀리지 않았다. 구박 받으면서 품은 독기가 나를 회계전문가로 만든 것이다.

복권부에는 P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복권부에서 인생을 함께 갈 귀중한 선배들을 만났다. 신진호(현 KTB네트워크 대표), 유우재(현 KTB네트워크 이사) 그리고 동기 남경우. 신대표님은 나의 인생에서 정신적인 멘토 역할을 해주고 계신 분이다. 내가 튜브인베스트먼트, IDG 등에서 힘들어 할 때마다 “희우야, 갈 데 없으면 KTB로 다시와.”라는 말로 나에게 용기화 희망을 불어 넣어 주셨다. 신대표님의 따스한 말 한마디가 “희우야, 세상과 더 부딛쳐봐. 넌 잘 할 수 있어. 그러다 깨지고 힘들고 쓰러지면 너 한텐 돌아올 고향이 있잖아” 라는 의미로 나에게 다가왔다. 애처가(?) 유우재 형은 나의 지나친 장난과 농담도 잘 받아주는 따뜻한 선배다. 남경우는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있어 연락이 잘 되지 않지만 나와 함께 어려운 시기 술잔을 기울여 주고 함께 있어준 멋있는 남자다. 이 복권부 식구들은 나의 인생에서 큰 재산이 되었다.

미뤄진 인생계획. 조금 미뤄지면 어떤가. 난 앞으로 20년은 더 벤처캐피탈 바닥에 있을 건데. 난 복권부 시절을 통해서 벤처캐피탈 투자의 기초가 되는 회계를 배웠다. 그리고, 이 업에 함께갈 귀중한 사람을 얻었다. 

그렇다. 인생은 길다. 그 긴 인생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위해서는 일정 희생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기초를 다지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한다. 그런 기초는 투자부서가 아니더라도 쌓을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이 하찮고 볼품없는 일이라고 느껴진다고 그걸 건너뛰려고 하면 정작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수가 있다. 사회 초년병 시절 내가 복권부를 박차고 나왔다면 난 아마도 현재 VC 바닥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난 내 인생 2년 반을 잠시 미뤄놓았다. 

1997년 KTB 네트워크에서 벤처캐피탈에 입문한 후 현재 코그니티브인베스트먼트를 설립 및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스타트업을 위한 고품격 투자상담 토크쇼 “쫄투! 쫄지말고 투자하라”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 교육에 관심 많아 예비 창업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창업교육 프로그램인 “쫄지마! 창업스쿨”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4년 7월 그 동안 플래텀에 연재한 글과 새로운 창업이야기를 담은 ‘쫄지 말고 창업(이콘출판)’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벤처캐피탈, 창업, 스타트업, 기업가정신 등에 관심이 많아 개인적으론 그쪽 분야를 계속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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